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요한복음(7) (요4:1~26)

2019. 9. 29.(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지난주에 교단 총회에 다녀 왔어.
이번 총회는 저녁 식사 시간 후 음악 프로그램을 준비했더군.
그런데 주최 측에서 나에게 음악 프로그램에 대한 총평을 해 달라는 거야.
내가 무슨 말 하라고 시키면 잘 하잖아. 그런데 이건 좀 생각하게 되더라고.
음악 프로그램의 총평이라, 무슨 말을 할까?
순서가 잘 끝났어. 내가 나갔지.

“오늘 저녁 우리는 우리가 짐승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짐승이라면 이런 좋은 음악을 즐길 수가 없을 테니까요.

우리에겐 시편이 있습니다. 시편은 아름다운 음악이자 시인의 탄식, 분노, 그리고 찬양이 혼재되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을 통해 진지함과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저녁 이 훌륭한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하나님께서 빚으신 진지함과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보았고 그것을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저녁에 내가 아직도 짐승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렇게 끝을 냈어.

(2) 이상은 목사님께서 지난주 나에게 전화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이런 멋진 얘기를 나 혼자 알고 있으면, 나는 소인배다.

2. 내용

가. 서론

(1)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서 갈릴리로 돌아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를 지나게 되었다.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 땅은 남쪽이고 갈릴리는 북쪽 지방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나 황해도 정도의 위치가 사마리아 땅이었다.

사마리아는 여로보암 때부터 북 왕국 이스라엘로 분리되어 나라를 이루고 살다가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한다.

사마리아는 특히 북 왕국의 수도가 있는 지역이었는데, 우리로 말하면 경기도 지방을 얘기하는 것과 같다.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민족적 우월성이 너무 강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살게 하여 혼혈을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남 왕조 유다에서는, 북 왕조에 대해 민족의 순결성을 지키지 못했다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갈릴리로 갈 일이 있으면 우회해서 돌아갔다.

나. 본론

(1) 예수님은 여행길에 지치셔서 이 우물가에 앉게 된다. 6시에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온다. 유대인들의 시간은 새벽 6시부터 시작해서 1시가 아침 7시이다. 그러니 6시면 정오, 한낮이다.

한낮에 물을 길으러 왔다는 것은 이 사막 기후 속에서 남의 눈을 피해야 되는 그런 처지와 약자의 지위를 말하고 있다. 그 여인이 물을 길으러 오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을 건다.

진솔한 내용을 전하고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약간 과장된 표현을 하겠다.

Madam, please give me a favor.

이렇게 하자 그 여인은 예법에 맞지 않게 대단히 날카롭게 퉁명스럽게 반응한다.

당신은 유대인이잖소? 늘 잘난 척하고 우리를 사람 취급도 안 하더니 오늘은 웬 일이십니까?

내가 물을 너에게 달라고 했지만, 네가 나를 누군지 알았다면 펄쩍 뛰어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내게 네 소원을 말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네 소원도 들어주고 생수도 주었을 것이다.

아니 목마른데 자기 물 한 그릇도 못 떠먹는 주제에 무슨 생수를 주신다고요? 이 우물은 우리 조상 야곱이 판 거예요. 야곱이 이 우물을 파서 지난 2천 년 동안 후손들이 이 물로 먹고 살고 가축들을 길렀고 우리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당신이 야곱보다 더 낫단 말입니까?

이 물을 먹는 사람은 또 목마를 것이다. 그래서 또 물을 길으러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은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이 될 것이다.

여자는 다시 빈정댄다.

그러면 좋겠네요. 목마를 필요도 없고 물 뜨러 오지 않아도 되겠네요.

너는 이 대화에 전혀 진정성이 없구나. 네 남편을 데려와라.
남편 같은 거 없어요.

상황이 이해가 되는가? 성경을 읽으면 밤낮 아름답고 좋은 얘기만 나오지 않는다. 험악한 현실이 나온다.

예수님이 이 말을 잘 받아 내신다.

너 정직하구나, 너 남자 다섯이나 거쳤지? 그리고 지금 있는 남자도 남편이라고 말할 수 없지? 내가 너의 고통을 안다.

여자가 놀란다.

아이구, 선지자이셨군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려야 된다고 하는데 저희는 이 그리심산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는데 그게 잘못된 짓이었을까요?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살고 제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그 잘못 때문이었을까요?

여자는 바쁘게 핑계를 대고 변명을 한다.

여인아,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필요 없다.
하나님은 간절한 마음, 진실 된 마음을 원하신다. 이제 때가 왔다.

메시아가 오면 모든 일이 해결되고 구원이 온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 메시아니라.

여기서 본문이 뚝 끊어진다.

우리가 읽을 때, 이 여인이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것은 단순히 당시의 경칭이라는 것을 알고 읽어야 한다. 주라는 것은 원래 신앙적 차원에서 하나님께만 붙이는 호칭이지만, 지금 이 여인은 이 말을 예의나 신학적인 실력을 가지고 예수님께 붙인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인생의 고달픔을 이 대화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이 부분 번역을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39절에 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의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39절)

이 대로 읽으면, 내가 감추고 아무도 모를 비밀을 다 알더라구요, 글쎄. 그래서 다 믿었다가 된다.

신앙이 그렇게 출발하거나 그렇게 문을 열지는 않는다. 그래서 새겨볼 필요가 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나에게 말한 분을 만났다.
비밀을 다 들켰다. 이러면 점쟁이이거나 족집게 무당이다.

본문에서의 뜻은, 내 모든 고통,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 현실을 나와 공감하고 따뜻하게 들어주는 분을 만났다, 는 뜻이다.

이런 부분은 아무 곳에도 힌트가 없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의 힌트는 여기에서는 기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는 하나님이 어떤 초월적인 개입을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발언에도 그렇다.

초월적인 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종교적 확신과 증거를 주는 면도 있지만, 그것은 일종의 권력이 되고 폭력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큰일을 할 수 있는 나한테 저항하지 마라, 외면하지 마라, 등으로 보일 수 있다.

예수님은 이 사건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앞에서 보았던 것 같은 이적을 한 번도 베푸시지 않고 단순하고 밋밋한 대화가 진행되다가 결론은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라고 끝난다.

내 편을 드는 사람이 있더라, 내 처지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더라.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께서 자기들과 함께 더 머물러 있기를 바랬다. (40절~42절)

이 말을 우리가 읽어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제자들보다도 더 나은 면이 있어 보인다. 제자들은 늘 따라 다니고 기적을 경험했지만, 여기서는 잠깐 일어난 대화 하나로, 마을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초청하고 이틀을 유하시게 했으며 그들이 믿었다. 이 표현은 굉장하다.

(2)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만 해결되는, 그런 구원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셔서 전도를 다니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피할 수 없는 시간과 경우를 겪은 후에야 십자가를 지신다. 이때는 제자들도 몰라볼 때이다.

(요7: 37~38)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때는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의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눈이 벗겨지고 새롭게 거듭나지 않으면, 그가 누구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십자가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아무 효과가 없는 십자가 이전의 삶은 왜 사셨는가? 우리는 예수 그러면 십자가부터 생각하지 그가 태어나시고, 30년을 사시고, 마지막 3년 반을 공생애를 사셨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의 이 33년, 즉 성육신하신 이 기간은 무엇을 하는 기간이었으며 왜 필요했던 것인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기 전에, 우리에게 베푸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를 보이신다.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이 싸운다. 그들은 예수님이 초월적 힘으로 승리할 줄 알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데 예수님은 죽겠다고 얘기하시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혁명을 성공했을 때 누가 양옆에 앉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다투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세상에서는 섬김을 받는 자가 앉아 있고 섬기는 자가 수종을 들어야 하지만 내 나라는 섬김을 받아야 할 자가 섬기는 나라니라.

예수님은 오셔서 구원을 베풀고, 봤지? 알았지? 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도 모르고, 자기들이 누구인지, 어떤 형편에 있는지,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아무런 해답도 갖지 않은, 그래서 예수님을 몰라보는 조건에서, 3년 반을 섬기고 30년을 살아서 우리와 동등한 자리에 내려와 우리의 처지와 현실을 공감하신다. 함께 하시고 함께 거하신다.

(마11:28~30) 이 부분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만만치 않다.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리면 마음의 평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해 전에 멜 깁슨이라는 유명한 배우가 패션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The Passion of the Christ) 예수님의 마지막 처형 장면을, 그 고통과 수욕을 정밀하게 집중적으로 그려낸 영화이다.

저는 조금 반대하려고 이 예를 든다. 로마인들이 썼던 채찍의 중간 부분에는 짐승의 뼈를 넣고 끝에는 납을 달아서, 채찍질을 하면 몸에 휘감기게 되어 있었다. 이걸 잡아당기면 살점이 묻어 나오게 되었고 이것이 훨씬 더 고통이었다.

채찍질도 가시관도 피 흘리심도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넘어지는 것도 우리가 다 안다. 이걸 다 슬퍼하고 그 장면을 처절하게 여긴다.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냥 십자가에 매달리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길을 걸어서 십자가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장애들, 우리가 신에 대하여 가지는 무지, 왜곡, 분노, 그래서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 말이 안 되는 배신과 악한 것들이 되는데, 이것을 넘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이것을 못 넘어가면 나는 너희에게 갈 수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앞이 없으면 결론은 없는 것이고 걸어가지 않으면 십자가까지 갈 수 없다.

왜 이것이 필요한가? 그가 매 맞는 것을 우리가 슬퍼한다면, 십자가까지도 필요 없다는 자기기만에 빠지게 된다.

나는 그때 울었다. 나는 그때 이미 예수를 알았다. 내가 누구인지도 알았다. 나라면 채찍질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문제를 낳는가? 우리 인생이 성육신의 연장이라는 것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거침돌이 된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세상을 섬기라고 이 세상에 남겨 두셨다. 그 섬김은 이 길을 지나가야만 섬길 수 있다. 못 알아듣는 것들, 말이 안 되는 것들, 쳐다보기도 싫은 것들을 넘지 않고는 섬김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아유 거기까지 하라고요? 그 말이 아니다. 현실에는 늘 이런 장애가 있다. 이런 장애를 외면하고 그냥 십자가 밑에 가서 흐느끼며 울고 있는 이상, 여러분은 섬기는 자리에 갈 수 없다.

일단은 가야 섬김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여러분의 하루는 억울하다. 늘 누군가를 원망하다가 아무것도 못 한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다. 그 여인은 남자를 여섯이나 지나왔다. 그 여인은 꺽달진 여자였을까, 아니면 모두가 내버린 하찮은 여자였을까?

둘 다 있었을 거다. 여러분도 둘 중에 하나 아닌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보니 합쳐진 것 같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고달프면 정오에 물을 길으러 가야 되고 아무도 만나기 싫은 상황이 있겠는가? 여기서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예수가 찾아오신 것이다.

거기서 예수님에 대해 모두가 이 분이 메시아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항복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렇다. 메시아라면 어떤 큰 결론을 내리기 전에 우리를 먼저 항복시켜야 맞다. 내 처지를 이해해 주어야 맞다. 이것이 성육신이다. 예수님은 이런 고단한 생애를 사신다.

예수님은 여러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기적은 예수님이 정작 하시려는 일과는 무관했다. 하나의 표적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예수님의 짐을 덜지 못했다. 우리의 마음을 사지 못했다. 우리는 계속 오해했다.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마저도, 그 큰 능력들,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를 잠잠하게 하고, 5병 2어의 기적들을 베푼 능력으로 원수들을 쳐부수고 승리가 있으리라고 기대했지만 그렇게 안 하셨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 알지 못하는 시간 동안 예수님은 섬기어 온 것이다. 모든 경우에 당신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셨다.

위로하시고 따뜻하게 말 하셨다.

다. 결 어

(1) 수가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우리에게 무엇이 되는 걸까?

우리가 넘어가야 하는 어떤 장애들이다. 현실성과 신앙의 구체성을 위하여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로서는 참기 힘들고 원치 않는 장애물 들이다.

그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야 어찌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며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 그 말 하라고 우리가 여기에 남아 있는 거다. 하필 한국 땅에 와서.

어떤 기도원에 가면 기도를 이렇게 시킨다.
우리나라를 독일 같이 만들어 주시옵소서.
우리나라를 미국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나라를 캐나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얼마나 한심한 기도인가? 예수님이 33년의 생애 동안 우리의 자리에 들어와 우리를 섬기셨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각각의 경우는 대단히 특별한 것이 될 것이다.

(2) 여러분은 여러분의 책임을 아무에게도 넘길 수 없다. 이 길을 가야 한다. 이 비명이 나올 때까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3. 에필로그

(1) 요즘은 3부 예배가 끝나면 서둘러 손자들을 보러 가야 한다. 친손자 한 명은 유치부에 있고 한 명은 유아부에 있어서 할아버지로서의 관심과 격려가 마땅한 시기가 되었다.

(2) 이번 주일 예배가 끝난 후에는 목사님께 뛰어갔다. 이번에는 집사람도 같이 갔다.

“목사님 이렇게 은혜로운 말씀을 이렇게 빨리 끝내시면 어떻게 해요?”(99%는 응석이다.)

“그랬어?”

(3) 집사람이 한 말씀 드렸다.

“저는 2부에서도 들었는데 3부가 훨씬 더 좋았어요”

“나는 그걸 잘 몰라요. 그냥 내가 하는 것에만 집중해서.” (목사님)

나중에 목사님 방을 나와서 내가 집사람에게 말했다. 앞자리에 앉아서 목사님하고 자꾸 눈을 맞추어 봐. 알겠다는 표정도 짓고.

(4) 은혜가 넘치는 말씀을 듣고 싶은가?

제가 알려드린 두 가지 팁을 한번 해보시는 건 어떨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