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17) (요8:31~47)

2020. 2. 16.(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목사님은 스포츠를 좋아하신다. 목사님께서 직접 하시는 스포츠는 테니스, 골프, 당구가 있다. 혹시 당구가 스포츠인가 묻고 싶은 분이 있을 것 같아 친히 말씀드린다.

대한 당구 연맹은 대한체육회에 속해 있는 종목단체이다. 당연히 선수등록도 하고 대한체육회의 지원이나 협조를 받는다.

(2) 물론 이 중 제일 잘하시는 것은 당구이다. 지금 60대 이상이라면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영화를 기억하겠지만 당구에 관한 한 박영선 전성시대가 있었다. 목사님은 젊었을 때 데이트 비용을 당구장에서 마련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자랑하신다.

남포교회가 잠실로 이전한 후에도 목사님은 한동안 왕좌의 자리를 지키셨다. 지금은 목사님께서 주 종목으로 하시던 4구 시대가 가고 3구(쓰리 쿠션) 시대가 와서 이제는 왕좌를 내주셨다.

(3) 목사님은 설교 때 종종 축구 얘기를 하신다.

“아이구 저, 저걸 못 넣어”?

이렇게 말하기는 쉽다는 거다. 그러나 실제로 운동장에서 뛰어 보면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된다고 하신다. 너무 당연한 말씀인데 이 문제가 신앙으로 오면 간단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도 성육신을 삶을 살아 보라고 하신다. 여기에는 절망이 포함되어 있다. 왜 우리는 절망을 겪어야만 하는가? 계속 희망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몇 가지만 잘되게 해주시고 평소에는 그냥 두시면 되는데 절망은 왜 꼭 겪어야만 하는가?

이번 주일 설교에서 답을 하셨다.

절망을 당해보지 않으면 절망을 이해할 수 없다.

2. 내용

가. 서론

(1)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놓아주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이 선언은 매우 충격적인 것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율법을 깨는 것은,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는 굉장한 위법이요 못 할 짓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하듯이,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들은 너무 많아서, 그걸 책으로 쓰면 이 세상을 도서관으로 만들어도 다 넣을 수 없을 정도였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정말 수백만 건의 기적을 행하셨을 것이다. 경우가 다르고, 다 다른 기적을 이루셨을 것이다. 수백만은 조금 시간적으로 말이 안 맞겠지만, 수많은 기적을 베푸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그를 감히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처지였고, 그가 또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선언하니까, 그 시대 사람들은 높은 기대와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간음한 여인 사건에서는 앞뒤가 안 맞는 모순적인 행동을 했으니까, 정치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걸었다. 어떻게 법을 어기는가? 당신이 누구길래 감히 모세가 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가?

너희는 죄의 종이라서 그런다. 진리를 안다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여기서 자유는 율법이 가지는 어떤 구속과 압박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2) 그것이 마음에 들던 안들던, 그것을 유일한 하나님의 법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진리를 운운해서 너희를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하자, 당연히 논쟁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왜 우리에게 자유가 필요하냐?

너희가 죄를 짓고 있지 않느냐? 죄를 지으면 너희는 다 죄의 종이다.

우리가 왜 죄의 종이냐?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나님의 백성인데 우리가 왜 죄 아래 있냐고 하느냐?

너희가 무엇을 하든지 결국 사망을 결과시키지 않느냐?

이것이 진리 싸움을 하는 이 논쟁의 중요한 초점이다.

너희는 그 여인도 범법했다고 죽이자고 했고 내가 그 여인을 살려 주자 나도 죽이려고 하지 않느냐? 너희가 가진 법이나 최선의 진리는 죽이자는 것이고 나는 살리자는 것이다.

너희가 모두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 탓이고,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주려고 하는 생명에서 너희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8장의 중요한 논쟁이다.

나. 본론

(1) 생명이란 다만 존재가 존속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과 대비되는 것이다. 자유는 죄와 대비 되어 있고 진리는 거짓과 대비되어 있다.

거짓이란 무엇일까? 죄란 무엇일까? 죄는 목표에 미달하는 것이다. 죄는 목표를 빗나간 것이다. 죄는 목표를 왜곡하는 것이다.

우리가 늘 보는 증거가 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냐’, ‘웃는 게 웃는 게 아냐’
이 웃음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사는 게 만족스럽지 않다는 거다.

옆에서 부러워하는데, 사는 게 아니라고 한다.

넌 뭐든지 잘 되잖아. 애들은 원하는 대학 다 들어가고, 너는 늙어도 미모가 그대로고, 흰머리도 없고, 남편은 잘나가고. 다음번에 대통령 가능성도 있다며.

그런데 이런 답이 돌아온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죄는 거짓된 것이다. 그 속에선 생명이 영존할 수 없다. 가치가 영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셨다. 너희가 진리를 알고 진리 속에 있다면 너희는 영원한 가치, 영원한 존재가 될 것이다. 죄와 사망의 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이었다. 인류가 가장 진정성을 가졌던 자세는 철학을 하는 것이었다.

철학에서 근본적이며 최고인 과제는, 진리가 무엇인가, 이다. 왜 진리가 우선해야 할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 것인가에 대한 보편적인 근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준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은 이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철학자는 누구를 보아도 웃는 얼굴이 없다. 뜻밖에 목사는 아무리 엉터리라도 웃는 얼굴이다.

큰 소리를 빵빵친다. 내 말만 들으면 갑부되는 거 잠깐이야. 이딴 구라를 친다. 그러나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되는 게 아니라, 될 수도 있다 라는 나라에 와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잘한다는 노래하는 팀들을 만나도 성가대를 따라올 수는 없다. 성가대는 자기가 부르는 것보다도 더 큰 어떤 임재가 있다고 믿는 것이며 본문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그것이 관객들의 호응을 얼마나 받느냐의 문제지만 성가대에서는 하나님이 내 찬송을 받으신다는 것 때문에 언제나 떳떳하고, 희열에 차 있고, 너무 희열에 차 있어서 인상도 쓸 때가 있다.

다른 것이다. 지위와 조건과 운명이 너무 다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너희는 죄의 종이고, 너희의 아비는 거짓의 아비여서 너희는 진리가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다, 는 지적이 대비되는데 이것이 요한복음 8장의 중요한 성경적 설명이다.

우리는 영생과 영광으로 인도된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기회와 명예와 세상이 만들지 못하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

(2) 자유는 선택권인데, 선택권은 선택할 수 있는 지위와 신분이 있어야 한다. 종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종은 시키는 것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오지만 굴복해서 오지 않았다. 선택해서 오셨다. 예수님의 죽음도 누군가에게 예수님이 생명을 내놓을 수도 있고, 다시 가져올 권리도 있다.

우리 신자의 인생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자랑을 할 수도 있고 얼마든지 섬길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고 우리의 영광이지, 힘의 균형이 깨져서 굴복하거나 혹은 정복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의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현실에서 늘 만난다. 정치를 하든 한 반에서 친구들끼리 조그만 사회를 운영할 때에도, 무엇이 맞는가, 라는 얘기를 하려면 보편적 진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보편적 진리를 인류는 가질 수 없었다. 최소한의 진리를 대행할 원칙을 만든 것이 도덕이다. 그 이상은 만들 수 없었다. 그 도덕이 자발성을 가져야 한다는 데까지는 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셔서, 우리의 판단근거, 진리와 거짓의 근거는 예수가 된다. 예수는 우리에게 공포로 찾아오지 않고, 그는 자유로 해방으로 기회로 명예로 찾아오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원은 무엇인가? 영원하도록 존속되고 우거지고 무성하고 풍성하고 넘치는 가치이다. 영광의 무성함, 끝없는 발휘, 이것이 구원이다.

죽어서 천국 간다. 이렇게 정적이고 소극적이고, 하나의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 믿는 것을 늘 혼란에 빠지게 한다.

왜 그런가? 그 복이 지금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단하고 우리는 불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한 가치에서 키워나가기 때문에, 영광을 키워나가기 때문에 우리를 기르는 과정에서 고난이 생긴다.

더 가자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 믿고 제일 많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쉽게 끝내자는 것이다.

하나님, 이것만 들어주시면, 저도 이만큼은 할 테니까, 그 후에는 더이상 만날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가 어디로 발전하는가?
‘빨리 죽는 게 복이야’로 간다.

나이 들어서 비극을 당하면 꼭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게 죄지. 너무나 흔하게 한다. 왜 그런가? 세상은 이렇게밖에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르다. 억지로 아닌 척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 다르다. 성경이 많은 곳에서 이 얘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다르다고, 우리가 가진 자유를 보라고, 그 자유로 영광의 자리에 가라고 한다.

자유란, 오늘 본문으로 말하면, 신분상 아버지와 동등한 자녀들에게만 허락되고 종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지위와 신분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택권이 주어지고 책임을 지게 하신다. 굉장한 특권이다.

이 책임을 질, 이 선택할 권리들이, 예전에 아담에게서는 실패했다. 우리의 실패, 인류 역사 속에서 우리의 본성으로 남아 있는 원죄, 즉 하나님 없는 선택을 하는 것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을 만들었나? 죄라는 것이 무엇을 만들었나? 진정한 지위와 운명에 우리를 데려가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가 오시고,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이 우리를 진정한 목적지로 데리고 간다는 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2) (롬7:14~8:2) 인간은 하나님 편에 서든지, 하나님 반대편에 서든지, 2개의 지위밖에 없다. 내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지키고 싶어 하는 데 지킬 수가 없었다.

왜?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의 법과 다스림에서 벗어나 있었다.

내가 나에게 하는 것은 하나님 없는 선, 하나님 없는 이상들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정의사회를 구현한다고 할 때, 이 말의 무서움은 무엇이 정의인가, 하는 데 있다. 정의의 보편적 근거를 공유하고 납득할 보편적 근거를 이 세상은 만들지 못했다.

개인주의가 되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각각 개인이 절대가치의 판단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라는 말로 쉽게 넘기지 말고,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가치를 판단하는 근거가 각자에게 주관적으로 허락이 된다. 내가 잘하려고 그랬다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무서운 현실이 무엇인가? 조던 피터슨이 썼던 12가지 인생의 법칙에 이런 말이 나온다.

옛날 농경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었던, 죄가 너무 크게 나타나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인간이 뭔가, 라는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심리학이 나오고, 정신병리학이 나오고, 사회학이 나오고, 그리고 인류학까지 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답은 없다.

“악당은 잘 죽여야 10명 죽이는데 진실한 놈은 몇백만 명을 죽인다.”

히틀러, 스탈린, 폴포트가 그랬다. 왜 그런가? 사심이 없는, 본인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양보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는 옳고 저들은 틀렸다, 틀린 놈들만 제거하면 좋은 사람들만의 이상 국가가 된다. 이러한 생각은 서구에서 동양까지 왔고 현대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서구사회가 우파가 되었다가 좌파로 넘어갔다가 다시 우파로 왔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나라가 망하려면 망해라, 나는 희생 못 한다, 하는 데까지 왔다.

스페인이나 그리스에서 한국이 인용되고 있다는 얘기가 있다.

“코리아는 금도 갖다 바쳤다. 코리아 가서 살아라.”

진심이라는 것은 보편적 근거가 아니고 보편적 심정이라는 것이다. 율법이 선한 것을 알고 그렇게 살고 싶은데 안되는 거다. 내가 내가 아닌 거다. 나는 죄에 붙잡혀 있어서 하나님 없는 곳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내가 최선을 만들어도 죄가 된다. 이 상태에서 능력까지 많으면 더 큰 일이 된다. 능력만큼 더 죽인다.

최선의 사람이 누구인가? 진실하지 말고 무능하기도 한 사람이다.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많아야 행복한 사회가 된다고 한다. 우리 교회가 딱 그렇지 않은가? 똑똑한 사람 딱하나가 있고 다 순종하는 사람으로 모여진 남포교회.

공포스럽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 여러분이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면 무엇으로 신뢰를 얻는가? 당신은 이런 이런 증세가 있죠? 이런 이런 증세도 있죠? 이런 것들이 일치해야 한다.

당신은 무슨 병이다. 당신은 폐암이다. 당신은 감기이다. 기침을 할 때 피가 묻어 나오면, 당신은 결핵이다.

검사를 해보니까 폐결핵이 아니고 폐렴이다, 라고 바뀔 수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확인하는가? 증상과 진찰해서 의사가 말하는 증상의 설명을 통해 납득을 한다.

예수님이 지금 그걸 하고 있다. 그리고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하고 있다.

원하는 데 왜 원하는 걸 하지 못하지?

(7:24~8:2)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도대체 왜 우리는 법을 따르고 싶어도 안 되는가? 내가 자유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권이 없다. 나는 죄의 종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한다. 비명을 지른다. 우리가 늘 하는 거 아닌가?
신앙생활 잘 하고 싶습니다. 못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늘 반복한다.

성경은 얘기한다. 법은 자체로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 법을 많이 알면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법은 그냥 조문이고 규칙이다. 그것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 즉 한 인격이 주는 의지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다.

내 잘 잘못이나, 무능과 유능보다 더 큰 의지에 잡히는 것이다. 율법과 새로운 복음을 비교할 때 성경은 이 표현을 자주 쓴다.

옛 언약은 돌비에 쓴 것이고, 새 언약은 심비에 한 것이다. 새로운 존재, 새로운 의지에게 준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 우리를 예수 안에 있게 하심으로 그의 의지가 내 의지가 되게 하셨다. 이게 자유다. 신분이다. 우리의 지위이다. 우리에게는 잘 잘못이 돌비에 갔다가 심비에 갔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약속과 의지와 동행과 운명으로 함께 하신 이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과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고난이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이 고난이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방법 중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절망을 당해보지 않고, 오해를 당해보지 않고는, 아파보지 않고는 사람은 아무것도 안 된다. 이해가 없다.

세상에서 여러분이 하면 안 되는 대화법이 있다. 특별히 한국 사람에게 하면 안 된다.
나 어제 영화를 봤는데 얼마나 슬펐는지 눈물을 펑펑 쏟았어.
난 하나도 안 슬프던데.

이 말은 어디서 나온 예법인가? 남이 슬펐다고 하는데. 그랬어? 그랬구나. 어디가 제일 슬펐어?

얘기한 사람이 처지를 풀어낼 수 있도록 자리와 시간을 줘야 하는데, 난 아닌데 라고 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한 번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공감과 위로를 못 받아서 그렇다. 우리 마음이 딱딱해져서 그렇다. 누가 말을 하면 우리에게는 튕겨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건들지 마. 잡아먹을 거야.

이것은 윤리와 도덕같이 신앙을 강요하면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다. 예수 안에서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여 녹아내려야 한다. 은혜를 받아야 한다.

다. 결어

(1) (사43:1~7) 하나님은 우리 각각에게 이름을 주셨다. 우리 각각을 특별 취급하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온 세상을 값으로 내 줄 수 있다고 한다. 각각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주인공이고 모든 현실이 다 나를 위한 엑스트라이다.

굉장한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다. 걱정하지 말라.

우리는 세상에서는 죽으면 이름도 없는 존재이다. 오래 산 게 죄이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이 우리를 비극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험이다. 여기를 지나가야 한다. 다 해결하고 다 이기지 않는다. 별것 아닌 것 같은 그리고 마음에 안 드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라고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가 증명하지 않았는가?

이 드라마에는 나올 수 없는 결론이 무덤에서 터져버린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한다.

(2) 구원은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에게 허락된 선택과 지위에 주어진 기회라는 것을 기억하라.

잘하려 하지 말라. 실력만큼 하라. 그래서 커야 한다. 그리고 인생이 얼마나 기적인가, 하나님이 얼마나 나와 함께 대단한 일을 하시는가를 깨우치는, 그래서 여유 있는 여러분 각각의 인생이 되기 바란다.

부러워하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치기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얼마나 굉장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또 얼마나 굉장한 일 인가를 알게 하옵소서. 창조주에게 심판자에게 부활과 생명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그렇게 우리는 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겁내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이겨내는 용감한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에필로그

(1) 며칠 전 딸 아이의 시아버지인 사돈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도 그냥 생각해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좋은 분이셨다. 시어머니께서는 소망교회에 출석을 하시는 교인이었는데 사돈어른은 교회에 잘나가시지 않아서 우리 가족의 기도 제목 중 하나였다.
상태가 어려워진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이고 결국 다시 입원하셨다. (병명은 폐암이었다.) 그 때부터 집사람이 병상에서라도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기를 간절히 희망했는데 꽤 시간이 지나서야 그렇게 하겠다는 답이 왔다.

(2) 어떤 계획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갑자기 교회에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윤철규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뜻밖에 이런 답을 주셨다.

“네 집사님, 그러셨군요. 제가 오후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중앙대 병원(흑석동)으로 찾아가 예배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너무너무 고마웠다.

(3) 코로나 19 폐렴 사태 때문에 건강한 사람도 병원에 가기가 꺼려지는 요즘 아닌가? 목사님께서 다녀가신 후 환자의 얼굴이 많이 평안해졌다고 사돈 마님께서 여러 번 얘기하셨다. 나는 며칠 후 사돈어른의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고, 그 자리에서 사돈어른께 내가 준비해간 편지를 읽어 드렸다.

“보겸이 할아버지, 저 보겸이 외할아버지입니다. 폐암도 고통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아버지 품 안에서 편히 쉬세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