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40) 에필로그 (왕상3:3~15)
2018.6.10.(일)
박영선목사

1. 들어가는 글

(1) 이번 주일(6/10) 설교 들으셨어요? 어떠셨어요?

이런 질문에 당신이, 좋았어요, 라고 답을 했다면 미안하지만 당신은 60점이다(D학점). 아주 좋던데요. 65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69점.

(2) 박목사님께서 사무엘이 끝나면 어떤 성경을 강해하실까요? 기대도 되지만 사무엘 이상의 설교를 하실 수 있을까요? 70점(C학점). (참고로 다음 순서는 히브리서이다.)

(3) 목사님, 사무엘을 몇 번 더 해주세요. 80점(B학점).

(4) 목사님 하나님께서 왜 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지 이제 알겠어요. 90점(A학점).

(5) 하나님께서도 피 흘려 기도하시는 예수님에게 더 가자고 하셨군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95점(A+).

(6) 조금 일방적인 평가 아닌가? 그렇다 일방적이다. 본래 박목사님의 설교는 일방적이다.

2. 설교내용

가. 서론
(1) 솔로몬을 이해해야 다윗이 이해되고 다윗을 이해해야 솔로몬을 이해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열왕기상 3장의 이 기록들은 의미가 있다. 솔로몬은 서구 역사상 최고의 영화를 누린 왕이다. 솔로몬은 부귀와 영화에 대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솔로몬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이웃 나라들과 정략결혼을 많이 한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우상이 들어오게 되고 이스라엘 전체에 퍼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매우 진노하셔서 솔로몬 사후 아들 대에서는 이스라엘이 둘로 나누이게 된다.

(2) 솔로몬은 왜 우상을 섬겼는가? 하나님께서는 어떤 죄 보다도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질투하시고 진노하신다. 우상이란 타협을 말한다. 어떤 타협인가? 하나님의 목적에 못 미치는 인간의 최선 또는 최대치에서의 타협을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운명과 가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100점짜리를 만들고 싶어 하시는데 인간은 20점짜리에서 만족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솔로몬이 부귀영화에 만족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의 기도는 어떤 형편에 머무르거나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만족하고 타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의 태도에 격분하신다. 그래서 고난이 온다. 안심하면 쳐들어오는 것이 고난이다. 왜 고난이 오는가? 지금의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건 우상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우상이란 안심이고 형통이다. 우리가 안심에 주저앉아 있거나 형통에 만족하고 있으면 틀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살아 생전에는 안심과 형통이 성경적 완성에 갈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지금은 훈련받는 기간이며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고난은 안심을 깨려고 오는 것이다.

나.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1) 예수를 믿었는데 왜 답이 없는가? 왜 어려운가?
우리 인생에 대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는 최소한의 만족으로 타협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거룩하신 분으로 영광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신다. 이것을 우리가 감사로 확신으로 화합하기 전에는 타협은 없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도 마찬가지로 하셨다. 다윗의 전반기 인생에서 보여 지는 그 여러 가지 훌륭한 일이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타협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밧세바 사건을 통해 다윗을 깨신 것이다. 그러니 밧세바 사건은 다윗에게는 십자가가 된 것이다.

(2) 우리는 우리의 소원과 만족을 위해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끌어 내리고 있다. 이런 믿음은 샤머니즘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한 인간의 가치, 신분, 운명을 만들고 그것을 실현하고 훈련 받고 실천해 보는 기가 막힌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기계이거나 소모품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 되게 만들어져 가는 존재이다.

우리는 다윗이나 솔로몬에게 왜 그랬어? 라고 묻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우리의 신앙을 소극적으로 만든다. 죄를 안 짓고, 욕 안 먹고, 교만하지 않는 것을 신앙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명예롭고 영광된 것을 찾지 못한다. 명예롭고 영광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반가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 이웃에게 내가 경쟁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라는 정도가 아니라 나를 보면 내 이웃이 살맛이 나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나이고, 너이며, 모여서는 우리가 되고 인생이 되며 역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살지 못하고 소극적이 되어 소원도 최소한으로 줄인다. 그 결과 우리 기도는 결국, “하나님, 다시 찾아 올 필요가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가 되고 만다.

(3) 요나를 보자. 요나는 이스라엘의 주적인 앗수르에 가기 싫어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앗수르를 회개 시키라고 하시자 요나는 스페인으로 도망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요나는 다시 기도한다. (욘2:4)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꺼내시고 니느웨에 가게 하신다. 요나는 하루 동안 회개를 외치고 그 후에는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은 왕으로부터 백성까지 하나님 앞에 회개를 했고 하나님은 심판을 거두셨다.

요나는 이렇게 된 사실에 화가 났다. 요나는 하나님께 대든다. 하나님 이러니까 제가 처음부터 오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대답하신다. 요나야. 너는 너를 가려주던 박 넝쿨 하나만 있어도 네가 이것을 아꼈는데 이 성에는 좌우를 분별 못하는 십 수만 명의 사람과 가축이 많다. 내가 어떻게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겠느냐?

이 요나 이야기의 순서를 보자.

요나는 하나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하나님 앞에 신앙을 고백한 자와 고백하지 못 한자 속에서 자신의 최고의 신앙 고백을 했다. 하나님은 그런 요나에게 용서라는 자리까지 더 가야 한다고 잡아끄신 것이다.

니느웨가 심판을 받느냐 안 받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더 크게 요나라는 선지자가 자신이 맡은 사명에서 하나님의 정의로움과 긍휼하심이 어디까지 보여 질것인가 하는 것이 더 문제가 된 것이다. 회개하는 자 뿐만 아니라 회개를 하지 못 하거나 회개할 자격이 없는 자에게까지 하나님의 긍휼이 확장된 것이며 요나는 거기까지 끌려간 것이다.

무엇이 이 일을 하는가? 고난이 한다. 그렇다면 고난이란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는 장벽과 한계이다.

(4) 이것이 신자들을 괴롭히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가자고 하신다. 더 가자고 하는 말씀 앞에는 다윗에게서 보았던 것처럼 진심, 도덕성, 최선, 헌신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과 수준과 의도는 이런 것들과 비교할 수가 없다. 우리가 이것을 감당을 못하니까 우리는 계속 작은 것에 만족하면서 산다. (빌3:4~9) 이러한 바울의 고백은, 내가 예수를 몰라서 신자들을 박해했다가 예수님께 혼이 나고 돌아섰다, 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 나는 내 진심과 최선을 가지고 행동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막았다, 라는 고백이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보라.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비켜 주시옵소서, 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대답하신다.

아니다, 더 가자. 이게 십자가다.

(5)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넘어 가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알고 있는 최선은 권력과 승부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외면했고 지금까지도 외면하고 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최고의 권력과 하나님의 권능은 얼마나 다른 것인가? 자신의 최선에 안주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곳까지 우리를 불러내신다. 성경에는 이 이야기가 수없이 반복된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집에서 끌려 나왔고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붙잡혀 나왔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모세에게 불평했다. 왜 우리를 데리고 나왔는가? 지금 우리의 불평과 똑같지 않은가? 왜 나를 젊어서부터 믿게 했는가, 라고 하지 않는가? 그 긴 시간이 가지는 명예와 영광을 모르는 것이다.

C S 루이스는 학교에서 그리스어를 배울 때 많은 고생을 했다고 술회한다. 그러면서 그는 나중에 고백하기를 그리스어를 알았기 때문에 고전들을 읽을 때 고전이 주는 깊은 맛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고 계시는 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는 것은 불평과 불만에 가득할 수밖에 없고 반복되는 삶이 벌로 느껴질 것이다. 결국 바울의 말은 내가 그전에 알았던 것은 인간의 최선이었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과 비교하면 그것은 배설물에 불과하다, 라는 말이다.

(롬11:25~32) 이스라엘이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본래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이스라엘에게 넘치는 은혜를 주사 그 은혜가 넘쳐서 이방에 까지 흘러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수를 믿지 않았고 은혜를 받는데 실패했다. 그러면 당연히 흘러갈 것이 없지 않은가?

성경의 설명은 이렇다. 이스라엘의 실패로 복음이 이방에 넘어 갔다면 이것이 인간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느냐? 이것이 은혜이고 긍휼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나 역사는 2,000년 내내 저것들은 안 믿었고 우리는 믿었다고 이스라엘을 괄시했고 이것으로 자기 확인을 했다. 이것은 기독교인에게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주지 못하고 원망하고 비난하고 정죄해서 자기를 확인하는 버릇을 키워 주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잘못 가면 공포가 온다. 반대로 잘 가면 감사가 있다.

이스라엘은 왜 아직 안 믿는가? 구원은 스스로의 만족에 빠지지 않게 하나님께서 계속 우리를 더 나아가자고 독려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지금도 두들기시고 독려하시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인류에게 묻고 계신다. 역사는 왜 이 꼴이냐? 너희는 답이 있느냐? 너희가 이룬 업적이 진정한 가치가 있느냐? 하나님의 이 물음에 대해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모든 제국이 무너지고 모든 제도가 눈물로 끝이 나고 모든 인생이 다 허망한 결과를 남김으로써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역사 속에서 우리를 부르신다. 다만 선물을 한번 주고 만족하시지 않는다. 훈련시키시고 하나님 자신이 목적이 되도록 성실하게 일하고 계신다. 훌륭해 질 수 있는 기회가 매일 있고 어디에나 있지만 우리는 하지 않는다. 이제는 해야 된다.

다. 결어

로완 윌리암스는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다는 증거이며 우리가 기도에 응답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새로운 것으로 답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없었던 것 아닌가? 창조의 하나님이 새로운 것을 창조 하시지 않겠는가? 부활의 하나님이 죽었던 것을 살려서 답을 하시지 않겠는가?

3. 에필로그

(1) 내 신앙의 문제가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이거나 큰 것을 고백하라고 한다면 나는 내가 받은 만큼 꼭 돌려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짐작하시겠지만 한 대 맞으면 반드시 한 대를, 한 번 억울한 일을 당하면 반드시 앙갚음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표현이 약하다. 그래야 살아갈 수가 있다.) 그래서 내가 로마서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롬12:19 (원수를 갚지 말고 내게 맡기라) 같은 구절이 나오면 슬쩍 피하거나, 매우 좋은 말씀이다, 라고 덮어 버린다.

(2) 이 버릇은 나이가 들어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와 집사람의 기도제목이기도 하다. 최근 박목사님께서 지시하신 교회 일을 하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나는 한 가지 일을 맡으면 어떤 결론이든 결론이 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성격인데, 교회 안에는 일이 커지거나 번거로우면 그만 하자고 얘기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평을 목사님께 했다. 목사님 상황이 이런데 불러서 주의를 좀 주세요.

이집사. 그 사람을 기죽이려고 하지 마, 그렇게 안 해도 나는 이집사 편이야. 계속 열심히 해. 이번에 나는 성질나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지는 못했지만 박목사님께는 맡겼다. 속이 시원하냐구요? 아닙니다. 절대.

그러나 목사님의 말씀이 맞다고 수긍한다. 세월이 지나면(다음 번 케이스 때에는) 하나님께 직접 맡길 수 있어야 할 텐데. 기도해야겠다. 생각나실 때 기도를 부탁드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