다시 보는 요한복음(19) (요9:13~24)

2020. 3. 29.(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번역하신 메시지 성경의 시편 91편 14~16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필사적으로 내게 매달리면 내가 온갖 곤경에서 너를 구해주리라 네가 오직 나만 알고 신뢰하면 내가 너를 지극한 사랑으로 보살피리라

나를 불러라 내가 응답하겠고 네가 고난당할 때 너와 함께 하며 너를 구해 내어 잔치를 베풀어 주리라 네가 장수하여 오래도록 구원의 생수를 마시게 하리라”

참 은혜가 되는 말씀이다.

(2) 시편 90편을 박 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시편 90편에서 그랬다는 것이다.

“하나님 저 형편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지금까지 그 크고 위대한 기적을 계속 베풀어 주셨단 말입니까?”

깜짝 놀랐다. 목사님께서는 시편 90편 어디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세의 질문에 나중에 답하신다. 두 번째 므리바 사건 때이다.
”너 왜 내 백성들에게 욕을 하냐? 너는 내 심부름꾼이고 저들은 내 아들과 딸 들이다.“

(3) 이 형편없는 우리들을 아들과 딸로 삼아주신 아버지 하나님. 코로나 19도 저희가 이겨낼 수 있게 힘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아멘.

2.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에서 보시다시피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를 고친 문제는 매우 놀라운, 기적으로서도 놀라운 사건이고 그 의미하는 바도 대단히 깊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장님이 장님 된 이유가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부모의 죄도 아니고 자신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이려고 그 사람이 장님이 되었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장님을 고치는 일을 위하여, 애꿎은 사람 하나를 장님으로 살게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고생했을까, 억울하다, 하는 생각이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것과 함께 우리에게 떠오른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고 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고 있고, 하나님이 장님의 눈을 뜨게 하는 식으로 일하고 있다, 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예수를 반대하고, 적개심을 가지고 처치하려는 사람들과 싸우는 와중에 예수께서 이런 큰일을 행하자, 반대파들은 이 기적의 크기나 장님을 보게 했던 뜻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 본론
(1) 눈을 뜨게 하여 진실을 보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께서 지금 하시는 일이다. 장님에게, 힐문하는 반대파 사람들이 와서, 정말 예수가 네 눈을 뜨게 했느냐, 고 물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내가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예전에는 못 보았는데 지금은 보인다. 신자들의 경험이다.

그러나 적대자들은 그 말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네가 반대하고 자기네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것이, 그들에게는 매우 불쾌했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경쟁심과 분노를 일으키게 했고 그들은 그러한 편견에 잡혀있었다.

장님이 보는 것 같이 예수가 오셔서 우리를 보게 하신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서 우리의 심령의 눈을 뜨게 하여, 하나님을 보게 하고 예수를 믿게 하는 일을 하시며, 하나님이 지금도 하고 계신다, 라고 이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이 오셔서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못 보던 것을 보게 하듯이, 그 심령의 눈을 뜨게 해서 예수를 보게 한다면, 왜 이 대적자들, 즉 반대하고 사사건건 덤벼드는 저들의 심령의 눈을 뜨게 해서 예수가 누구인지, 메시아가 무엇을 하러 왔는지,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보이지는 않는 것일까?

끝끝내 감추고 주님이 죽는 자리까지 평행선을 긋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일을 하시고 적대자들은 적대자들의 일을 하게 두셨는가?

왜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예수를 거부한 상태로 고집스럽게 남아 있는가?

요한복음을 읽을 때 우리가 놀라는 것은 예수님을 보낼 때 하나님은 장님의 눈을 뜨게 하듯이 우리 심령의 눈을 뜨게 하여 예수를 알고 예수를 보낸 아버지를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께서 구원과 창조의 역사를 위해서 왔으나 요한복음은 1장 이렇게 말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사람들의 생명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증거로 그 많은 기적을 일으켰으나 사사건건 그들은 모든 기적을 왜곡시키고 그것으로 인해 더 화를 냈다. 가장 많았던 사례가 안식일에 일한다는 것이었다.

모세의 법을 어기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래서 그들은 이것을 신성모독이라고 예수님께 뒤집어씌웠다.

우리는 이 문제의 핵심적인 질문을 만난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려고 오셨는데 저들은 왜 점점 더 완악해져 갔는가?

예수님이 부활과 기적과 부족할 것이 없는, 많은 증거들을 제시했으나 반대하는 자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그렇다.

더욱 어려운 것은 예수님께 은혜를 입고 눈을 뜨게 된 자들도, 그의 신앙생활에서 눈을 뜬 것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눈을 떴으면 다른 시험이나 걱정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도대체 눈을 떴다는 것이 얼만큼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인가, 가 우리에게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2) (롬10:1~3) 이스라엘은 왜 예수를 믿지 않았는가? 자기 의를 하나님의 의보다 앞에 세웠다. 자기 의의 정당성은 물론 율법이었다. 율법을 주신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의 해설에 나오듯이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사람을 잡는 데 썼다.

심판의 기준이 되고 비난과 정죄의 규칙이 되었지, 하나님께서 이것을 왜 주셨는지에 대해 곡해했다.

결국, 유대인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바울이 예수와 예수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경지에 간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었지만, 그 율법으로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리까지 왔다.

(롬10:5~7) 예수는 우리가 모셔오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기 발로 우리를 찾으러 왔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 좇아가거나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가서 빌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고 방문하는 것이 아니다. 왜 이 얘기를 해야 하는가?

(롬 10:8~13) 이것은 신약시대 모든 신도들의 현실이고 고백이다. 율법은 행해야 보상을 받는 것이지만, 믿음은 찾아가거나 도를 깨우치는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찾아다니지 않아도 우리 마음속에 쑤욱 들어온다. 무엇으로 증명이 되는가?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 먼저 믿은 사람들을 통해 믿었다.

우리는 예수를 부르고 예수를 믿는다. 우리가 도를 깨우치기 위하여 산에 올라가고, 어떤 경을 읽고, 무슨 수련을 하고, 이런 것들이 아니라 어떻게 된 일인지 어느 날 내가 예수를 믿고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 얘기가 왜 나오는가?

네가 예수를 만들었느냐? 네가 믿는 예수는 어디서 왔느냐? 누가 전해 준 것 아니냐? 그래서 그 이름을 들은 것이다. 그리고 믿게 된 것 아니냐?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왜 너에게까지 와서 예수를 믿으라고 했을까? 누군가가 보낸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다.
이렇게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마음 판에 씌어 졌다. 예레미아 31장에 기록된 새 언약처럼, 우리 마음 판에 새겨진 것이다.

어떤 법칙에 따라 열매가 맺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이루신 그 구원을, 전도자와 증거자를 통하여 우리 귀에 들려주었을 때, 우리는 이상하게 마음에 화합이 되어, 받아들였다.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다.

이 장님을 보게 하는 것 같이, 고후4:6에 의하면,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창조다. 이 창조는 어디서 온 것인가? 내 안에서 자생했거나 내가 만든 결과물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받은 것이다.

(롬10:16) 그렇게 많은 선지자를 보내고 그렇게 많이 증언을 했으나, 이사야 53장에 있는 예수님의 한탄처럼, 누가 우리의 전한 것을 믿었는가? 라고까지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나타났어도 보았어도 믿지 않았다는 말이다.

(롬10:17) 누가 와서 말하고 우리가 그것을 들어서 영접한 것은, 예수가 지금 여기 실로암 연못가에 가서 눈을 씻으라, 라고 했던 그 능력과 그 구원의 은총과 같다. 우리가 증언을 듣고 우리 마음에 빛이 비치고 생명이 생겨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신약시대, 교회 시대를 열었던 그 부흥과 자랑이 다 예수로 말미암는 것이다.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빛을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눈을 만져 주시지 않으면, 그 심령에 찾아가지 않으시면, 같은 말을 들어도 그 시대에 반대했던 사람들같이 반대의 자리를 고집하게 된다.

여기서 쉽게, 그러니까 믿어야 해, 그러니까 거부하면 안 돼, 라고 말하면 안 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만 눈을 뜨게 할 수 있고 예수님만이 할 수 있었다면, 왜 모두에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질문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영접하고 믿은 자에게 믿은 자의 보상을 왜 지금 주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까지도 계속되어야 한다.

(롬10:17~18) 이스라엘은 왜 안 믿었을까? 여호와의 말씀과 여호와의 팔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토록 열심히 선지자들이 찾아갔는데도 듣지 않았다.

혹시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라는 변명이 나올 수 있다. 그러자 시편 19편이 인용된다.

(시19:1~4)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창조세계가 절망이었고 공포였고 죽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로는, 십자가 부활 이후로는, 어느 유명한 분의 표현처럼, 온 우주에 부활의 영광이 충만하도다, 라고 선언한 것이 맞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고백이요 자랑이다.

그러면 왜 아직도 믿지 않는 자가 있느냐? 아직도 반대하는 자가 있느냐? 우리는 왜 믿었는데도, 부활의 영광이 충만한 세상에서 이렇게 고단하게 살아야 하느냐? 내 마음은 왜 늘 왔다 갔다 하느냐? 이것들은 약간 2차 적인 문제이다.

로마서 10장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님이 지금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롬10:19) 모세가 한 말이다. 너희가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을 배반했던 것이 한두 번이냐? 너희는 우상까지 섬겼다. 하늘의 별들을 섬기고 너희 하나님을 진노하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분노하셨다.

너희가 나를 버렸으니 나도 너희를 버려서 너희가 나를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긴 것 같이, 내가 내 백성을 버리고, 나를 모르는 백성들을 내 백성으로 삼아서 너희에게 분 풀이를 하겠다. 너희를 시기하게 하겠다.

지금 와서 보니, 이것이 바로 이방 민족이었다. 이스라엘이 순종했으면 우리는 큰일 날뻔했다.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넘쳤다. 순종했다면, 또 어떤 순조로운 방법으로 우리가 주 앞에 부름을 받았겠지만, 저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넉넉한 은혜가 우리에게까지 왔다는 것에 우리는 놀란다.

(롬10:20) 하나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 오겠다고 하신다.

세종대왕이나 연개소문에게도 오셨다는 것 아닌가?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 우리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그를 찾지 않고 그가 있는 것을 모르는 자에게도, 먼저 찾아가셨다고 한다.

어려운 표현이지만 이 신비를 우리는 열어 놓아야 한다.

(롬10:21) 이 못난 이스라엘에게 대해서 하나님은 등을 돌리지 않고 오라고 종일 손을 벌리고 있었다. 실로암 사건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지금 일하심은 같다.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를 보게 하신다.

이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은혜요, 구원이요, 기적이면서, 또 어떤 이들에게는 반발이요, 분노요, 적대가 되는가? 그래서 사망을 만드는가?

이것 모두가 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실이라는 정황에서 하나님은 순순히 말을 듣는 자와 반대하고 왜곡하며 분노하는 자와 방관하고 구경하는 자를 그대로 두고 일하신다. 강요하지 않으신다.

나는 구하지 않는 자에게도 나타나겠다. 나를 거절한 백성에게도 종일 손을 벌리겠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우리 심령의 눈을 뜬 자로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다. 안 믿는 사람은 처벌하고 믿는 사람만 모아 놓으면 간단히 해결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온 우주에 충만한 부활의 권능, 증거, 능력을 가지고 안 믿는 사람을 그대로 둔 채 일하신다. 그리고 이 과정 내내 함께 씨름하신다. 우리의 탄식과 간절함보다 더 크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가 너를 어찌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스보임 같이 놓겠느냐?

내 속에서 내 마음이 불붙듯 일어나 너희를 향하여 내 인애가, 내 긍휼이 솟구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는 이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다. 결어

(1) 우리의 결론은 너무 조급하다. 하나님의 결론은 길다. 못난 자들을 기다리시고 항복의 과정을 허락하신다. 어떻게 보면 진실하게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야속할 수 있다. 먼저 믿는 자들의 인내와 기다림과 기도를 요구하신다.

이 하나님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이 아니신가?
(2) 우리는 모세에게서나 바울에게서나 그들이 때가 찰 때까지 많은 고생을 한 것을 기억한다. 모세가 미디안 40년을 보내는 것은 그냥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미디안 40년은 광야 40년을 떠돌 수 있는 실력을 만드는 시간이었고, 사도 바울이 스테반을 죽이듯 펄펄 뛰었던 그의 열심은, 그 후 예수를 만나고 나서 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준비하게 했던 시간이었다.

바울은 예수의 영광을 이해하고 기꺼이 순종하는 길을 갔다.

어려운 것을 감수하고 죽음을 각오하는 처절함과 지극함이라는 감성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해내야 하는 진지함의 문제이다.

하루를 하루씩 채워나가는 성실함. 우리 눈에는 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운영하는 방법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웅대하고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하나님은 이 일에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시고 우리의 삶을 쓰시겠다고 한다. 실로암 사건으로 우리가 기억을 되살리기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언제든지 새로운 창조로 인생과 역사에 들어오십니다. 언제나 놀랍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보다 더 큰 기적이 지금 우리 시대 나와 함께 벌어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요구하시며, 우리가 주께서 하시는 일에 온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고단한 길입니다. 그러나 복된 길입니다. 명예로운 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동역하고 함께 일을 하는 귀한 기회입니다. 빼앗기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창세기 2장 3절이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셨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라.”

내가 구역장을 할 때 우리 구역원이 나에게 물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이때 끝난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 아닌가요?

나는 논쟁이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답을 했다.

네 집사님,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이후 많은 새사람이 태어났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도 부족하지만 이때는 15년쯤 전이라 더욱 밑천이 딸리는 구역장을 하고 있었는데 어려운 질문에 그래도 겨우 답을 했다.

(2) 이번 설교에서 목사님은 너무 분명하고도 너무 담대하게 말씀하신다.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하나님은 언제든지 새로운 창조로 인생과 역사에 들어오십니다.

어떤가? 당신의 생각은? 하나님은 모든 창조를 끝내시고 지금은, 말하자면, 자신의 피조물들을 잘 관리하고 계시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창조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고 믿는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