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을 통해보는 젊은 목회자들을 위한 기독교 신앙의 통찰(4)

2018. 4. 26(목)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2018. 4. 5(목)부터 4. 26(목)까지 4회에 걸쳐 우리 교회에서 위와 같은 강의가 있었다. 제목이 조금 길지만 강의의 핵심은 다윗이 왜 은혜의 대표자인가 하는 것이었다. 요즘 우리 교회가 듣고 있는 사무엘 설교의 클라이맥스이기도 해서 더 관심이 있었다.

(2) 목회자들을 위한 강의여서인지 역시 더 깊이 있는 내용을 강의하셨다. 그러나 남포교회 교인들에게는 조금 쉬울 수도 있었다. 용어나 비유나 강조점들에서 우리가 자주 들었던 내용이니까.

(3) 지난번 코멘트에서 얘기했지만 박목사님을 풀어놓으면(죄송합니다) 그 결과는 넘치는 은혜로 온다. 목회자들에게는 그들이 있는 그 자리에서 현실과 싸움을 하도록 더욱 독려 하신다. 목사님은 깊은 물이라 생각하여 겁을 내는 후배들을 해병대가 하듯 배타고 나가 물에 던져 넣지 않고, 나를 봐라 내가 걸었다 라고 이해시키면서 매우 부드럽게 그러나 쉽게 손을 빼지는 못하게 이끌고 가신다.

(4) 전체 강의 내용은 정리하는 분이 계시니 볼 기회가 있을 것이고 나는 오늘 은혜가 넘친 부분을 소개하겠다.

2. 강의내용

가. 탕자의 비유(눅15:11~32)
(1) 이 비유를 이렇게 쉽게 설명하셨다. 이 비유는 돌아온 작은 아들에게 초점이 있지 않다. 오히려 큰 아들을 통해서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는 말한다. 큰 애야, 네 동생이 집을 나갔다가 돌아 온 것이 뭐가 자랑스러운 일이겠느냐? 그러나 잃었던 아이가 돌아왔으니 축하할 일 아니냐? 그래서 잔치를 열은 거란다. 네가 섭섭하다는 말 이해는 한다. 그러나 너야 말로 항상 내 옆에 있는 신실한 아들이 아니냐? 이건 축하할 일이 아니라 감사한 일이다. 네 동생은 지금부터 새롭게 너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네 동생이 어찌 너를 따라올 수 있겠느냐? 나는 네가 있는 것이 자랑스럽고 믿음직하고 큰 의지가 된다.

(2) 이 비유가 이런 뜻이라는 말씀이다. 어떤가? 설교만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비유도 진화하고 있다. 그리고 탕자의 비유가 머릿속에 매우 선명하게 새겨졌다.

나. 겸손이란 무엇인가?

(1)한 사람이 피가 마르게 창피한 상황을 경험하지 않으면 겸손이라는 성품을 얻을 수가 없다. 이러한 수치를 겪고 나면 하나님께서 부활의 생명으로 겸손을 주신다. 그러니까 겸손은 하나님께서 다시 창조 하셔서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는 성품이다.

(2)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겸손은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겸손을 떤다고 표현한다.

(3)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일부러 수치를 겪게 하시고 그 사람이 진심으로 회개하면 겸손을 주시는 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초보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수치를 허락 하시는 이유는 수치가 그 사람의 한계를 깨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가두었던 한계가 깨지면서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때 은사를 주신다. 한계 안에 갇혀서 은사를 거부하는 인생에게 하나님은 은사를 강요하시지 않고 그 한계가 깨지기를 기다리신다. ( 이 3항은 필자의 해석이다.)

(4)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때로 그릇을 깨고 새로운 그릇에 보배를 담으신다. 그릇이 깨지는 건 아픔이지만 두려워 할 것은 없다. 그릇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릇이 깨지는 것을 알았겠는가? 그릇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1) 믿음은 아브라함의 생애로 증명된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 했느냐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자기의 삶에서 얼마나 헤매었는가, 그리고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끌어 오셨던 가로 증명이 되는 것이다.

(2) 기독교 신앙이란(믿음이란) 이렇게 긴 시간 속에서 한 존재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길이다.

3. 에필로그

(1) 이런 강의가 목회자들만을 위해서 있다는 건 정말 말도 아니다. 몰랐으면 모를까 이제 알았으니 우리도 봄 가을로 교인들을 위한 박목사님의 특강을 준비해야 한다.

(2) 말로 그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있다. 자신 있다. 그러나, 이 강의야 말로, 와 보라이다. 일단 들어 보면 이유를 설명하려는 내 입을 여러분이 황급히 두 손으로 막을 테니까. 목사님의 강의는 당회의 결정, 예산, 장소, 시간, 대상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강의가 될 것이다.

(3) 이 강의가 끝날 무렵 박목사님께서는 약 10분정도 질문시간을 주신다. 이 질문시간이 너무 재미있다. 수강생들이 어떤 질문을 한다. 대개는 천하의 박영선을 의식해서 조심스럽게 말하고 그러다 보니 질문이 길어진다. 가끔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무식한 질문도 있다.

질문이 어떠하든 박목사님께서는 이것을 정리해서 다시 물어 보시는 법이 없다. 보통은 이렇게 하지 않는가?

“질문을 요약하면 이런 뜻이지요?”

“이런 부분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지요?”

이런 게 전혀 없다. 그냥 답변이 미사일 날아가듯 날아간다. 지난번에 이 상황이 재미있어서 농담을 드렸더니 대번 이렇게 말씀하신다.

“ 내가 강의 내용을 외워 오거나 베껴 오지 않았다는 뜻이야.”

물론이다. 목사님은 당신께서 하시는 강의 내용도 당연히 알고 계신다. 그러나 더 재미있는 건 같은 수강생이 들어도 잘 모르겠는 질문의 내용을 단번에 알아들으시고 번개 같은 답을 하시는 것이다. 보통은 길게 답을 하시지만 어떨 때는 민망할 정도로 짧다.

“ 아 그거 다음 주에 해요.”

“ 아직 잘 모르죠?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요.”

“ 당연히 잘 안되죠”

백미는 이런 답변 이었다.

“ 다음 분은 좀 좋은 질문 하세요.”

나는 겁이 나서 질문은 못하고 이렇게 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