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7) (히4:1~13)

2018. 9. 30(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몇 주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감기와 몸살은 항상 같이 온다. 교회에서 만나는 여러 집사님들이 묻는다. 왜 요즘은 안 보내세요? 죄송했다. 더 건강해져서 잘 보내야겠다.

(2) 사실 박목사님 앞에서 건강 얘기 하기는 죄송한 일이다. 박목사님께서는 지금도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거의 사투를 벌이고 계신다. 그러면서도 감당할 부분을 감당하기 위해 기진할 때까지 열심을 내신다.

(3) 히브리서가 날이 갈수록 재미있다. 설교를 듣고 톰 라이트의 주석을 다시 보면 더 재미있다. 목사님의 설교와 톰 라이트의 주석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내용들이 있다. 그러나 잘 보면 주석은 역시 주석이다. 설교를 위해 참고가 될 뿐이다. 설교를 들어야 크신 하나님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다.

2. 내 용

가. 서론

(1) 히브리서는 초대 교회의 핍박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당시 교인들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는 그 현실이 너무 어려워서 신앙적 위기와 침체를 겪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격려는, 이 고난이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잘 견디어야 한다, 라는 격려이다.
(히3:17~19) 성경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실패하여 하나님께 진노와 벌을 받아 광야에서 죽어나갔다,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러니 너희는 므리바에서 선조들이 불순종했던 것을 따라가지 말라고 권면한다.

나. 본론

(1) 순종이라고 얘기하면 쉽게,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순종이다,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절에서도 순종을 믿음과 결부시키고 있고 오늘 본문에서도 순종이 믿음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순종이라고 하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믿음이라고 하면 약간 개념이 다르다. 책임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우리를 말할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지 예수에게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은혜 받은 사람과 믿는 사람은 그 내용에서 분명히 차이가 난다.

믿음이 조건이 된다는 것은 분명히 아니고, 우리의 선택이 조건이 된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성경이 얘기하고 우리도 경험했다. 그러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믿음을 설명하려고 동원하는 것이다. 구원을 얻은 사람들을 얘기할 때 은혜를 얻었다는 것보다 언제나 믿음을 먼저 얘기한다.

(2) 믿음에는 은혜의 요소가 충분히 있지만 책임의 요소가 들어 있다. 말하자면 은혜는 우리를 책임으로 밀고 있는 것이다. 책임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고 구원의 목적이다. 그러니 출애굽 사건을 논할 때에, 출애굽 한 것이 구원이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은 구원의 완성이다. 중간에 죽으면 지옥에 가냐?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여기 4장에서는 그것을 안식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너희는 안식할 일이 아직 남아 있는 도상에 있다, 그러니 순종해라, 구원의 완성의 자리에 까지 가라라고 한다. 그런데 출애굽사건을 다시 회고해 보면, 오늘 본문에도 등장 하듯이,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심으로 창조를 다 이루셨고 안식의 자리에도 가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해서 구원을 얻었으나 안식의 자리에 못 들어갔고 못 들어간 이유는 불순종한 탓이라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이 구원은 불완전한 상태로 끝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안식하셨음으로 우리에게 주시려는 안식이 취소되거나 실패되지 않는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못 들어간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는 일에 있어서 모세를 세우시고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꺾으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을 깨서 물을 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등 하나님이 다 하셨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나안에 들어가는 문제만은 백성들의 선택에 맡기셨다. 하나님은 안식하고 계시고 창조를 다 이루셨고 구원에 있어서도 그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셨다. 그런데도 아직 순종, 책임이라는 부분은 남아 있다고 얘기한다.

순종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것, 책임은 선택하여 책임지면 되는 것이라는 어떤 종교적 윤리이거나 명분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인생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구원 역사에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책임인 것이다.

(3) 여러분 스스로의 개인 인생에서 보다시피 신자의 인생에서 꼭 풀어야 하는 문제가 뭐냐? 구원은 받았는데 안식에 이르지 못했다는 현실이다. 즉,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왜 고난을 인생의 과정에 넣었는가를 성경이 말하는 방법으로 풀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 인생을 살아내지 못한다. 체념하거나 변명하거나 외면하고 얼버무리고 말 것이다.

(히4:12~13) 구원에서 고난을 이해하고 고난을 극복하고 고난을 살아내지 않고, 변명하고 타협하고 외면하고 책임을 집어 던지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길이다. 기억해라, 이 고난을 제대로 살아라, 순종해라, 책임을 져라. 순종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 안 들어주시는 것을 보면 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뜻과 다른 행동을 하려고 하면 저를 막아 주십시오.

몰라서 잘못 가는 것뿐만 아니라, 이건 아니다를 알면서도 그걸 해결 못하고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우리는 결국 하나님 왜 이런 인생을 살게 하십니까? 라고 한다.

순종이나 믿음이라는 단어는 보다 더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고난 속에, 실패 속에, 원망 속에, 우리를 몰아넣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이해해야 한다.

다만 체념하거나, 원망하거나 망연자실하고 있는 것이 답일 수는 없다. 성경의 답은 무엇인가? 순종과 책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4) (마7:15~23) 놀라운 선언이다. 무슨 뜻인가? 옳은 나무와 그릇된 나무는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열매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잘못된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여기서 열매는 그 나무를 증명하는 증거이지 본체는 아니다. 선지자 노릇은 할 수 있으나 그가 선지자다운지는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순종이란 순종이 윤리이고 명분이고가 아니라 내가 순종을 할 수 있는 구체적 존재인가가 더 중요하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경지와 위상과 속성이 순종을 할 수 있는 실체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순종은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구호이거나 강요이거나 명령이거나 명분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고 내가 만들어 내려면 내가 커야 한다. 순종은 하나의 법이 아니고 수단이 아니고 그것을 만들어 내는 실력으로 내가 크기를 바라는 눈에 보이는 명령이다.

군대에서 가장 많이 요구하는 것이 충성이다. 무엇에 대한 충성인가? 당연히 나라에 대한 충성이다. 국가방위이다. 충성에는 중요한 조건이 있는데 약속하는 자가 실력이 있어야 한다. 충성이라고 외치는 자가 국방의 한 조각을 감당해야 한다. 지금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꺼냈으나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바로를 깨는 것과 홍해를 가르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저들을 밀어 넣지 않고 저들의 결정과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거기는 다만 지리적으로 가야하는 목적지가 아니라 실력이 만들어져야 되는 목적지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이다.

(5) 열매를 많이 모으는 것 같이 다만 실천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 자신인 것이다. 열매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책임을 질 수 있는 우리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인간이 빚는 많은 시행착오를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될 때까지라는 시간을 주신다. 우리는 이런 인물을 요셉에게서 본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애굽으로 팔려가고 종노릇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총리가 된다. 잘못 이해하면 입지전적인 인물이 된다. 그러나 그는 성공의 신화를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니다. (시105:17~19)

우리는 인과 관계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이해하니까 요셉의 성공은 그가 말씀을 지켰다, 믿음을 지켰다, 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요셉은 그렇지 않았다. 요셉은 자신의 현실과 생에 대하여 넋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총리가 된다. 애굽을 구하고 세상을 구하고 자기 가족을 구한다. 그리고 형들이 자기에게 와서 절하는 자리까지 온다. 요셉은 그 때 깨닫는다. 자기 인생이 운에 의해서 밀려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간섭하신 생애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요셉은 자기 인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단련시키신 것이었다. 그래서 말한다. 형님들, 형님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가족을 구하고 세상을 구한 것은 그냥 하나의 열매일 뿐이다 나는 내 존재와 내 생애를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에 참여하게 해 주셨다.

(히5:8~9) 예수님은 왜 고난을 받으셨으며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는가? 그래서 온전하게 되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예수님마저도 걸었어야 했고, 걸었고 당연히 우리에게도 요구되고 있는 고난, 그것이 순종이다.

(6) (요17:21~23)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의 긴밀한 연합에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도망간 우리를 찾으러 오셨다. 그 찾아오심은 구원을 베풀고 천국가게 하는 정도가 아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보내서 성부와 성자가 하나인 것 같이, 여기서 하나란 가장 긴밀한 연합을 말한다, 우리를 가장 긴밀한 연합으로 부르고 계신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찾아오심은 우리의 형편과 자리까지 오셔서, 우리가 혼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도 안 되는 자리까지 오신다. 십자가까지 지시고.

여러분이 잘못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외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자리가 있는 것처럼 일부러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 경우는 없다. 그런 장소도 없다 그런 시간도 없다.

모세가 하나님께 반문했던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지난 40년 동안은 뭐 하셨습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한 적이 없는 하나님이다. 너는 혼자 있었던 날이 없다. 네가 죽은 것 같고 잊혀 졌다고 생각했던 날 들이 너를 만들고 있었다. 요셉은 자기 인생을 이해할 길이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로만 붙들려 왔다. 그러나 그것은 최고의 시간들이었다.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오신다. 하나님은 말하자면 우리에게 순종하신 것이다. 순종이란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하는 것이다. 성경은 사랑하는 자가 그 사랑하는 대상에게 하는 것을 순종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자리 어디까지라도 쫓아오신다. 그리고 구호나 명분이나 수단으로서의 순종이 아니라 이심전심인, 일심동체인, 하나님이 그의 사랑과 창조와 부활로, 아니 사랑하는 아들로 부른 이 자리에 오라고 하신다. 이것이 순종이며 이것이 책임이다.

책임이란 우리에게는 조건이고 수단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우리에게 가진 목적이다.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보라. 우리는 히브리서 3장과 4장에서 순종에 대한 경고를 받고 있다. 애굽에서 나온 너희 선조가 순종하지 않아서 다 죽었다. 너희는 그러지 마라.

굉장히 무서운 협박으로 들리는가? (시95:8~11) 8절 이하를 읽으면 무서운 경고로 들린다. 그러나 시편 95편은 그런 시가 아니다. 1절부터 7절까지를 보자. 얼마나 따뜻한 사랑이 느껴지는가? 8절은 이런 배경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러니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거역하지마라.

다. 결어

(1) 하나님의 진정성이 느껴지는가? 우리가 겪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무엇으로 만들려고 하는지 알겠는가? 하나님이 다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조작하거나 조정하거나 굴복시키려 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에게 순종한 것처럼 너희 마음을 다오. 그리고 될 때 까지 해 보자. 너희의 수고와 잘못이 그것으로 끝장나지 않는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 네 아버지이고 너희는 내 사랑하는 자식이다. 내가 너희를 어찌 포기하겠느냐?

(2) 그리고 나는 타협하거나 체념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너희에게도 그렇다. 그러니 여러분의 고난에 찬 인생이 만드는 일을 여러분의 기회로 아시고 하루만큼 크는 나날이 되기 바란다.

3. 에필로그

(1)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여러 표현들이 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사람에게 비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하나님.

(2) 이번 설교에서는 우리에게 순종하시는 하나님 이라고 하신다. 신자들에게 순종이란 거의 첫 번째의 책임이거나 덕목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삼상15:22)

그런데 박목사님게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하고 계신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그냥 이 말씀만으로도 은혜가 넘친다.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까지 깊은 것이구나.

그러니 나도 집사람에게 아이들에게 이웃에게 순종해야 하지 않겠는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