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10) (히6:13~7:10)

2018. 11. 11(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주일 설교가 끝난 뒤 목사님 방으로 뛰어갔다. 이 시간은 목사님께서 다른 교역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시는 시간이어서 목사님 앞에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꼭 드릴 말씀이 있을 때는 실례를 무릅쓰고 무식하게 앉게 된다.

목사님, 오늘 설교에 제목을 붙일 수 있게 허락하신다면, “우리에게 설교가 필요한 이유”라고 붙이고 싶어요.

그랬어?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을 정리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는 것을 만드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 증거를 받았으며, 그것이 우리에게도 같은 증거가 된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성경은 그 후의 뒷얘기는 안 해주잖아요. 그러나 목사님은, 하나님은 이 증거들을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라고 설교하셔서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해주셨어요.

이런 내용은 설교를 안 들으면 저희가 어떻게 알게 되겠습니까? 오늘 설교는 우리에게 설교가 필요한 이유를 알게 해주셨어요.
(2) 웃으신다.

정말로 그렇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안다. (때로는 그것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우리가 찾아 들어오기를 기다리시며 보화들을 감추어 놓으셨다. 우리가 노력해서 그걸 발견하기는 참 어렵다. 그러니 이런 은혜의 말씀을 들으면 더욱 감사하다.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도 이삭처럼 없는데서 빚어진 존재인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도 이삭처럼 부활하며,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무한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존재들이 될 것이라는 것을.

2.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맹세와 예수님의 제사장직의 영원하심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내실 때에도 예수님의 제사장직을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이 되라, 라고 하면서 보내셨다는 것이 오늘의 본문이다.

(2) 이 본문 앞에 무엇이 있었는가? 믿음의 초보를 지나서 더 나아가라. 믿음에 더 가는 길을 가라. 여기서 중단하지마라. 이러한 것은 출애굽 사건에서도 보여 진다. 애굽을 나온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해서 광야에서 다 죽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애굽에서 꺼낸 이유는 가나안에 들여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너희가 결정하고 너희가 책임져야 하는 너희의 영광이다.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

나. 본론

(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도대체 어떻게 맹세하셨는가? 우리가 잘 아는,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는 말씀이다.

창세기 12장이다. 이것이 시작이다. 본문에서 인용된 맹세는 창세기 22장에 있다. 창세기 12장과 창세기 22장은 어느 만큼의 거리가 있을까? 창세기 12장은 하나님께서 그를 본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 꺼내어 가나안으로 부르셨던 매우 초기에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15장에서도, 17장에서도 반복적으로 나오며 마침내 22장에도 있는데 오늘 히브리서 6장이 인용한 사건이 여기 나온다.

이삭을 바치는 사건이다. 이삭을 잡으려는 아브라함을 천사가 내려와 막고 하나님은 약속을 주신다.

(창22:15~18) 이삭을 바친 사건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 하노라 라고 하신다. 내가 너를 결단코 복을 주고 네 자손으로 번성하게 하며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리라.

여기서 보면 순종이 근거가 되어 약속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전에 이삭을 은혜로 받기도 전에 창세기 12장에 동일한 약속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삭을 바치는 순종으로 복을 약속하신 것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이삭을 바치려던 아브라함의 행위가 위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보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 순종이 있기 전에 이미 허락된 약속이었다.

15장에서는 제물을 쪼개는 어길 수 없는 약속을 하셨고 17장에서는 이름을 바꾸어 주는 약속을 하셨다. 약속의 내용은 동일했다.

그러니까 이삭을 바친 행위는 순종으로 복을 받은 복의 조건과 자격 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더 나아가는 것 같다. 성경은 이삭을 바쳐서 복을 받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위해 약속하시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맹세하셨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다, 라는 것을 강조 하고 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 복을 주기로 한 근거가 무엇이었느냐 할 때 이삭을 바친 것이었다, 라고 하면 너무 쉽게 가는 것이다.

(2) (롬4:13~16)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으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다 복을 주기로 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율법을 기준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신다.

여기서 율법과 믿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율법은 당연히 잘 잘못의 조건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인가? 일단 잘 잘못의 조건은 아니다. 율법이 잘 잘못의 조건이라는 것과 믿음이 잘 잘못을 벗어났다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믿음은 인과응보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인과응보를 벗어나 잘 잘못이라는 기준이 없어지는 바람에 제멋대로 밖에는 남는 게 없다. 제멋대로라는 것은 율법만도 못한 것이다. 제멋대로는 잘 잘못의 기준보다도 못한 거다. 하나님은 믿음을 율법보다 더 좋은 방책으로 주셨다. 율법은 잘못하지 않는 것이다. 율법은 잘하게 하는 것은 없다. 믿음은 잘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잘하게 하는 것을 잘 모른다. 잘하는 것을 못 만드는 율법에서 잘하는 것을 만드는 것으로 아브라함을 붙잡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잘했는가, 잘못했는가를, 잘못하지 않은 것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잘하고 있는 것으로 붙잡고 있다. 그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아브라함이 할 수 없는 것을 주신다.

첫 번째 사건은 이삭을 낳는 것이다. 이삭은 어떻게 얻었는가?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애를 낳을 수 없을 때 받았다. 성경은 이것을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셨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애를 잘 키우고 못 키우고 가 아니라,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든 일이며, 잘하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한 걸음 더 간다. 그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다. 이걸 감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감당했는가? 앞의 상황과 똑같은 조건 때문에 순종이 가능해진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서 내년 이맘때 아들을 낳으리라고 하셨을 때 웃었다. 하나님께서는 내년에 애 낳으면 이름을 웃음(이삭)이라고 지으라 하셨다.

이번엔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다. 바칠 수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전에 이삭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에는 아브라함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못 낳아도 본전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고 싶어 하는 순종은, 우리 인생에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해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잘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고난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그의 인생에서 이걸 만난다. 그는 하나님을 도망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다른 타협할 제3의 선택이 없었다. 이삭을 잡을 수밖에 없었고 잡으러 간다.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을 보고 너 순종했으니 됐다, 라고 하시지 않고, 이 사건을 통해 부활을 암시하신다. 이삭은 없을 때 가졌을 뿐만 아니라 죽음에서 다시 태어난 아들로 가지게 된다. 죽음도 통과한 자식을 갖게 됨으로써 아브라함은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두 가지 증거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는 것을 만드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증거를 받는다.

성경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끝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멈춘다. 죽은 자를 돌려받은 것이 다가 아니라, 위에서 보이는 증거들로 하나님은 우리 앞에 무한정한 세계를 열어 놓으셨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다, 라는 것을 약속으로 살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놓친다.

이삭을 얻고 이삭을 죽이고, 창조와 부활의 증거를 가지고 있어도, 그걸로 끝나지 않으며 이것들은 다만 증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 앞에는 마음껏 열려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있다. 하나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로 불려가고 있다.

이것을 모르니까 우리는 왜 나를 예수 믿게 하고 감동하게 하고 어려운 길로 가게 하시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이러한 시험과 원망에 사로잡히니까 더 가야 하는 길을 못가고 있다. 죽었던 아이를 돌려받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 중에서는 극히 작은 일이다. 더 큰 것을 하신다는 것을 놓치고 만다.

(롬4:17) 이미 말했듯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받고 죽은 것을 돌려받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는 일, 그리로 나아가는 진행과 목적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존재가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를 위해 순종이 필요하며 고난이 라는 이름의 현실이 있는 것이다.

(3) (히2:14~18)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고 계시는데, 그것이 고난이기 때문에, 우리는 만족스럽지 않다. 왜 고난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는 방법이 진지하기 때문이다. 값싼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도 그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더 굉장한 것을 만들기 위하여 역사가 있고 인생이 있고 오늘의 한 숨과 오늘의 고민이 있게 하신다. 그리고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이 우리 편을 들고 있다.
그러니 고난과 순종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자.

(히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 라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다. 고난과 순종이라는 것은 온전을 채우는 어떤 몸통 같은 것이다. 다만 시험지가 아니라, 다만 한 번의 도전, 위협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본질을 위대한 것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성경은 얘기한다.

겟세마네 동산을 생각해 보라, 아버지여 할만 하시 거든 이 잔을 내게서 치워 주시옵소서. 더 가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차마 갈 수 없는 길을 가심으로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예수가 가시고 경험하신 일 밖에 있는 것은 없게 하셨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셨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이것으로 예수님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까지 뒤집을 수 있었다.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원통함도 그것을 뒤집어 영광이 되게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용을 채우시려는 방법이기도 하다. 창조의 하나님, 부활의 하나님이시니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중 어떠한 것도 손해나는 것은 없다고 성경은 이야기 한다.

어떻게 이런 창피한 일을, 말도 안 되는 일을 뒤집을 수 있단 말인가? 뒤집을 수 있다. 찬송가 중 제일 유명한 복된 찬송은 자비로운 주 하나님이다. (아마도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정리자 주) 그것을 지은 사람은 노예선 선장이었다. 그 찬송가의 가치는 그의 과거가 말이 안 됨으로써 깊이와 가치와 우리의 경탄을 낳는다.

그 찬송가를 등 따뜻하고 배부른 사람이 지었다면 무슨 대단한 일이 있겠는가? 이러한 역전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여러분, 밤은 악이고 낮은 선인가? 아니다. 밤은 낮만큼 대단한 풍성함이다. 해는 선이고 별은 악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창조이고,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담으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영광은 깊고, 높고, 놀라운 찬송을 불러낸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그렇게 간섭하시고,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 너 핍박을 당하지만 지지마라, 이렇게 응원하시지 않는다. 이 핍박이 일을 한다, 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나가는 그 모든 눈물과 한탄과 절망이 결국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만들었다. 아브라함은 그 일로 정말 깊어졌다. 아브라함은 한 인간에게 채우려는 하나님의 내용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알게 되었고 히브리서는 그것을 고난 받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위로하고 있다.

결과를 알기 때문에 순종을 하고, 이렇게 하면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율법에 맡기지 않고, 잘 잘못에 맡기지 않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목적으로 우리를 붙잡고 끌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가는 자리인 것이다. 예수님 보고 더 가자고 하는 하나님의 믿음, 우리를 만들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냉정하고 기계적이고 심사위원의 마음을 가지고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이 깊은, 이 놀라운, 이 고통의 길을 고집하기에, 성경은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4) 믿음은 조건으로도 자격으로도 쓰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놀랍게 하나님의 일하심의 기이함에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온다.

(엡1:3~6) 이 구 절은 너무 중요해서 11절부터 14절까지에서 다시 반복한다. 성령이 우리를 붙잡고 이 약속을 이루신다고 강조한다. 성령은 무엇을 하시는가? 붙잡고 계시지 해결하시지 않는다.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셔서 화끈하게 해결해 주시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계신다. 성령은 우리를 어디로 떠밀고 있는가? 하나님 맙소서, 왜 제가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합니까? 성경은 이 길을 가자고 하시는 것이다.

다. 결어
(1) 우리가 걷는 길의 신비는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의 신비와 같이, 원치 않는 길을 아버지께서 고집하여 걸은 것과 같이, 순종과 고난이 있는 것이다. 이 길은 잘 잘못으로 처리되는 길이 아니다. 이를 상회한다. 선택의 문제가 아닌 길을 하나님이 요구하셔서, 내가 예수도 믿고, 소원도 있고, 마음에 준비도 되어 있는데, 이해할 수 없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고통이 있다.

성경은 그것이 정상적인 길이라고 가르친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하나님이 자랑하시고 맹세하신 생애가 된 것 같이 우리의 생애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감사와 감격과 경탄으로 마무리 지어질 것이라고 성경이 약속한다.

모든 이들의 현실이 이렇게 맹세하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위로와 힘과 자랑이 되고 그런 실천이 있기를 바란다.(기도)

3. 에필로그

(1) 요즘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을 계속 읽고 있다. 정말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이 아까워 하루에 한 편씩만 읽고 있다. 앞으로도 다 읽으려면 21일이 있어야 한다.

(2) 오늘 읽은 잠언 설교에서 유진 목사님은 잠언 1:20에서 나오는 지혜는 바로 성령님이며 잠언은 성령님을 지혜부인(Lady Wisdom)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러한 호칭으로 부름으로써 지혜가 단지 정보나 방향제시, 혹은 충고나 좋은 생각에 불과하지 않도록 인격화 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혜부인은 우리의 좋은 면만이 아니라 나쁜 일을 할 수도 있는 성향, 우리의 성취만이 아니라 실수와 실패에도 관여 하신다고 설교한다.

(3) 표현은 좀 다르지만 이 부분은 우리가 종종 듣는 어떤 말씀과 흡사하지 않은가? 실패도 일을 하며 실패가 우리 인생 전체로 보아 결코 손해나는 일이 아니며 우리는 이 실패라는 고난을 통해서 더욱 깊어진다.

(4) 그렇다. 박목사님의 설교이다. 같은 내용을 달리 표현했을 뿐이다. 무림에서 최고수가 되면 서로 눈빛만 보아도 상대의 뜻을 안다고 했는데 그런 경우일까? (목사님께 좀 죄송한 비유지만, 목사님은 무협 소설의 광팬이셨다. 요즘도 많이 읽으시려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