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10) (요5:30~47)

2019. 11. 10. (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유진 피터슨 목사님께서는 작년 10월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Let’s go, 였다고 해서 더욱 목사님의 별세가 마음 아팠었다. 어디로 가자는 말씀이었을까?

물어본 내가 바보다. 천국 문이 보이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다 함께 가야 할 곳은 여기가 분명하니, 남아 있는 우리를 그렇게 격려하고 이끌어 주신 것이다.

(2)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물론 메시지 성경으로 유명하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졌다. 그러나 내가 목사님을 가까이하게 된 것은 박 목사님 덕분이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여러 책이 한국에서도 출간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작년에 박 목사님께 추천받은 ‘물총새에 불이 붙듯’ (As Kingfishers catch fire) 이라는 책이 단연 으뜸이다.

(3) 사족이 될까 봐 그 책에서 한 문단만 소개한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것이 무엇인지 진단하십니다. 정확하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이해하시고 우리 삶에 스며든 특정한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진단하신 다음, 권위와 자비로 우리를 거기에서 구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 삶에서 잠든 부분들을 깨워 영원한 생명의 찬란함과 기쁨을 보게 해 줍니다. 이러한 깨어남은 고통이나 어려움이나 씨름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깨어 있는 것은 자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자는 사람들은 고통받지 않습니다.”

2. 내용

가. 서론

(1) 요한복음에서 그려지는 예수님의 생애는 매우 독특하다. 다른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독특한 신분, 권능을 주로 초점으로 삼는데 반 해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런 기적을 행하신 후에, 적대자들의 위협 속에 서 계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하시는 이러한 어려운 장면들은 세상이 예수님에 대해서 가지는 무지, 혹은 턱없는 적개심과 달리 온유하시다. 비난하거나 심판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지금 보는 본문만 해도 38년 된 병자를 고치게 되자 겪게 되는 비난의 와중에 있다.

상대방들은 고칠 수 없는 병을 고쳐낸 분의 어떤 정체와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며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 이렇게 물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묻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처치하려고 든다. 앞으로도 계속 더 그러할 것이다.

(2) 그러나 그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리 화를 내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이 못알아 들을 것을 알고 있고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

(34절)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그들이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너희들의 공감과 지원으로 내 사역이 힘을 얻고 결과를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와 있는 것은 이런 무지와 이런 오해 속에서도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내가 와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것이 내 일이다.

(41절)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그가 얼마나 위대한가, 또는 중요한 신분인가, 하는 것들을, 세상 속의 여론이나 얼마나 많은 지지자들이 있는가에 맡기지도 않는다.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럼 무엇을 하시는 것인가?

나. 본론

(1) 그는 결국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 십자가를 져야 우리 죄가 속해지고, 영혼이 부활하고 예수님이 누구셨는지를 알게 되고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면 십자가 이전의 긴 시간은 무엇인가? 십자가는 이해한 것 같은데, 성육신 즉, 십자가를 지기까지 간난 아기로 태어나시고, 자라나시고, 30년 동안 평범한 한 인간으로 사시고, 마지막 3년 반을 공생애를 사시고, 그리고 결국은 적대자들의 폭력 아래 죽고 만다.

오해되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는 이 예수님의 생애에서, 앞부분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뒷부분인 십자가만 있어도 될 것 같은데, 그 긴 시간의 성육신과 걸으신 공생애는 무엇인가?

요한복음은 이것을 우리에게 깨우치게 하려고 하며 이해시키려고 한다.

(요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의 성육신의 목적을 말하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 왔다고 해도 아들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예수를 믿지 못했다는 것은, 저들은 하나님의 하나님 된 표적이 권력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전혀 권력을 취하지 않으신다.

요한복음 내내 상대방은 폭력을 쓰지만 예수님은 폭력을 쓰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들을 감동시킬 마음도 없으셨다. 설득할 마음도 없으셨다. 그냥 해 놓으셨다. 왜 그럴까?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야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세상은 그때 이것을 알지 못했다. 그의 모습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어서 구원을 얻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었고,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왔으나 우리는 그것을 영광으로 알지 못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으나, 그게 무엇인지를 몰랐었다. 구원을 얻은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보통 시간 순서상, 앞이 원인이고 뒤가 결과이어야 하는데, 거꾸로 구원을 받아야 과거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겪은, 성육신의 과정에서 하신 증언들이, 십자가를 거쳐야, 그가 구원자였구나, 그가 하나님이셨구나를 알게 된다.

예수님이 적대행위 속에서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적대행위 속에서 찾아 왔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바로 천국으로 가지 않고, 적대행위가 아직 권세를 부리는 세상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구원은, 죽으면 바로 천국으로 가든가,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예수를 증언하는 사명을 수행하고, 그리고 그 일을 할 때에는 하나님이 천군 천사로 보호하고, 우리말을 듣지 않으면 죽고, 우리말을 들으면 살아나고, 하는 식으로 이해하는 구원이다.

살아보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지금도, 이번 주에 수능인데 모두가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그저 우리 아들만 하나 붙여 주시면, 제가 다른 것은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 쫄아 들고 체념했다.

무슨 형통, 기쁨, 기적, 이런 것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이거 하나니까 이쯤은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다가 또 안 되면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든다. 그거 봐.

왜 그런가? 우리 인생 속에 시원한 일이 일어난 사람이 몇 명 없다. 어떻게 아는 것인가? 여러분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얼굴로 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루어진 게 없다는 것이다.

예수 믿어서 덕을 본 것이 없다. 그런 데다가 따뜻한 설교를 하는 것도 아니다. 밤낮 시비만 건다. 여기가 우리가 완전히 놓치고 있는 곳이다. 성경을 읽지만 다르게 읽는 거다. 우리의 모든 소원을 말해도 되는 방법인 것 같이, 조건인 것 같이 이해를 한다.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2) 예수님이 지고 상대가 이긴 것 같고, 결국은 예수를 십자가로 데려간다. 그러나 잘 보라. 세상은 결국 비난을 하거나, 보복을 하거나, 죽이거나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은 그 이상의 실력이 없다. 내용도 없다.

나는 다르다. 나는 하늘에서 온 자다. 나는 아버지의 뜻으로 왔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러 왔다. 내가 너희를 진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왔다. 너희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하게 주려고 왔다.

죽어야 결론이 난다고 했다. 그러면 죽기 전에 했던 이런 얘기는 왜 그렇게 중요한가?

(고전1:18~24)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다 알 것 같지 않은가? 여기에는 중요하게 놓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쓰기로 하셨다. 전도의 미련한 방법이란 세상 지혜와 대비되는 것이다. 세상 지혜는 논리성, 치성, 주문, 같은 방법론들이다.

여기서 전도는 왜 세상 지혜와 대비가 되는가?

구원은 설득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로 증거를 전달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세상 사람과 똑같은 조건 속에서, 즉 소원은 많으나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세상 사람들이 분노밖에 할 수 없는 그 형편에 똑같이 들어가서, 우리는 다르게 반응을 하는 것이 전도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무슨 방법론으로 소원을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답이 없는 인생을 예수를 믿는다는 이름 때문에 다르게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러셨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를 가지고 와서, 저 세상의 폭력에 대하여 더 큰 권력으로 그들을 짓밟아 이기지 않고, 그것을 다 뒤집어쓰고 감수하는 방법으로 서 있었다. 마지막에 백부장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과연 하나님이시다.

십자가에서 죽고 마는 사람을 왜 하나님이라고 했을까?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내가 다 이루었다.
백부장이 알고 있는 세계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공포이다. 공포와 절망밖에 없다. 여기 다른 사람이 있다. 죽음을 감수하는, 죽음으로도 다 덮어씌울 수 없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배우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은 여전히 폭력밖에 행할 것이 없는데 우리만이 그 속에서 사망과 비난과 거짓말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보고 이 인생을 살아내라고 한다. 왜 그런가?

하늘과 땅의 권세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이러한 전도의 소명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지신 이가 우리를 사지로 보내고, 믿지 않는 자들 속에 보내서 우리는 진리와 생명을 전하는데, 저들은 우리에게 분노와 폭력과 사망만을 보여준다. 이러한 하나님의 방식을 살라고 하시는 것이다.

전도는 방법론이 아니다. 여러분이 동창들을 만나면 누가 제일 많이 전도하는가? 고등학교 때 제일 악질로 놀았던 친구가 한다. 그 친구가 예수 믿는 게 최고의 전도다. 그가 옛날에 악질이었어야 하고 지금은 달라져 있어야 한다. 이것은 도덕적 감화가 아니다.

네가 예수를 믿어? 네가? 정말?
그래.
너는 술 안 먹어?
먹지.
그게 뭐야?
그래도 돼.
예수 믿는데 술은 왜 먹냐?
술이 문제가 아니고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돼.

이렇게 말한다. 이건 분명히 다른 거다.

이 세상의 모든 공포에 대하여 우리만이 대담하게 서 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내내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이다. 여러분의 불평이 무엇인가?

한가지만이라도 덜어주세요,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이것까지도요? 또요?
설상가상, 점입가경.

예수를 일찍 믿은 것이 손해인 것 같은 인생이 계속된다.
파도 뒤에 또 파도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위대해지라고 하신다.
작은 거 했으면 더 더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신다.

공생애 중 이런 사건들이 다시 이해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니라.

혈육이 알 수는 없다. 메시아가, 구세주가 이렇게 초라하게 살리는 없기 때문이다. 권력도 없고, 속 시원한 보복도 할 수 없는 처지이고, 떠돌이 인생 같은, 지금으로 얘기하면 노숙자처럼 살고 있는 예수를,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알게 했구나.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굉장하지 않은가?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아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다. 우리가 이제 그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나는 이제 죽어야 된다, 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여기서 뒤집어진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단코 주께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탄아,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도다.

이 모든 공생애가 나의 이 모든 수고가, 십자가로 너희를 돌려놓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너희가 다만 죄를 면죄 받고, 누추한데 살다가 복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정도가 구원이 아니다. 너희로 하여금 땅끝까지의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일, 즉, 이 세상과 인류의 역사를 구원해 내는 하나님의 구속과 통치에 너희를 동역자로 부르는 거란다.

내가 이렇게 온 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이것은 나의 영광이며 아버지의 영광이고, 너희의 존재와 인생에도 영광이다.

(3) 성경이 말하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새 사람을 입으라, 라는 요구는 우리에게 도덕성을 제시하는 정도가 아니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우리의 조건, 우리의 존재, 우리의 인생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영광된 일에 부름을 받고 있는가?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어 인류를 구원하신 것처럼, 그 인류의 구원이 나를 통하여 이 역사의 끝까지 가고, 하나님의 일들이 나를 통하여 나를 만나는 자들에게 결실한다고 약속하신, 그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도 힘들어하셨다.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라는 고백까지 나온다. (마26:38)

그러나 주께서 그 길을 가는 것은 그 길이 최고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사역을 아버지의 영광이라고 얘기하고, 자신이 영광을 받는 일이라고 십자가를 소개한다.

그렇게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신앙과 자신의 인생을 고백해야 마땅하다. 모든 것이 시원하고 모든 것이 보상을 받는 인생을 가는 것이 아니다.

(골1:24~29) 바울의 위대함은 역사적으로 종종 그의 업적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바울의 위대함은 그가 자신의 사역을 고난 속에서 하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고난 속에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부터 알았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아나니야라는 선지자가 와서 그에게 안수하고 눈을 뜨게 했을 때 그에게 준 예수님의 약속은 이것이었다.

너는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많이 받아야 할 것이다.

바울의 생애는 그 앞 부분이 형통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둘 때 까지가 형통했고 그 이후로는 지난한 인생을 살았다. (고후11:23~27)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다.
왜 이러한 고난들이 허락되는가? 고난은 무엇인가?
믿지 않는 자들의 도전을 받는 것이다.

다. 결어

(1) (롬11:30~36)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데 가두어 두었다. 우리의 도전을 기꺼이 받으신다. 왜 이렇게 하셨어요? 이건 왜 안해 주셨어요? 이게 뭐예요?

예수님이 공생애 내내 이걸 받고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얻은 우리는 우리가 예수의 공생애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 속에 우리가 들어간다. 그들이 우리를 비난한다. 빈정거린다. 조롱한다. 하나님이 이 도전을 받게 함으로써 우리를 키우고, 그가 아들이 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이라는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성숙하고 우리를 만나는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들이 생겨난다.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이다.

(2) 왜 심판이 지체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불구덩이에서 건져서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도전하시고 시험하시고, 우리로 울고 고민하고 고함지르게 하신다.

그 모든 것 속에 성육신의 비밀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어떤 기대와 목적이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여러분의 고백이 가지는, 이 깊고 중하고 놀라운 실력을 키우는, 여러분의 생애, 여러분의 고백, 하나님의 기적이 있기를 바란다.

3. 에필로그

부우웅 ~~ (휴대폰의 진동 소리이다.)

나: 아이구 목사님 어쩐 일이세요? 그렇지 않아도 유진 피터슨 목사님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어요.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작년 10월에 돌아가셨다.)

목사님: 지난주에 했던 요한복음 (10) 정리됐어?

나: 아니요. 주일 설교를 보통은 화요일에 인터넷에 올리는데 이번 주는 오늘(수) 올라와서 지금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응 고마워, 잘 듣고 있어?

나: 네. 무지하게 재미있습니다. 다음번엔 무슨 내용을 하실까 하는 것이 기다려집니다.
목사님: 이 집사가 재미있다고 하면 재미있는 거야.

나: 목사님, 다음 설교를 라이파이 만화 나오기를 기다리듯이 기다리고 있어요. 라이파이와 제비양을 아세요?

목사님: 아, 그럼. 알지. 그거 저자가 산호야.

나: 아니, 목사님께서도 아시는구나.

목사님: 그리고 라이파이 때부터 만화책이Ⅰ부와 Ⅱ부로 나누어지기 시작했어.

나: 별걸 다 기억하시네요. 그러고 보니 그랬던 생각이 납니다. 바로 정리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목사님: 응 고마워.

(정리자 주: 라이파이는 1959년부터 발간된 공상과학 만화 시리즈의 주인공이며 제비양은 그의 파트너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