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2) (히1:10~2:4)

2018. 7. 22(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한편의 설교를 듣고 난 후 청중에게는 여러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다. 지금까지 흔히 들어본 얘기는 목사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다. 어떤 은혜인지는 은혜를 받은 각자 만이 알 것이다. 그것은 설교 중 어떤 한 부분 또는 어느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을 수도 있고, 내 처지와 똑 같네, 오늘은 나에게 말씀하시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설교 전체가 하나의 감동으로 다가와 은혜가 될 수 있다.

(2) 내 경우 지난 주 설교는 설교 전체가 하나의 감동이었다. 나는 박목사님께 가서 감동이었습니다, 라고 얘기하는 것 대신에 목사님을 포옹해 드렸다. 지적하고 싶어 하는 당신의 표정이 보인다. 좀 무례한 거 아니야? 어떻게 평신도가 교역자를 포옹하나?

모르시는 말씀 그건 일반적인 얘기다. 박목사님은 나를 신앙의 동지라 부르시고 그렇게 글로 써주시고 대접도 그렇게 하신다. 신앙의 동지는 나뿐이 아니다. 당신도 동지 아닌가? 동지, 다음 주엔 예배 후 2층 로비에서 박목사님과 한번 포옹하시지요.

(3) 박목사님 같은 거인도(좋게 이해해 달라.) 청중들의 반응이 궁금하실까? 답은 당연히 그렇다. 목사님은 자신의 설교가 교우들에게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매우 궁금해 하신다. 그래서 설교 리포트를 기다리신다. 녹음을 다시 들으면 되지만 그건 40분이나 시간이 필요하고 목사님께서는 녹음으로 들으실 줄 모른다. 리포트를 읽으시면 10분 이내로 파악하시니까, 리포트를 선호하신다. 리포트는 장점도 있다. 설교라는 구어체를 문맥이 맞는 문어체로 바꾸어 놓기 때문에 훨씬 이해하기 좋다.
2. 내 용

가. 서 론

(1) 히브리서는 초대 교회의 고난과 핍박 속에서 힘들어 하는 신앙인들을 격려하기 위한 편지였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잘 믿고 헌신하고 열심을 내는 데도 신앙생활이 기대와 다르고 보상이 없고 고통스럽다는 현실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는 일반적인 답은 잘 견뎌, 열심히 기도해 라고 하는 것 같은 모호한 방법이 전부이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이 문제에 대해 예상과 다른 답을 다른 관점과 시각으로 제시하고 있다.

너희가 얻은 구원이 바로 답이다. 너희가 이해할 수 없는 현실과 고난이 답이다, 라고 말한다.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답은 이미 주어져 있는데 너희가 모르고 있다, 라는 답을 하고 있다.

(2) 기독교신앙은 예수를 믿는 것이다. 그러니 이 말의 초점은 당연히 예수에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종종 믿음에 초점을 둔다. 잘 못 믿어서 어려움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또는 믿음이 없어서 고통이 오는 것 같이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내 쪽에서 해결책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반대로 얘기한다. 예수가 다 했다, 라고 얘기한다. 우리는 이 다 했다 라는 문제가 현실적으로는 납득되지 않는다. 이 갈등을 히브리서는 풀어내고 있다.

나. 예수는 누구인가?

(1) 오늘 본문도 언제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준적이 있느냐 라고 말한다. 이 말의 뜻은 당연히 예수님은 특별한 자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천사중의 하나가 아니고 아들이라는 뜻인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아들이라는 말은 아버지와 동등한 신분과 지위를 갖는다는 뜻이다. 예수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종들을 시켜 뜻을 전했다면, 예수 이후에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여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셨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지시와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시니까 현장에 와서 현장의 일을 스스로 고치시고 스스로 새롭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로완 윌리암스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새로운 것으로 현실에 개입할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세상을 버려두시지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시겠다, 라고 하시면 그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태를 역전시키겠다고 생각하시면 역전시키시는 것이요, 누구를 세우겠다고 하면 세우시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한나의 기도에도, 드보라의 기도에도, 마리아의 기도에도 나온다. 하나님의 반전에 대한 성경의 일관된 주장이 기록되어 있다.

(2) 히브리서의 수신자인,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믿어서 고난을 받고 있는 히브리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로마정권의 정치적 사회적 핍박을 받고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동족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배신하는 신성모독이요, 민족적 배신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답을 하고 있다.

예수가 누구인지 아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1) 우리는 히브리서가 제시하는 이런 질문들 때문에 구원문제를 좀 더 깊이 있게 현실에 답이 되도록 정리할 필요가 있다.

(롬3:21~26)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뜻은, 먼저 하나님께서 율법이외에 첨가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뜻이다. 율법은 잘 잘못의 문제이다. 잘하면 복을 받고, 잘못하면 벌을 받았다. 예수는 여기서 하나 더 나아간다. 은혜인 것이다. 은혜로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다. 잘못한 자들에게 벌을 주는 대신 잘해야 받는 것보다 더 큰 보상을 주는 것인데 성경은 이것을 구원이라 하고 있다.

구원은 다만 벌에 대한 면제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자 하나님은 구원을 주신 것이다. 성경은 죄를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논하지 않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면에서 논하고 있다. 성경은 죄를 인간의 잘못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치지 않는다. 인간이 영광되고, 놀랍고, 기쁜 것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을 죄라고 규정한다. 다시 말해 죄를 안 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가 가로 막아 인간이 갔어야 할 창조 본연의 세계로 못가는 것을 죄라고 다루고 있는 것이다.

(2) 이 일은 율법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반전이며 어떤 파격이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얘기한다. 예수를 보내어 믿음이라는 방법으로 영광을 만족시키고 완성하고 충족시키겠다는 것이며 이것이 구원이다. 잘 잘못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되면 가치 있는 일이나 영광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고 배웠다. 그러니 구원이 옛날에 지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는 정도에서 그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원래 하나님의 목적이었던 영광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이것은 은혜이다. 은혜란 본래 일방적인 것이다. 용서와 회복을 조건과 자격 없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풍성한 은혜를 은혜라고 바로 말하지 왜 믿음이라는 말로 돌려 말하는가?

우리는 믿음을 생각할 때 믿을만한 것에 기대를 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믿음을 하나의 보험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은 책임 있는 반응이라는 것이다. 책임 있는 반응이라고 말하면 은혜가 설자리가 없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한다. 은혜라고 그래 놓고 왜 책임을 묻는가? 은혜는 먼저 구원을 주지만 그 후에는 우리에게 책임 있는 반응을 요구한다. 그러니 은혜는 시작이다. 그리고 은혜의 목적은 책임이다. 책임은 조건으로서 작용하지 않고 결과로 작용한다.

우리는 어둠속에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반전이 되어 영광의 세계로 나왔다. 그러니 우리가 현실을 살 때 어떻게 죄를 안 짓고 잘 살 것인가에 머문다면 대단히 소극적인 일이다. 하나님 없는 자들이 어떻게 비겁하게 사는 가를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만들어 준 것이 무엇인가를 구체화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만이 세상의 빛이고 생명이고 진리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명예로운 자가 받을 수 있는 기회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어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불러내심으로 하나님다움을 스스로 증명하셨다.

라. 구원받은 자의 실력

(1) 좋은 학교 다닐수록 공부는 힘이 든다. 우리는 은혜로 받은 기회 속에서 매일 책임감 있는 자로 실력을 쌓아 가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이 쉽지 않고 힘이 들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은 이 길을 가게 하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네가 못났던 과거가 교훈이 되며 네가 훌륭해 지는데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 얼마나 인성을 훌륭하게 만드는지 우리는 10대 때는 모른다. 인내와 성실과 반복되는 훈련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생 60이 넘어서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인간은 이 시간을 뒤돌아보면서 누구나 후회를 하고 있지만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 과정이 일을 했던 것이며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만들어져 갔다. 그러니 이 시간을 후회하거나 털어버리려 하지 말라. 그때는 못 만들었지만 그 후회가 지금의 현실을 잘 만들어야 된다.

(2)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오셨다. 우리가 만회할 수 없고, 회복할 수 없고 성취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보내어 가능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먼저 선포하셨다. (요3:16)

그러니 구원은 성취가 아니라 선포이다. 보상도 아니다. 우리는 왜 믿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이 있다. 우리의 인생에 예수가 오셔서 만들어 낸 창조, 구원, 용서, 부활, 영광을 이루어 내야 한다.

(요13:34)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주셨다. 이것은 강요도 공갈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명예이다. 예수를 믿지 않고는 사랑을 할 수 없다. 사랑이란 하나님에게만 있는 속성이자 특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니 하나님의 유전자가 없이는 아무도 사랑을 할 수 없다. 세상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갈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세상의 유행가 제목에도 이런 갈증이 비쳐지고 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필자 주: 가수 태진아를 아십니까? 옥경이라는 대표곡이 있지요. 좋아 하냐구요. 아닙니다. 그런데 태진아가 이 노래를 불렀지요.)

우리 가요에 나오는 사랑은 언제나 비극이거나, 절망이거나, 회한이다. 거기에는 참다운 환희가 없다.

사랑의 참다운 환희는 하나님께 감사할 때만 나타날 수 있다. 이 자격, 이 명예, 이 특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 고백이 없이는 환희가 있을 수 없다. 이 고백은 무릎 꿇어 빌어서 나오지 않는다. 이 고백은 터져 나온다. (엡1:3~6)을 외우셨는가? 찾아서 읽어보자.

어떤가? 굉장하지 않은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위대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 말씀에 비할 수 있겠는가? 사랑은 보상도 아니고 명예이다.

(3)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예수 안에서의 구원으로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이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이 계획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작정하셨다.

그래서 모든 복은 그리스도안에 있으며 모든 사랑의 시작은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은 오셔서 우리와 똑같이 현실을 사셨다. 우리가 삶에서 부딪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장애를 제거하시며 새로운 길을 만드셨다.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가 아니면 안 된다 라는 것은 부정적인 조건이 아니다. 예수가 모든 운명과 가치의 창조자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길을 통과하지 않는 구원이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를 오해하여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어도 천당 갈 사람이라고 표현하지만 전혀 모르는 말이다. 구원은 착하거나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많았는가? 그러니 이제는 더욱 훌륭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잘못한 것이 다만 부끄럽고 후회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그 후회가 감사와 자랑이 될 수 있는 적극적인 위대한 기회가 우리의 오늘에 주어지고 있다.

마. 결 어

(1) 우리의 모든 억울한 조건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사랑이란 그 모든 것 위에 있는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를 봐라. 육체를 입고 오해를 받으며 배신을 당한다. 수치와 채찍이 주어진 후 죽는다. 예수는 이런 폭력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네가 동참하여 이 기적에 증인이 되지 않았느냐? 섬길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큰 것이다. 그러니 네가 이제는 알지 않았느냐?

(2) 우리의 하루는 참으로 감사한 것이다.

(요15:9~17) 사랑한다는 것의 명예를 기억하자. 우리가 예수를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우리를 택하셨다. 잘 믿는다는 것이 안심과 보상으로 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사랑은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사랑 자체가 영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만들고 채우고 키우고 완성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여러분과 함께 일하며 여러분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기적으로 권능으로 임하게 하신다. 여러분의 인생은 바로 그런 인생이다.

3. 에필로그

(1) 이번 말씀 정리가 늦어져 죄송하다. 적어도 박목사님의 다음 설교 전에는 정리된 것이 목사님께 보고되고 교우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데 늦었다. 굳이 핑계가 허락된다면 너무 더웠다. 나는 더위에 강한 편이다. 5월 중순경까지는 내복(얇은 내복)을 입는 게 편하다. 박목사님께서도 가끔은 5월에도 내복을 입으신다. 그런데 이 더위에 강하다는 것도 섭씨 38도 정도까지였나 보다. 기온이 39도를 넘자, 일상을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 일탈이 왔다.

(2) 모세는 가나안 땅에 거의 다 왔었다. 그런데 두 번째 므리바 사건에서 그만 참지 못하고 화가 폭발했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반석을 후려쳤다. 이 일로 모세는 그토록 가고자 했던 가나안 땅을 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못했다. 목사님은 시편106편을 소개하시면서 모세가 왜 하나님께 그런 벌을 받았는가를 설명하신 적이 있다. 33절을 보면,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목사님께서는 이 부분을 쉽게 설명하신다. 모세가 화가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자면 심한 욕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편을 드셨다. 너 왜 내 자식들에게 욕을 하냐?

(3) 나는 잘 이해가 안 갔다. 시편 90편은 정말 멋진 시다. 모세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 시에서 잘 나타내면서 하나님께 거의 떼를 쓰고 있다. 90편의 요점은 이렇다. 하나님 이 못난 백성들(모세는 자신을 포함시킨다.)을 위해 그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던 것입니까?

그리고 모세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런 백성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복을 듬뿍 더 주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까지 이해한 지도자는 없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한 번의 실수가 있다고 해서 단호히 벌을 주셨다. 왜 일까? 최근에 목사님의 답을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세우셨으며, 관심의 초점이 모세에게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더 있으셨다.

모세가 받은 벌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 사랑에 대한 또 하나의 표현이었다. 우리도 하나님께 이런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