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13) (요7:1~24)

2019. 12. 22. (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1년 동안 부족한 제 글을 읽어 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린다. 정확히 말해야겠다.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를 읽어 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린다.

(2) “당신은 박영선 목사님을 잘 아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잘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면 그리고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당신은 50% 정도는 박목사님을 알고 있는 거다.

2005년일까, 2006년일까. 장로 선출하는 공동의회가 있었다. 이 해 따라 말이 많았고 뒷얘기도 많았고 교회가 어수선했다. 공동의회가 끝난 다음 주일에 목사님께서 강대상에 스셨다.

설교 중에 얘기하신 것도 아니다. 시작부터 얘기하셨다.

“왜, 무슨 짓이라도 해서 장로를 해야겠다는 거야?
장로가 무슨 벼슬이라고.
왜들 장로를 하겠다고 지랄들이냐고?”

나는 그때 박목사님의 2, 3, 4부 설교를 다 들을 때였는데 들을 때마다 등에 소름이 돋았다. 2부 때 가장 심하게 말씀하셨다.

(3) 이 질책에는 박영선 목사님의 믿음이 다 들어 있었다.

1) 장로 피택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는가?
2)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이 되었어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어야 하는 것이 성숙한 자세 아닌가?

3) 장로가 되면 정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일꾼이 된다는 것인데 왜 이걸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것처럼 생각하는가?

4) 상대방이 부정을 했다고 온 천지에 떠들고 다닌다는 것은 결국 자기 얼굴에 침 뱉기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5) 내 설교를 20년이나 들어왔는데 우리 교인들의 성숙함이 이 정도밖에는 안 되는가?

(4) 이렇게 살벌하게 시작을 하셨고 그 후 설교를 하셨지만, 설교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2. 내용

가. 서론

(1)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행적들과 권능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것과 달리 논쟁을 조명한다. 기적도 몇 가지 예를 들지 않고 기적이 일어나면 곧바로 그 기적으로 인하여 반론과 비난에 휩싸이는 예수님을 보게 되고 그때 예수님이 하시는 발언들이, 우리의 현실인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현실주의적 체험들을 깨는 말씀들로 다가오게 된다.

오늘만 해도 그 형제들, 그러니까 예수님은 처녀 때 임신해서 낳았고,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들마저도 예수를 믿지 않고, 예수님이 이런저런 기적을 베푸시면서도 공공의 권력을 목적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서 초막절, 우리로 말하자면 추수감사절에, 예루살렘에 백성들이 많이 모이는데 그때 올라가서 기적들을, 또 스스로 증언하시는 메시아, 즉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 됨을 밝히라고 촉구한다.
예수님은 거절한다. 그러니까 보이는 모습으로, 과시적인 차원이 아니라, 당신이 할 일을 위해 숨어 올라가셔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다시 충돌한다.

가장 큰 싸움의 진원지가 38년 된 병자를 고친 요한복음 5장 사건이다.

이 치료를 한 것을 가지고 예수가 안식일에 일을 했다, 라고 시비를 걸었다. 당시의 권력자들, 종교 권력자들과 정치 권력자들이 합세해서 예수를 공격하고 본문에서 보듯이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

예수님은 말한다. 너희들이 나를 죽인다는 명분은 율법을 어겼다는 것인데, 즉, 안식일에 일을 했다는 것인데, 너희가 할례는, 태어 난지 8일 만에 주라고 했기 때문에, 태어 난지 8일이 되는 날이 안식일이라도 할례를 주지 않느냐, 너희도 모세의 법을 지키려고 모세의 법을 범하기도 하지 않느냐, 너희도 이렇게 하면서 내일에만 유독 발톱을 꺼내는 이유는 무엇이냐?

나. 본론

(1)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났는가? 예수님이 그들을 정죄했기 때문이다. 본문 7절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예수님은 왜 악하다고 하셨을까? 정죄는 이것이었다.

내가 하늘로부터 온 메시아이다. 내가 구원자다. 니고데모를 만났을 때 했던 말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나를 믿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올 자가 없다, 이런 것들은 다 지금까지 있어 왔던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신앙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정죄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사람이 한 말과 자기네들의 주장이 상충하고 예수님은 폭력을 쓰지 않는데 이들은 폭력을 쓴다. 죽이려고 한다. 여기가 예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는 부분이다.

잘못된 진리, 잘못된 기대는 결과가 사망으로 끝난다. 세상의 실력이 그 이상을 만들지 못한다. 사망을 면하지 못한다. 예수님만이 사망이 아닌 결론을 내는데, 그만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그의 생애를 통하여, 공생애를 통하여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공생애의 가장 큰 내용은, 세상이 만드는 것은 결국 사망에 불과하고 나만이 생명을 만든다. 영생을 만든다, 라는 것이었다.

영원한 생명이란 생명이 유지 될 뿐 아니라, 늘 더 나아가고 더 크고 더 찬란하고, 더 풍성하게 은혜를 줄 수 있는 분은 예수다, 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싸움이 어디서부터 구체적으로 시작되었는가 하면,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베풀어지자 백성들은 예수를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 지금으로 얘기하면 경제 대통령을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거절하셨다. 너희는 썩을 양식을 위해 애쓰지 마라. 영생하도록 있는 생명을 구해라. 그러니까 당장 질문한다.

무엇을 하는 것이 생명을 좇는 것이며 하나님이 뜻을 따르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대답한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런 말들이 우리에게는 명분으로 남는 바람에, 위의 대조 속에서 세상이 예수에게 기대했던 것은, 결국 체념하고 포기한 인생을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편안하게 살자는 것이며, 그 일에 당신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나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를 해결하러 온 것이 아니고 근본적이고 영원한 운명을 너희에게 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내 피는 새 언약의 피다.

이러한 대조가 없으면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타협하듯이, 그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자식들 고생 안 시키고 자존심이나 세우고 살게 해주세요, 라는 길로 가게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바리새인이다. 우리가 바리새인을 말할 때, 그들은 교만하고, 예수를 대적하고 겉모습만 번드르르했던 외식 주의자들로 단정하고 진심이 없는 명분 주의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생명과 영광이라는 실체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런 쪽은 체념하고, 포기하고 살아왔다. 이러한 생각은 결코 하나님과 타협할 수 없는 것임에도 스스로 만족하고, 이것이 진리라고 외치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은 이들과 대적하셔서 나는 너희들이 생각할 수 없는 큰 것을 목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주기 위해 나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너희를 찾아왔다, 라고 하신다. 나는 그 내용을 너희에게 채워서 너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를 바라고, 그 영광을 신앙 속에서 누려 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폭력과 왜곡된 자존심이 전부인, 즉, 보이는 것으로 이기는 것이 전부인, 이것 이외에는 승부를 걸 곳이 없는, 초라하고 헛되며 포기하고 사는, 자포자기 상태에 있는 삶에 들어오신다.

그리고 영생, 영광, 진리, 사랑 같은 가치들을 가질 수 있도록 도전하신다. 이에 반하여 세상은 헛된 것을 증명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지만 사랑이 이것을 이겨낼 수 있음을 보이신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의 폭력을 감수하신다.

이 폭력은 이 가치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죽음이 생명을 이길 수 없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는 것이 끝인 세상 속에서, 죽는 것의 연장선에 있는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의심, 불안, 오해, 열등감 등을 두려워한다. 사망으로 가는 길에 있는 것들이다.

영생으로 가는 길에 있는 것들은 믿음, 인애, 충성, 용서 등의 단어들이다.

(2)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크게 혼란을 겪는 것은 이쪽이 영생이고 궁극적인 승리라면 왜 그 길에, 이런 짐을 지는 일 즉,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승리와 통쾌함은 왜 없는 것인가?

우리의 통쾌함은 무엇일까? 세상은 이렇게 말한다. 지지마. 이겨. 이겨야 승자인 거야. 지고 나서 변명이나 하는 그런 인생 살지 마. 우리는 이렇게 위협하고 유혹하는 세상에 지는 것이다.

예수를 믿기는 하는데 여전히 세상의 법칙 아래에도 속해 있다. 그 왜곡된 자존심과 왜곡된 권력뿐인 세상에. 그래서 세상은 폭력밖에 휘두르는 것이 없다. 그리고 결국은 사망밖에는 결과되는 것이 없다.

너희는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 자신들의 안심과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자들이고, 예수는 당신의 사명과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이다.

어떤 것이 더 나은가?
예수가 없는 자들에게는 이기는 게 더 낫다.

그게 헛되든, 아무것도 아니든 이기고 봐야 한다. 지면 괄세가 있고 고통이 있고 멸시가 있는데 어떻게 지겠는가?

그러나 여러분이 살면서 느끼다시피, 진정한 가치라는 것은 보이는 승리가 아니다. 실력이 있어야 한다.

요즘 제 아내와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보이스 퀸이라는 프로다. 참가자격은 모든 주부이면 되고 나이 제한이 없다. 프로 가수가 아니면 된다. 그래서 많은 주부들이 신청을 하고 예선, 본선, 3라운드까지 왔다.

노래에 소질을 가지고 있었고 가수가 꿈이었는데 결혼해서 애를 기르는 바람에, 남편이 병에 걸리는 바람에, 먹고 사는 일이 너무 바빠서. 그러나 이번에는 자장면집 부인, 남해에서 생선 양식업을 하는 부인도 참가했다.

1라운드가 제일 재미있었다. 그때는 소원이 단순했다. 노래를 해보고 싶었는데 현실에서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나이도 들었고 애도 좀 자랐고 남편이 많이 아프기도 하다. 그 남편이 당신 하고 싶은 것도 한번 해보라 해서 나왔다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여태껏 참았던 한풀이를 한다. 심사 위원들도 잘 하고 있다. 멋 부리지 말고 당신 노래를 불러라.

그런데 본선에 오니까 아무래도 이기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잘 하지만 처음과 같은 감동은 없다. 그래도 굉장하다. 해보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니까.

어떤 주부가 말했다.

이제 나이 들어 보니까, 우리 어머니가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구나, 나는 우리 엄마보다 내 자식들에게 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마음으로 노래를 하고 자기 생애를 돌아본다.

저희가 보면서 공감하는 것은 인생이 힘들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 한을 멋지게 풀어낸다는 것에 대해서, 열심히 공감한다.

(3) 그러나 이것을 한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한계이다. 우리는 과거를 뒤집을 마음이 없다. 그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로서는 만들 수 없는 자리에 우리를 데리고 오셨다는 것에, 우리는 감사하고 항복한다.

우리를 이렇게 목적하고 계신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기독교 신앙의 목표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것을 요구하신다.

이걸 만드는 과정과 내용은 성육신이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다. 우리가 아는 많은 기적이 있다. 문둥병자를 낫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고 5천명을 먹이고,

이런 분이 폭력 앞에 순순히 당신을 내어준 그 길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길이 묶어질 수도 없고 타협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이 들어가면서 이제는 여러분도 느낀다.
인간의 가치는 보이는 것에 있지 않다.

나이 60이 넘으면 증명사진을 아무 친구 사진이나 갖다 내도 된다.

제 외할아버지는 제가 어렸을 때 제가 살던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할아버지를 뵈면 깜짝 놀라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왜 여기 계시지?” 그 정도로 닮으셨다.

제 아버님에 대해서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놀랐다.
“아니 박정희 대통령이 왜 여기 계시지?”

희안한 일이었다. 우리 집은 좀 족보가 있는 집안이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알고 보니까, 이 얼굴들이 제일 흔한 얼굴이었다.
대통령을 했으니까 특별해 보이는 것이지, 그 얼굴은 지금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의 얼굴이다. 가장 흔한 얼굴이다. 모든 대통령의 얼굴은 우리 중의 한 얼굴이다. 그리고 그건 다 없어진다.

독특해지고 싶고 개인으로서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다 뭉글어지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넣은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새로운 개성을 만드셨다.

우리 각각을 구약에 나오는 한 선지자와도 같고,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과도 같게, 이런 식으로 우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예수님은 오셔서 그 중 모범적인 생애를 보이셨다.

모범을 따르라, 가 아니다. 진리란 무엇인가? 생명이 무엇인가? 영광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본을 보이셨다.

우리 모두가 살면서 세상이 거짓되다는 것을 우리 눈으로 우리 몸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가지는 힘을 알게 된다.

그래, 이거야.

당시의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보면,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폭력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지 스스로가 모르고 있다.

(4) 철학과 신앙은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다.

철학은 객관적인 논리이고 신앙은 주관적인 고집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만나지 않으면 철학을 넘어 설 수가 없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의 내용과 가치와 지위와 운명을 우리의 잘못과 우리의 타협에 버려두지 않겠다는 선언이고 개입이다.

이것이 성탄절이다. 성육신인 것이다.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겁주러 오시지 않는다. 공포로 오시지 않는다.

(요13:34~35) 사랑이 공포를 이긴다. 사랑은 위대한 것이다. 사랑은 하는 자의 복이다. 사랑을 하면 복되고 사랑을 하면 행복하다. 사랑은 영광스럽다. 전에도 한 번 물었다.

여러분은 주는 자가 되고 싶은가? 받는 자가 되고 싶은가?
거의 다 주는 자가 되고 싶다고 한다. 물론 이런 전제가 있는 것이다. 가진 자가 되고 싶은 거다.

사랑을 받고 싶은가? 사랑을 주고 싶은가?
사랑은 받고 싶다고 가 많았다.

사랑을 받고 싶다는 것은 가난한 것이다. 이 가난한 것을 무엇이 부자로 만들 수 있을까? 예수가 모범을 보이셨다. 요한복음은 내내 이 얘기를 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하여 바울이 아주 대표적으로 극명한 얘기를 한다.

바울은 개종하기 전에는 사울이었고 바리새인이었고,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다. 스데반을 죽였고 이 일을 마땅히 여겼다.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들이려고 살기가 등등해서 가다가 예수를 만난다.

자신들이 반대하고 처형했던 예수가 부활해서 바울을 만났고 바울은 하나님의 종이 된다. 바울은 무엇을 했는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한다. 그가 메시아다. 그는 부활하셨다. 그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 새로운 인생, 새로운 지위, 새로운 소망을 주었다.

로마서를 쓸 때 바울은 말한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를 믿지 않는가? 지식이 없이 자기 열심에 묶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정보가 아니다. 진리를 몰랐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몰랐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왜 그 아들을 보냈는지 그때는 몰랐다. 하나님의 자기 설명은 우리가 아는 것 같이 법적이고 무섭고 심판하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다리고 용서하고 복을 주는 하나님이시며 그렇게 자기를 증명했고 우리를 찾아오셨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고 아버지가 이런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우리 인생에서 겁낼 것이 없다고 증언하는 것이 성경이다.

죽은 다음을 위한 보험으로만 신앙에 들어 있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 두 세상의 갈등 속에서 세상에 자연스럽게 붙들려 가는 인생으로 대강 체념하고 사는 것으로는 신앙 인생이 행복할 수 없다.

예수를 믿으면 형통하지 않다. 사랑은 대단히 고통스럽다. 모든 뽕짝은 거의 주제가 사랑이다. 그런데 그 사랑이 너무 즐겁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별이다.

최근에 나온 트로트 가요 안동역에서가 있다.

왜 안 오나? 못 오나? 다 배신을 하는 거다. 가슴이 아리다. 그러나 이 가슴 아린 것을 전부 하나님이 안고 우리의 진정한 행복과 승리를 위하여, 포기하지 않고 돌아서지 않고 붙잡고 안 놓고 있다.

다. 결어

(1) 네가 너 자신에 대해서 절망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다. 이것이 기독교다. 우리는 여기를 못 쫓아간다. 이것은 의지력의 싸움이 아니다. 명분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

내 이름으로 여기 있는 소자에게 물 한 그릇 준 거, 내가 기억하겠다. 네가 그런 사람이 되라. 그렇게 행동해라. 그런 반응의 주인이 되라. 이것이 살과 피이다.

말만 떠들고 행동이 없다. 이런 차원 보다 더 나아가서 네 자신이 속에서부터 내 살과 내 피로 새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 존재를 승리로 영광으로 끌고 가라.

해라. 오래 걸릴 것이다. 내가 기다리겠다. 여기까지 와라.

(2) 저는 성탄절을 72년간 겪었다. 성탄절은 해마다 다르다. 옛날에는 산타클로스가 오기를 기다렸고 지금은 위대해진 인생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한 해를,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에 기쁨으로 맞을 수 있도록 헛되지 않은 인생을 살겠다, 는 다짐을 하게 된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위대한 인생을 사셔서 여러분이 하는 일에 누가 은혜를 받는지. 누가 함께 눈물을 흘리고 위로를 받는지 스스로 확인하는 인생을 살기 바란다.

3. 에필로그

(1) 앞에서의 계속이다. 과연 어떤 목회자가 강대상에서 교인들에게 설교시간에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좋게 보면 소신이 뚜렷한 것이고 나쁘게 보면 예의가 부족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15년이 지났다. 요즈음 박목사님은 어떠신가? 이상하리만치 팩하는 성격이 없어지셨다. 그것도 잠깐만 그렇지 않다. 1년 내 언제 뵈어도 그렇다.

설교시간에 가끔 그러신다. 나는 스스로가 위대해져 간다는 것을 느낀다. 어떻게 들으면 교만하게 들릴 수 있지 않은가? 아니다. 진짜로 그렇게 되어 가신다.

(2) 참으로 감사하다. 우리는 말씀만 잘 전달하는 목회자를 모시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 말씀대로 살아 보려고 무진 애를 쓰는 목회자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목회자가 점점 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 보고 있다. 그것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말이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