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4) (히2:8~16)

2018. 8. 19(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생략)

2. 내 용

가. 서 론

(1) 히브리서는 초대 교회의 고난 받는 공동체를 위하여 주신 위로의 서신이다. 위로가 단지, 힘을 내라, 잘 될 것이다, 같은 막연한 격려를 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현실에서 당하는 어떤 비극, 어떤 재앙으로도 방해할 수 없는, 그것을 넘어서는 귀한 것이다, 라는 답을 하고 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그 죽음이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가진 마귀를 멸하시는 행위라고 말한다.

(2) 죽음은 우리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재앙이다. 그러나 그 죽음이 재앙일 수는 없다, 까지 가야 하는데, 우리는 이것이 불만이다. 그렇게 하시려면 우리의 현실에서 죽음이 공포가 되지 않으며 죽음의 세력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아야 맞다. 현실은 죽음이 최고의 권력으로 우리에게 여전히 공포와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이것을 성경을 따라가 살펴보고 의미를 깨우친다면 성경이 주장하는 위로를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위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 본 론

(1) (히2:5) 인생에 고난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인생을 우리의 기대보다 더 깊게 목적하시기 때문에 고난이 있다.

하나님도 저도 포기할 테니 하나님도 이쯤에서 그만 하시죠.

그렇지 않다.

이래서 우리의 고난이 있게 된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우리를 후사로, 자녀로 부르셨다. 천사들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으신 것이다. 여기가 놀라운 장면이다. 우리의 소원은 다 무엇인가 하면 천사이다. 천사가 좋은 이유는 도덕적 실수가 없으며, 진흙 구덩이 속에 손 담구지 않아도 되어서 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천사는 내 시종이다. 너희는 내 상속자다. 그래서 너희는 여기까지 가야 한다. 예수가 와서 십자가를 지고 죽어 만든 존귀와 영광의 자리까지 가야 한다.

영광과 존귀는 우리도 찬성하지만 그 길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원치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상속자로 만들려고 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잠시 동안 천사들 보다 못한 상태에 있게 된다. 이게 말이 되는가? 말이 된다.

예수님께서도 그 길을 친히 걸으셨고 완성하셨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고 인간의 손에 의해 죽고, 수치와 고통 속에 죽음이라는 최고의 재앙, 불행, 비극을 겪으셨다. 그러나 이것이 부활을 만들었기 때문에, 부활 영광은 이런 과정을 빼 놓고는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성경이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 진실, 운명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수난과 모욕과 고통을 지나 죽음을 통과하여 죽음을 영광과 존귀의 과정으로 쓰셨다는 것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죽음이란 여러분이 잘 알듯이 헛된 것이며 소멸되는 것이다. 세상은 자랑, 명예, 승리가 있을 수 없는 이유가 모든 것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영생이라는 말은 생명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보다 더 크다. 그 가치가 영원하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우리는 죽음의 비극이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2)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인생 속에서 고난으로 느끼고 재앙으로 느낀다. 신자가 되어도 여전히 현실 속에서 큰 짐이 되는 원망이 남는다. 그러니 잘해야 체념이 전부인 우리의 신앙 현실을 새롭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부활로 소망으로 믿음으로 명예로 우리를 회복시켜야 한다.

시 8편에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높이 대우하신다. 우리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신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기왕에 영광과 존귀가 우리에게 허락될 운명이라면 왜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는 과정이 필요한가? 왜 고난과 분노가 있고 비명이 있는 현실을 걷게 하시는가?

시 8편에서는 사람이 무엇 이길래, 라는 의문문이 나온다. 환희와 감사 속에서 터져 나온 환호성이었지만 욥기에서는 반대의 입장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었다.

하나님 사람이 무엇 이길래, 과녁으로 삼으셔서, 분초도 쉬지 않고 시험 하시며 침 삼킬 동안도 그냥 놔두지 않으십니까?

욥은 의인이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 혹시라도 있을지 무르는 범죄를 인하여 미리 미리 제사를 지내고 복 받고 잘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하늘 어전회의에 사탄이 나타나고 하나님이 그를 꾸중한다. 너는 왜 그 모양이냐? 욥을 봐라.

하나님께서 잘 해주니까 그렇지요.

그래 내기 한번 해볼래?

잘 해주지 않아도 욥은 믿음을 지킬 것인가? 라는 내기가 되었다. 사탄은 욥의 가족을 치고 소유물을 치고 악창이 나게 했다. 욥은 영문을 모르는 재앙 속에서 울부짖게 된다. 세 친구들이 위로하러 왔다. 그러나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여 1주일을 옆에서 함께 고난의 현장에 있었다. 그리고 충고를 하기 시작한다. 빨리 회개해라.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것이다.

나는 잘못이 없다. 나는 회개할 것이 없다. 나는 영문을 모른다. 당황스러울 뿐이다.

그럼 하나님이 잘못했단 말이냐? 네가 아무 잘못이 없다구? 그런데 하나님이 벌을 내리셨단 말이냐? 너 그렇게 말하는 것만 봐도 네가 잘못한 것이다. 어찌 네가 하나님보다 낫겠느냐? 하나님이 더 공평하시고 엄정하시다. 어찌 네가 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겠느냐?

그렇지 않다. 나는 하나님께 이 문제를 물어 봐야겠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욥의 시험이다.

하나님은 나중에 그를 만나 주신다. 천하 만물을 보이시며 창조세계의 신비와 위엄과 깊은 아름다움들을 소개한다. 욥은 항복한다.

우리는 쉽게 욥이 하나님의 크심과 놀라우심 때문에 할 말이 없게 되었다, 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너는 이 장엄한 창조세계를 나와함께 다스려야 할 내 후사다. 이 놀라움들에 대하여 너는 깊은 이해와 하나님의 자녀라는 긍지와 지위와 실력이 있어야 한다.

너는 다만 네 자신의 일신상의 안위만 걱정하면 되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된다.

사탄의 질문에 하나님이 명예를 걸고 이 내기를 해보자고 한 것은 욥이 신앙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훨씬 더 커다란 문제가 걸려 있다.

사탄은 대들었다.

욥이 뭐 대단합니까? 복 받아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전부인 인생일 뿐입니다. 무슨 가치가 그에게 더 있습니까? 무슨 그에게 위대한 점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너 내가 인간을 다만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만족하는 생물에 불과한 존재로 만들었다는 말이냐? 내가 창조주로서 어떤 실력과 어떤 영광과 어떤 대단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 세계를 만들었고, 다스리며, 인류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냐? 한번 해볼까?

욥에게 걸린 문제가 무엇인가? 그는 잘못이 없으나 볶인다는 것이다. 왜 볶이는가? 우리의 현실에서도 동일하다. 여러분이 잘못한 것 무엇인가?

예수 믿었고 헌금하고 있고 그런데 하나님은 왜 볶으시는 것일까? 우리의 마음 속 불만은 무슨 이유인가?

세상의 것으로 만족하려는 것을 깨부수는 하나님의 도전이 우리를 쉬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욥에게 그랬듯이 그래서 우리는 자꾸 묻는다.

원하는 것 있으면 빨리 말 하십시오. 다 내겠습니다. 더 이상은 고민하지 않는 여생을 주십시오. 우리의 소원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못하겠다고 하신다.

너희는 지금 사탄이 너희를 평가한 정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내가 목적한 인간에 대한 지위나 내가 목적한 나의 능력이 아니다. 너는 이것 보다 더 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뚫는 다는 것은 소멸, 비극을 뚫어서 그것을 힘을 못 쓰게 하고, 없애 버리고, 묻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 길로 우리를 계속 인도하고 계신다.

죽음이라는 자리는 소멸되고 끝장이 난 헛된 것 이었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예수를 통해 보이시고,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회성의 인생이다, 라는 생각을 도전하고 계신다.

죽음이 있는데 그 죽음이 끝일 수 없다. 그 죽음이 끝이 라면 나는 창조주의 명예를 내 놓아야 한다. 창조와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그런 하나님은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렇게 도전을 주는 것이 욥기이고, 예수님의 생애이다.

죽음이 모든 것을 삼키고 끝장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로 하여금 기대를 넘어서게 하는 자리이다.

이렇게 살면 뭐해?
자식 키우면 뭐해? 오래 살면 뭐해?

죽음이 어른거리는 자리에서 타협으로 주저앉는 우리를 붙들어 일으킨다. 죽음이 끝이라면 창조주인 나의 체면이 설 수 있겠느냐? 예수를 보낸 건 뭐냐?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너희가 체념으로 끝내며, 너희 기대한 것으로 만족하고 마는 너희의 인생을, 주저앉을 수 없다고 하면서, 강력하게 인류와 역사를 흔든 사건이 십자가다.

우리를 만들 때부터 무엇으로도 우리를 중단시키거나 실패하거나 타협하거나 체념하는 것으로 끝낼 수 없는 인간을 하나님은 목적하셨다. 그래서 아들을 보내신 거다.

우리의 체념과 한계를 무너뜨리도록 죽음을 치워버리고 그 죽음의 자리에서 새로운 문을 열도록 우리의 불만, 재난, 고민 등이 일을 한다.

(14절) 천사들이 후사가 아니고 인류가 후사다. 아브라함이 등장한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롬4:16)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너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다. 너로부터 시작하여 내가 내 백성을 하늘의 별 같고 바다의 모래같이 부를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다. 창조의 하나님이요 부활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좋은, 믿음의 모범적인 첫 번째가 아니다. 그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든 첫 번째 수혜자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것은 믿음이라는 방법을 동원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에 첫 번째 은혜를 입은 자, 믿음의 복을 누린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갖자 라고 할 때 아브라함이 믿음의 영웅이어서가 아니다. 그가 만들지 않은 것을 받은 자라는 면에서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후손으로 우리를 부르심으로, 우리가 다 은혜와 믿음과 권능의 수혜자, 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는 창조의 은혜를 받았을 뿐 아니라 부활의 은혜를 받았다. 부활의 은혜는 이삭에게서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며 그로부터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셀 수 없게 많이 부르셨다. 뜻밖에 그는 자식이 없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슨 복을 줄까, 라고 하시자 그는 대답한다.

하나님 저를 이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셨으니 저는 더 바랄게 없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저 양자 된 엘리에셀이나 잘 키우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은 답하신다.

네 몸에서 날 자로 네 후손을 세울 것이다.

사라는 애를 못 낳아서, 부부가 합심해서 하갈을 들이고 이스마엘을 낳는다.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한다. 이스마엘도 아니다. 사라의 몸에서 낳아야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나이 이미 99살 이었다.

하나님은 더 구체적으로 1년 후인 내년에 아들을 안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

사라는 문 뒤에서 웃었다. 하나님이 사라야 너 왜 웃냐? 하시자 사라는 안 웃었다고 우긴다. 사라야 아들 낳으면 꼭 이름을 웃음이라고 지어라. 무슨 웃음이었겠는가? 비웃음이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1년 후에 애를 낳는다. 창조이다. 이삭은 중요한 증언을 하고 있다. 비웃음이 웃음이 되게 하셨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매우 깊어진다. 무슨 요구가 이어 지는가? 네 아들 잡아라, 이다. 모리아 산으로 아들 잡으러 간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만큼 믿음이 있었다. 라고 하는 것은 곁길로 빠지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를 왜 잡으라고 했을까?

우리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패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만족시키는 믿음을 갖는 일에 우리는 실패한다. 우리에게 준 자유로 책임으로 가지를 못했다.

창조를 잡으라고 할 바엔 왜 주셨을까?

하나님은 다 없애고 새로 만들지 않고 우리가 저질러 놓은 일까지 포함하여 부활을 만드신다. 이것이 이삭사건이다. 잡아라. 잡는다. 멈추어라, 네가 여기까지 따라 왔으니 되었다.

창조가 모든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영광이 되게 하는 일을 했지만, 우리는 제일 중요한 일을 실패해서 죽음을 부르게 된 것이다.

이게 자유와 책임이었다. 그걸 하나님이 되 돌리신다. 우리의 실패가 우리에게 보여준 결과를 지나옴으로써, 십자가를 지고 지나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뿐 아니라, 우리의 생애에서도 보여 지는 것을 통하여, 죽음이 우리에게 들이대는 위협을 극복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가지 못해서 자초한 이 재앙들을 통과하여, 창조가 원래 목적했던 이루기 위하여 우리의 실패까지 담아서 부활로 끌고 간다.

우리 생애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창조를 실패하여 자초한 모든 재앙들을 뒤집어, 우리에게 한 번 더 하나님 자녀의 영광에 이르도록 기회를 주셨다.

여러분이 제자도 라고 외우는 이 구절을 보자.

(마16:24) 자기 부인이 무엇인가? 욥의 불만이었다. 하나님이 저 같은 것이 무슨 가치가 있길래, 저를 귀히 여기시고 못살게 구십니까? 제가 잘못하는 게 하나님께 무슨 누가 됩니까?

내버려 두십시오. 그렇게는 못한다. 너는 나에게 중요하다. 네가 실패하는 것은 창조주에게 모욕이 된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공포로 이해되는가? 감사로 이해되는가? 네가 타협하고 앉아 있는 꼴, 나는 못 본다. 이것이 너에게 괴로움이냐? 이것을 너는 재앙이라고 보느냐? 네 하는 아버지가 너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 말을 너는 모르느냐?

이것이 여러분의 고난이다. 여러분의 원망들이다. 돌아설 수 없는가?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돌아오겠는가? 이것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만드는지 모르겠는가?

우리의 소원은 안심이 전부이다. 이렇게 한 번 살고 죽으면 그만이다, 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축소하며 비난하며 원망하며 분노하는가?

여기를 건너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이다. 로완 윌리암스는 이 문제를 이렇게 얘기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나를 울게 놔두는가?
왜 분노하게 하시는가?

하나님의 권능이란 인간의 마음과 씨름하고 함께 협력하여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끊임없이 그것을 돌파해 나가는 힘이다.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힘이다.

3. 에필로그 (생략)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