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사43:1~7)

2020. 3. 1.(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온 나라를 덮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우리가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가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물론 예방과 감염 방지를 위해서라지만 충격은 감출 수가 없다.

(2) 그러나 역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매 주일 교회에 가면서 이것이 이렇게 큰 축복이구나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 깊이 깨우치게 해주신다. 주일예배는 너무나도 큰 축복이었다.

성도님들 모두 힘내십시오.

2.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의 내용인 이사야 43장의 내용은 그 역사적 배경이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신을 믿는 바벨론에게 굴욕적인 멸망을 당하고, 성전이 훼파되고, 그 백성들이 붙잡혀 가, 곤핍하고 모욕적인 어려운 시절 겪고 있을 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이러한 일들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어났었고, 지난 2,000년간 기독교 역사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그래서 더 많은 기대와 약속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이사야 43장의 약속들은 중요했고 요즘 새삼스럽게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된다.

바벨론 포로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다윗의 왕권에게 주어진 영원한 약속, 네 위가 영원하리라, 그리고 성전을 소유하고 있다는 그 안전장치, 네가 이 전을 향하여 기도를 하면 듣고 이전에 나와 제사를 드리면 받으리라, 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보장 속에서, 어찌 이러한 현실, 즉, 성전이 훼파되고, 다윗의 후손인 왕이 포로로 잡혀가고, 죽고, 나라가 없어지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에 하나님께서 회복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 회복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회복을 시킬 수 있다면 처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고 그럴 수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방법을 택하시며 또 우리들 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에게 어떤 대상이며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는가, 라는 질문들이 연결되어 있다.

나. 본론

(1)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던 시절에 유다 백성들은 근거 없는 낙관에 물들어 있었다. 앞에서 얘기한 것 같이 하나님이 자기들의 편이라는 사실이 저들을 타성에 젖게 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멸하시고 바벨론에 팔아넘기신다. 정치적 군사적 패배에 의한 포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넘겨 주시는 징벌이다. 무슨 가치가 있는가? 정신 차리게 한다.

저들이 가지고 있는 근거 없는 낙관, 생각 없는 삶에 대하여 하나님이 간섭하여 흔드신다. 저들이 가지는 모든 공포,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을 하시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 라는 질문들에 대해 하나님이 가지는 뜻과 목적, 그리고 선조 대대로 이어온 약속들에 비추어, 다시 생각할 기회를 준다.

그러니 이것은 대단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다만 편안한 게 전부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이 바벨론 포로 사건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주어진다. 바벨론에 잡혀 온 백성들은 남 왕국 유다의 백성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야곱아, 이스라엘아 라고 불려진다. 이스라엘은 북 왕국의 이름이었는데, 이 이름의 당사자인 야곱의 생애를 돌아보게 한다.

야곱은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다. 이렇게 된 역사적인 배경,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불리는 역사적 민족적 정체성에 관한 의미가 다시 조명된다.

(2) 야곱이 자기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더 이상 그 집에 살 수 없게 되어 외삼촌 집으로 피난 갈 때 창세기 28장의 벧엘 사건이 일어난다.

그는 잠들어 있고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신다. (창28:10~15) 놀라운 약속을 받는다. 우리는 나중에 창세기 32장에서 얍복 나루 사건을 만날 것인데 야곱은 거기서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다.

그때의 변화, 그래서 주어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과 이름이 여기서 시작된다. 그때 야곱은 이스라엘이 아니었고,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는 20년의 인생을 더 살아야 했던 그 시작점이었다.

야곱은 복을 받아야 할 어떤 조건과 자격이 없을 때 하나님이 약속을 먼저 하신다.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 네 자손이 티끌같이 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돌아오게 하겠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이 과정을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한다. 나중에 32장에서 얍복 나루로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신다. 씨름한다. 야곱은 항복하지 않고 하나님은 그의 환도 뼈를 친다. 그리고 가려고 하자 야곱은 붙잡고 늘어진다.

내게 축복하기 전에는 못 가십니다.
네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
다시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지 마라. 너는 나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승리자이다.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리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이런 아무런 전제 없이 과거와 역사가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야곱의 20년 인생은 자기 마음껏 살아온 세월이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약탈자입니다. 사기꾼입니다.

그의 인생 전체를 가지고 하나님이 그와 씨름을 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우리가 놀라는 것은 창조주이시며 부활이시고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없는 인생, 자기 뜻대로, 자기 고집대로, 자기 기대대로 사는 인생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몰랐을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나서도 그 일은 계속 진행된다. 그런 씨름이 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성경은 이러지 말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고 야곱은 기특하게도 거기에 기름을 붓고, 내가 무사히 돌아오면 여기에 제단을 쌓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준 이름, 이스라엘답게 산다는 것은 꿈도 꾸어보지 못한다.

그는 약삭빠르게 살고, 치열하게 살고, 죽을 힘을 다해서 부자가 되지만, 얍복 나루터에서 그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을, 손에 잡은 모래같이 흘러 떨어지는 것을 본다. 넋이 빠진다.

하나님이 물으신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본 사람에게 물으신다.
네 이름이 뭐냐? 너는 누구냐? 네 삶에 대하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의 답이다. 야곱입니다.

네 뜻대로 네 마음대로 네가 기대했던 부를 축적했는데 왜 나에게 복을 빌어 달라고 하느냐?

여기가 중요한 씨름이다.

다만 약탈자에 다만 사기꾼에 불과했던 그가, 자기 마음대로 산 생애와 하나님의 부르심 아래서, 하나님이 어떤 인생을 펼쳐 내실 것인가를 듣기도 전에 자기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 이건 아닙니다, 라고 항복하는 자리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약속하신다.

내가 너와 제2의 인생을 살겠다. 너는 이제부터 나와 함께 살아라. 너는 승리자가 될 것이다. 이게 이스라엘에게 준 약속이다.

이스라엘이 실패할 때마다, 야곱아 라고 부르신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로 삼았지만 너는 늘 야곱으로 사는구나 이렇게 꾸짖으신다.

그러니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 아직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기 전에라도 그를 불러세워 그에게 모든 약속을 남김없이 다 주셨던 그런 존재였다.

하나님이 나중에 그의 승리와 그의 항복을 목적하시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겪게 하는 이 인생이야말로 항복으로 가는 과정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다.

(3) (롬8:38~39) 여기는 이런 고단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나열된 모든 것이 현실적으로 우리의 경험이 되고, 우리의 환경이 되고, 우리의 조건이 되는 속에서도 우리의 정체성은 훼손될 수 없다. 실패할 수 없다는 약속이다.

여기서 우리의 이해는 분명해진다. 세상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세상이 우리 모두에게 인생을 열심히 살 필요가 없다고 위협하는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19 앞에 서 있다. 우리 모두의 불안은 이것이다.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만 하는가, 하는 공포이다.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는 선언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괴로운 일이 생기는가?

하나님이 너를 만들고 너를 항복 시키는데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떤 과정인가? 놓아 보내시는 과정이다. 탕자의 비유 아닌가?

내 유산을 주십시오. 내 마음대로 살아보겠습니다.
아버지가 기꺼이 보낸다. 단서를 붙이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너와 나는 남남이다.
너 꼭 돌아와야 한다. 이런 말들이 없었다.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
어느 곳에서도 아버지 아래에서 있던 것과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승복하게 된다.

여기가 끝인가? 아니다. 더 배워야 한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가면 끝인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되어서 위대해지고 영광인 인생을 살아야 한다.

자신의 변화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시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로 인하여, 우리 같이 부르실 모든 영혼 들 앞에, 하나님의 손길이 되라고 하신다. 이중적이다.
바벨론 포로는 이스라엘에게 징벌인 것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깨우침과 더 나아갈 신앙의 어떤 비약을 바벨론에 모인 온 세계 민족에게 보일수 있는 기회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인가? 저들이 믿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를 알게 하는데 가장 좋은 자리였다.

전염병 앞에서 우리나라 모든 백성이 두려움 앞에 서 있다. 이것은 신앙의 싸움이 아니다. 전염병과의 싸움이다. 우리는 삼가고 서로 격리하고 조심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게 전부다. 그들은 사망을 해결할 아무런 약속도 소망도 없으니 사망이 드러나게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심해야 할 전염병일 뿐이다. 이런 혼란, 위협, 두려움에서, 우리는 이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절망과 공포 속에 있는 세상에서 한 줄기 빛이라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존재이다. 너희는 안 믿었으니까 병 걸려 죽어라. 우리는 걱정 없다. 이런 식으로 배타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만이 넉넉할 수 있다. 죽음이 우리를 건드리지 못한다. 절망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삶이 우리의 정체성이 저들에게 하나의 분명한 증거가 되어야 한다. 저들의 공포 앞에 우리가 가진 소망과 약속이 빛을 발해야 한다.

우리 인생 속에는 많은 역사적 경험이 있다. 여러 사건이 있었다. 같은 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 사건들을 다 공유하고 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나 열매를 맺는가 하는 점에서는, 예수를 믿는 자와 하나님이 없는 자와는 분명하게 차이가 난다.
우리의 정체성과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현실 앞에 섰을 때 그에게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자기 하나로 답할 수 없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즉 선조들의 증언이 있어야 한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인류 역사 속에 쓰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그중 극히 일부분인 제한된 시간과 경험을 가질 뿐이다. 그러니 뿌리가 있어야 한다. 이 야곱아, 이스라엘아, 라고 하시는 도전은 구약성경에서는 내내 반복된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시내산에서 떨기나무에 불타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자신은 이렇게 설명하신다.

(출3:15)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세상에서 불러내어 그의 복된 나라로 부르시는 하나님. 그 유업을 이어주시는 하나님. 한사람 한 시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고 오는 시대에서 인류 역사의 운명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기회와 경험과 선택과 자유를 주어 우리를 씨름하게 하는 하나님, 항복시키는 하나님. 이렇게 언제나 반복적으로,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이 하나님이 결국 그 아들을 보내신다. 그 아들이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네 이름은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것이 교회다. 무엇이 겁이 나는가?

우리의 긴장은 진정성을 회복하는 것이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일은 없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긍휼과 자비로 인하여, 그 일어나는 모든 일은 복과 은혜와 사랑으로 결과되도록 작용한다.

교회가 이 사명을 모른다면, 성도가 되어 이 정체성과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모른다면 늘 일희일비 할 것이다. 뿌리 깊은, 속 깊은, 무게가 있는 신앙인의 자리를 고수하기 어려울 것이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대단히 중요한 약속을 한다.

다. 결 어

(1) (엡3:20~21)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는 오늘 본 이사야 43장을 늘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 즉 우리가 불 가운데로 지나갈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물 가운데로 지나가도 물이 너희를 삼키지 못할 것이다, 하는 해결로 밖에는 읽어내지 못한다.

예수님이 배 타고 갈릴리 호수를 지나다 잠이 드셨다.
제자들이 펄펄 뛰고 깨웠다. 무엇이라고 답하셨는가?

얘들아, 피조물인 자연이 어찌 창조주를 덮을 수 있겠느냐?
이렇게 꾸중했던 것 기억이 안 나는가?

(2) 말하기 어렵지만, 잘된 일이다. 잘되었다는 것은 우리 신자들이 각각 책임을 돌아보면서 해야 할 고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시대와 이 나라에 보낸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약속의 증인이 교회이다. 우리 자신이다. 누구에게 불평하며 어디에다 원망하겠는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모세에게 약속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나는 한 번도 하나님이기를 중단해본 적이 없다.

여러분의 신자 된 정체성과 운명과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실에 대한 이해가, 여러분을 넉넉하고 담대하고 진지하고 집중하고, 그리고 이스라엘로 뛰어오르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우리가 몰랐을 때에 보낸 것같이 우리의 기대와 기도와 소원과 비명보다 더 크게 갚아 주실 줄로 믿사온 즉,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힘을 다하여 우리 시대에서의 우리 책임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우리 인생을 진심으로 살 것을 약속하오니 주께서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목사님께서는 설교를 통해,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다고 한다.

얘들아, 피조물이 (코로나19 바이러스) 어찌 내 사랑과 계획을 막을 수 있겠느냐? 걱정마라. 나는 너희가 꼭 승리하도록 너희와 함께 있단다.

아멘 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