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11) (요6:26~40)

2019. 11. 24. (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한 10년 전쯤 되었을까, 목사님께서는 광화문에 있는 새문안교회에서 4일 동안 사경회를 하신 적이 있다. 우리 교회와는 교단도 다르고 여러 가지가 달랐지만 당시 새문안교회 담임목사님이시던 이수영 목사님과 박 목사님은 연락도 하고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2) 나는 정말 운이 좋게 이 4일의 사경회에 전부 참석할 수 있었다. 당시 새문안교회의 성도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첫째는 지금껏 들어 보지 못했던 설교를 들었다는 것, 둘째는 은혜로운 설교를 하시는 박 목사님께서 종종 거친 말을 하신다는 것 등이었다.

남포교회 교인들은 박 목사님의 거친 말 (굉장히 젊잖게 표현한 단어이다.)에 비교적 익숙해 왔다. 그러나 처음 듣는 교인들은 놀랐을 것이 분명하다. 요즈음 많이 좋아지셨다. 어느 쪽이 좋은 걸까?

(3) 한번은 어떤 식사 모임에서 박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설교자가 아니야. 나는 여러분과 같은 조건 같은 세상에서 있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으로 나는 여러분에게 설교하는 거야.

성육신을 설명하신 것이라고 말하면 과장일까? 아니다. 성육신은 이렇게 같은 조건 같은 세상에서 이루어 내는 것이 마땅하다.

2. 내용

가. 서론

(1) 요한복음은 우리가 기대하고 습관이 되어 있는 복음서의 기록과 다르게 그 내용을 펼치고 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가 하나님이시며 구원을 위해 오셔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우리를 격려하셨는가를 기록했다면 요한복음에 나오는 기적들은 그 기적이 시비에 걸릴만한 것이 전혀 없는, 은혜로운, 말하자면 병자가 낫고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보리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시고 12 광주리가 남은, 배고픈 사람들을 모두 배부르게 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에 부작용이 일어난다.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이 예수를 비난하고 그를 압박한다. 그래서 예수를 거부하는 자들의 날 선 반대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태도와 깊이를 보여 주는 것이 대조되고 있다.

(2) 사마리아 여인의 사건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은 절대로 권력을 동원하시거나 공포로 이기지 않고, 상대방의 억지 주장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이시는 그 태도, 그 깊이를 드러내는 일로 우리를 깨우친다.

오늘 내용도 본문 앞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이 일어나자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임금으로 모시려고 한다. 본문 26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라고 하셨다.

이 기적이 너희가 이해하고 기대하고 알고 있는 세계를 열어 놓는 어떤 증거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계와 절망을 넘어서 오는 길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너희들의 수단, 너희들이 가지는 소원과 기대를 충족시킬 방편으로만 나를 찾고 있다, 라고 꾸짖으신다.

나. 본론

(1) 2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라고 하신다. 너희의 신앙생활이 사소한 필요를 채우는데 쓰이지 않고 너희의 가치와 운명을 위한 부요한 소원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자 금방 질문이 나온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28절)

이 표현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바꾸어 보겠다.

무엇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은 답하신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 신앙이다.
즉, 예수를 믿는 것이 진정한 답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게 왜 그리 어려울까?

예수가 우리가 기대하는 쪽에 답을 하나도 안 주시기 때문이다. 형통한 것을 주시지 않고 권력을 주시지 않는다. 여기가 다 걸려 넘어지는 곳이다.

예수의 생애는 우리가 알다시피, 결국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하여 왔는데 그의 생애가 믿지 않는 자들을 감동시키거나 설득시킨 결과가 하나도 없다. 그는 결국 잡혀 죽고 만다. 잡혀 죽는 이유도 깊이 따져보면 그가 이런 위대한 기적들, 죽은 자를 살리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이루어 내는 능력을 가졌으면 우리에게 형통한 인생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그가 죽는 바람에 왜 아무것도 못 할 것이면서 남의 마음만 휘저어 놓았느냐, 라는 것에 대한 분풀이를 예수에게 한 것이다.

빌라도가, 유월절에는 한 명씩 사면해 주는 제도가 있으니 이 사람을 놓아주자고 할 때, 바라바를 놓아 주고 이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라고 했다.

굉장한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예수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이 시대 사람들이 못나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믿는 사람에게 평생 쫓아다니는 의문이다.

하나님 내가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이만하면 만점짜리는 안 되도 한 50점은 주셔야 될 것 아닙니까?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신앙 현실 속에서 늘 묻는 것이다. 괜히 일찍 믿어서 고생만 했다. 남는 거라곤 성가대 한 거 하나밖에 없다. 이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그러면 당신을 믿어야 한다는 표적은 무엇입니까?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 건 모세가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었다. 지금도 그때와 똑같이 하나님이 나를 생명의 떡으로 너희에게 주었다. 그러니 나를 받아먹어라,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5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도다. (36절)

못 믿는다. 안 믿는 것이다. 그가 생명의 떡이고, 결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하실 분인데, 왜 우리는 예수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인간의 진정한 갈증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양심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어디다 쓰고 싶은 것인가? 우리가 아는 일에 안전과 형통으로 쓰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장애물이다. 이걸 넘어서야 하는데, 어떻게 넘어서는가? 평생 시달려서 넘어선다. 우리는 안전을 원하고 형통을 원하고, 그래서 실망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체념하고를 반복하는 중에 나이가 들어서 죽음을 피할 수밖에 없다, 라는 자리까지 오면 생애를 돌아보게 된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내가 좀 더 잘 살걸.
무엇을 더 잘살아야 한다는 뜻일까?
공부 좀 덜할 것을, 공부 잘해서 지금 이게 뭐야?

세상에 대해서 실망을 하게 되고, 세상이 주는 보상으로는 너무나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러니 나이가 꼭 들어야 한다. 못해봐서 아쉬운 것이 없는, 해 봤지만, 그것이 약간의 유익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영생이 될 수는 없는, 다시 말하면 인간이란 세상이 약속하는 것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더 깊은 존재이며 더 영광된 운명을 소원해야 마땅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구원하러 오셨다. 무엇을 구원하는가? 값없고 하찮은 것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

너희는 짐승이 아니야.
너희는 기계가 아니야.
너희는 소모품이 아니야.
너희는 내 자녀야, 내 자식이야. 이렇게 살지마.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소원하는 것, 그것은 다 권력이다.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무슨 자존심인가? 지지 않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자존심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자녀 등이다.

인류 역사 내내 인문학이 추구해온 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위해 아무리 파고 뒤져도 근거가 나오지 않는다. 인간의 정체성과 가치는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하나님이 없으면 인간은 근거가 없다. 하나님이라는 근거 없이 인간의 정체성을 밝히려고 했던 사람들은, 명분과 추상명사로 자신을 대체한다.

행복, 유능, 보람, 이런 말이 인격을 대신한다. 내가 행복해야 하는데,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하다고 믿는 것으로 자신을 만족시키는 기만을 하게 된다. 옳은 소리를 하는데 그 사람이 위대하지 않다. 사람을 만나서 우리가 제일 놀라는 것은, 말은 잘하는데 만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무엇이 다른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만나면 좋다는 것이다. 신앙이 좋다는 것을 잘못 생각하면 정답을 나열하는 자가 된다. 이러면 인간성에 손해가 되는 것을 종종 본다.

너 요새 기도 안 하더라. 이 말 하지 말고 자신이 두 배로 기도해야 한다. 누가 기도 안 하는 게 보이면 내가 해야 한다.

우리나라 걱정은, 우리의 책임은, 기도하는 거다. 기도한다고 고함을 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세상에서는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들이고 우리들은 대화가 안 되는 자들이다. 예수님이 딱 그 자리에 서 있다.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성경은 내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또한 인류의 모든 역사들이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다. 무엇을 증거하는 것인가?

인간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가를 묻고 꾸짖고 격려하는 것이다.

우리가 구약을 읽으면 항상 그런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이렇게 못나게 굴었을까? 왜 순종을 못하지? 왜 이래서 벌을 받는 거야. 사실은 우리도 같은 것 아닌가? 그럼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인가? 예수님 같아야 된다. 예수님은 어떠셨는가? 하나님이 그를 외면하고 거부하고 못난 자리로 도망간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우리의 옷을 입고 우리의 자리에 찾아 오셔서 싸우지 않고 말씀하신다.

얘들아, 네가 하는 일이 행복하냐?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너희가 믿는다고 말하는 하나님이 보내서 온 사람이다.
왜,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어요?
나는 너희를 겁주러 오지 않았다.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러 왔단다.
무슨 그 꼴로 와서 구원을 논하세요?
왜 빌라도에게 잡히세요?
이런 건 문제가 아니란다. 이런 건 중요한 내용이 아니다. 인간은 폭력이나 분노나 원망 같은 것을 입에 올릴 필요가 없는 존재란다. 권력이나 자랑은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를 주지 않는다.

무엇이 진정한 가치인가요? 사랑하는 거다.
에이 그거 뭔가요?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 못난 자리에 있는 것을 대접하는 것. 적대적이고 폭력을 쓰는 것까지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용납하신다. 왜? 기다리시는 거다.

하늘로서 내려온 만나는 신명기 8장에 의하면, 지난 40년간 너희가 만나를 먹었다. 내가 너희에게 만나를 준 것은 너희를 낮추고 너희를 시험하여 너희 마음을 노출 시키려고 한 것이다. 너희는 만나를 먹고 가나안까지 가기 위해서, 가나안까지 가라고 만나를 주었는데 너희는 가나안까지 가지 못했다. 만나가 떨어져서 너희가 굶어 죽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아직 충분히 있으나 너희가 가지 않아서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이것이 만나 사건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떡을 너희에게 가득 채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에게 목적한 자리, 하나님 자녀의 영광의 자리에 가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내가 왔다. 떡을 주는 것으로 안 되어서 내가 왔다. 내가 너희에게 생명의 떡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입구에까지 갔다가 백성들의 거부로 인하여 가나안 입국이 실패되고 그들과 방랑 생활 40년을 하게 되었는데 잘 버티던 모세가 마지막에 실패한다.

마지막 무리바 사건에서 물이 없다고 원망을 하고 물을 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할 때 모세는 그만 반석을 후려친다. (시106) 망령되이 행했다. 모세가 심한 욕을 한 것이다. 그럼 반석은 왜 쳤는가?

성질이 나면 차렷 자세로 하는 사람은 없다 흔들 수 있는 것은 다 흔든다. 마침 손에 막대기가 있었고 그것으로 바위를 후려쳤다.

하나님이 딱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

야, 모세야 왜 내 자식들한테 그러는 거냐?
얘네들이 내 자식이야. 너는 내 종이고 얘네들이 잘못했지만 네가 감히 내 자식들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복음서가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보고 감동하라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도 그때는 몰랐다. 예수님이 잡히시자 다 도망갔다. 이것 아니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로 영안이 열리고 이제 그를 알아보게 되자 그의 생애를 역 추적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생애는 과연 무엇인가?

(마28:19~20)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역사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매 세기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출생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하나님은 구원 사역을 우리와 함께한다. 마치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 같이 우리를 보낸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는가?

무지한 자들, 하나님을 수단으로 밖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 세상의 권력이 전부라고 믿는 자들 앞에서 우리를 살라고 하신다. 이것이 믿고 난 후의 현실인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에 걸었던 길, 그리고 거기서 증언해 놓았던 것을 통해,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눈을 뜨게 된 모든 신자들이, 자기 생애를 이해하고, 그 현실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하나님은 여기까지 자기를 낮추실 수 있었구나.

세상은 절대 지지 않으려고 했구나. 세상은 이기려고만 했구나. 그래서 폭력을 쓰고 권위를 세우기 위해 폭력을 썼구나.

세상에서 가장 모순되는 일은, 진리도 폭력에 사용된다는 것이다. 진리와 사랑은 같이 가지 못한다. 진리를 알면 사랑도 할 것 같은데, 진리를 알면 대적들을 공격하는 데 쓰게 된다.

나는 알고 넌 몰라. 너는 무식한 놈이야. 넌 틀렸어.

사랑은 다투지 않는다. 사랑은 정죄하지 않는다.
사랑은 내어준다. 사랑은 진다.

이렇게 진리와 사랑은 같이 갈 수 없다.

예수님만 이렇게 되어 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내가 사랑이다.

진리와 사랑이 싸울 이유가 없는 이 자리, 서로 양보해서가 아니다. 진리가 사랑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이 길로 우리를 부르시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이 현실을 살기를 싫어한다. 이것이 위대하다는 것을 모른다.

(요5:40~44)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도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여러분의 영광은 무엇인가? 힘 아닌가?
성공이고 계급이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영광과는 무섭게 구별된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은 오셔서, 우리가 잘못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얘야,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건 헛된 것이다.
다정하게 말씀하신다. 기다려주신다.

방해가 되니 비켜주시오, 비켜주신다. 밟고 지나가게 하신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수 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세상이 말하는 신은 폭력이고 기독교가 말하는 신은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복되게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유보하실 수 있는 분이다.

김형석 교수의 글이다.

당신이 숭실중학교를 다닐 때 일제하에서 미션스쿨인 숭실중학교에게 신사참배를 요구했다. 학교에서 거절하자 폐교되었다. 학생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몇 달 지나자 학교에서 편지가 왔다. 학교가 문을 열었으니 다시 공부하러 와라. 어떻게 허락을 받았을까 궁금했는데 학교는 신사참배를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월요일이 되어서 전교생이 모여서 열을 지어 신사참배를 했다. 선생님들은 횡대로 서서 아이들이 가는 것을 보시고 있었고 교장 선생님이 맨 앞에 서 계셨다. 지나가면서 교장 선생님을 보니까 울고 계셨다.

다. 결어

(1) 그 마음을 알 수 있는가? 자기 하나 신앙 지킨다고 고집부려서 죽어 영웅이 되는 것이 현실이 아니다. 부모 노릇을 하거나 학교의 어른 노릇을 하려고 해도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실 수 있다. 질 수 있고 죽으실 수 있다. 여기에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참뜻이 있다. 예수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이름이다. 우리에게 그 인생을 살라고 하신다. 그것은 다른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위대하고 영광된 길이라고 한다. 그것이 사람 사는 맛을 나게 하고, 만족과 찬송을 준다고 약속한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이 위대한 길에 서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3. 에필로그

(1) 주일 설교가 끝나고 목사님께서는 방으로 가시지 않고 강대상 근처에 계셨다. 성가대 찬양을 다 듣고 뒤를 돌아보니 목사님이 계셨다. 반가웠다. 반갑기는 하지만 가까이서 뵙는 목사님은 너무 늙으셨다. 아직도 강대상에서 설교하실 때에는 힘이 넘치시지만 내려오시면 노인의 모습을 감출 수는 없다.

(2) 반가워서, 한 말씀을 드렸다. 김형석 교수님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말씀을 주셨어요. 나는 이번 설교에서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그 교장 선생님처럼 울고 계신다는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다. 은혜를 받았다는 뜻으로 말씀을 드렸는데, 뜻밖에 한 말씀을 들었다.

잘난 척하는 일에 왕자야.

김형석 교수를 잘 모르고 있지 않느냐, 하는 말씀이셨을 것이다.

김형석 교수는 인문학자라고 봐야지.

(3) 맞는 말씀이다. 전에 김 교수님의 책 한두 권을 읽고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편견은 바로 무식이다. 더 열린 마음으로 사람을, 사물을 대해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