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무 엘 (36) (삼하22:1~32)

2018. 4. 15(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사무엘을 설교하시기 전 박 목사님께서는 이사야를 하셨었다. 물론 이사야도 다시 보는 이사야였는데 부제가 멋있었다. 하나님의 비전.

(2) 원래 박 목사님께서는 비전, 환상, 꿈 등 이런 단어를 안 좋아 하신다. 그 단어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냐 마는 한국 교회가 그 동안 그런 단어들을 앞세워 신앙을 오도한 책임이 있다고 보시는 것은 틀림없다.

(3) 언젠가 어떤 목사님께서는 요엘서 2장 28절을 본문으로 설교 하신 적이 있다.

“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여기서 이상이라는 단어를 영어 성경에서 보면 Vision이라고 번역된 판이 있다. 그래서 그 목사님께서는 말씀 하시기를 성령이 젊은이들에게 임하시면 젊은이들이 비전을 갖게 될 것이다, 라고 하셨다.

물론 그 목사님께서는 비전을 해석하기를 긍정적인 의미의 미래상이나 전망으로 해석하시고 설교하신 것이었다. 평소 다른 목사님에 대해 잘 말씀이 없는 박 목사님이시지만 어느 날 새벽 기도 설교에서는 날카로운 말씀을 하셨다. 본문을 보고 또 앞뒤의 문맥을 보면 여기서 이상(Vision)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한다는 것이다.

(4) 정리해 보겠다.
젊은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자신감과 어떤 희망적인 계획을 갖게 될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젊은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어느 쪽 해석을 따르겠는가? 나는 오랫동안 희망적인 계획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새벽기도 설교 이후 하나님의 말씀에 무게를 두고 있다.

2. 설교내용

가. 서론

(1) 삼하 22장의 다윗의 찬송은 삼하 7장쯤에 있어야 되지 않는가 싶다. 7장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 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 라고 되어 있고 22장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시인데 내용으로만 보면 다윗이 편안해 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때니까 이 찬송시가 7장에 있어야 할 것 같다는 것이다.

(2) 삼하 7장에서 22장까지 15장이나 되는 성경을 보면 여기에는 다윗이 자랑할 만한 내용이 없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밧세바 사건이 있다. 밧세바 사건은 다윗이 했던 모든 업적과 위대함을 단번에 뒤집어 버렸다. 밧세바 사건은 다윗에게 오점이며, 수치이며 절망이었다. 밧세바 사건 이후에는 살육이 반복될 뿐이었다. 따라서 22장의 찬송은 보이는 승리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윗은 부끄럽고 민망한 자리에서 갑자기 22장의 포효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니까 22장은 다윗이 사울을 이겼다거나 하는 정치권력의 싸움이거나, 블레셋을 이겼다는 국력의 싸움이라고 보기 어렵다. 22장의 승리는 보이는 어떤 승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떤 승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눅1:67~75)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정치지도자가 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인류의 운명, 인류의 정체성, 창조의 목적을 위해 오셨는데 즉 구원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원수나 미워하는 자는 이 구원을 방해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구원은 다윗의 집에 심으셨고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이었다. 이 때문에 다윗은 중요한 인물이 된다.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는 예수에 대하여 우리는 다윗의 생애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나. 성경이 가르치고 싶어 하는 다윗의 생애

(1) 다윗의 승리는 다만 정치와 권력의 승리가 아니라 영적 승리에 대한 고백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흥미가 없는 것은 우리가 영웅성과 세상에서의 승리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운명과 정체성이 얼마나 큰 것인가에 대한 기독교의 약속에 대해 우리는 별 관심이 없다.

삼하 7장으로 다시 가보자.(삼하7:2~13) 다윗은 평안해 지자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을 짓고자 했다. 다윗 왕권의 영원함은 다윗의 실력이나 헌신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해 준일에 대해서 보상하라고 한 적이 있느냐?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이냐? 모든 일은 내가 하는 것이다. 나만이 무엇을 만들 수 있고, 줄 수 있고, 가치 있게 하고, 승리하게 한다. 너희는 못한다. 내가 네 나라를 영원하게 하고 네 왕권을 견고하게 하겠다.

이것이 삼하 7장의 내용이고 다윗의 생애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에게 밧세바 사건만 없었다면 하는 가정을 자꾸 함으로써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합하는 다윗을 선택하시고 일을 합작해서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을 부러워한다. 다윗 같지는 못해도 다윗 같은 위대한 생애를 소원함으로써 자신의 부족함이나 자책을 변명하고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의 가치는 골리앗을 물리치거나 성전을 짓겠다는 진심에 있지 않고 밧세바에 있다고 찌르고 있다. 성경은 자책하고 회개하여 벗어나려는 우리에게 밧세바 사건이 없었다면 다윗의 생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선언한다.

(2)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삶에서 밧세바를 통해 도전하심으로써 어떤 일을 하신 것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일 하심은 우리의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도 당연히 밧세바가 있는 것이다. 밧세바 사건은 무엇을 남겼는가? 당연히 수치다. 그러니 그 수치는 다윗에게 깨달음을 주었는데, 다윗은 자신에게 진실은 골리앗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범죄 했다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시51편)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이 사건을 회개한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회개를 했다. 내 어머니가 죄악 중에 나를 낳았고 내 죄는 나의 본성입니다. 내 진실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이것이었다.

“ 나는 제사를 원하지 않으며 내가 구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상한 심령은 바로 수치였으며 수치의 결과는 우리에게 절망으로 나타난다. “ 나는 못 났어. 나는 가치가 없어. 내가 아무리 착해도 그런 과거가 있는 한 이 상처를 씻을 방법은 없어.” 이게 바로 사망이다. 사망이라는 것은 헛되다는 것이고 그러니까 죽으라는 것이다.

(3) 예수께서 오셔서 원수를,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대적하신다. 헛되고 부끄럽고 없어지고 말 인생을 예수님은 있게 하시며 있는 자가 가지는 영생과 영광과 승리를 약속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수치 때문에 절망하고 절망해서 인생을 얼버무리면서 살고 있다. 이 체념의 자리를 뒤집고 나와야 한다. 이 자리를 뒤집는 문제는 참으로 어렵다. 어렵기 때문에 성경의 수많은 약속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절망을 구원과 영광의 문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책과 체념으로 주저앉아 버린다.

로완 윌리암스는 이렇게 말한다.

“ 신자들에게 정말로 끔찍한 일은 우리가 실패에 안주하기로 마음먹고 끝끝내 냉소와 절망에 무릎 꿇는 것이다.”

다. 신자의 현실

(1) 우리는 교회 안에서 우리의 진심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는다. 꺼내 놓으면 위로를 받지 못하고 비난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부끄럽다는 생각을 먼저 한다. 우리의 실력으로는 비난을 먼저 하지 위로를 먼저 하지 못한다. 여기가 바로 우리의 원수이며 사망이다. 다윗이 이긴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다윗은 우리가 모두 공감하는 영웅성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당한 절망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었듯이 우리를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어 우리에게 무엇을 하고자 하셨는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세계로 문을 열게 된다. 그러니 우리에게 절망도 후회도 수치도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한계를 깨게 했다는 것과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문을 열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2) (엡1:~6)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영광된 자리로 인도하는 것이며 우리로 항복하게 하는 것이며 찬송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조건이나 방법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대상이고 목적일 뿐이다. 그 일은 예수 안에서 일어났고 우리 마음에 일어났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을 깨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세상이 깨어지면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 속에서는 하나님께 우리가 받은 것이 오히려 무익하다고 생각되고 거기서 비롯되는 절망을 맛볼 수밖에 없다. 이 절망이 없다면 우리도 다윗처럼 모든 것이 평안해 졌을 때, 하나님의 전을 짓겠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도움을 받으시지도 않지만 우리가 존재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기뻐하고 찬송하며 그러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 바로 창조요 부활인 것이다.

우리의 갈등과 위협과 도전, 그리고 그것 때문에 빚어지는 우리의 절망과 수치, 체념이야 말로 기독교 신자가 열과 성을 다해 뛰어 들어가야 할 세계이며 인생이며 기회이다. 우리는 여기에 가지 않고 끊임없이 과거를 씻어 내거나 회개하기 때문에 성경은 다윗의 생애를 밧세바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니 밧세바가 고마울 뿐이다.

라. 결 어

(1) (롬8:1~2) 신앙은 안심이 되고 기쁘고 즐거운 일의 연속은 아니다. 세상은 이것을 약속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것을 벗어나는 큰 존재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한계와 타협을 깨시려는 것이고 여기에는 고통과 실패와 환난과 부끄러움과 눈물이 따르게 마련이다. 하나님이 구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며 이것을 통해 우리는 세상과의 관계를 끊는다.

(2) (히11:17~19)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약속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약속이 아브라함의 헌신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기적위에 있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자식을 쉽게 주지 않으셨다. 아브람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마도 그때 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잡아야 될 아들이라면 왜 낳게 하셨으며 낳은 다음에는 왜 잡게 하셨으며 잡으려고 했더니 왜 살려 주셨는가?

나는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며 죽은 자를 살린다 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삭을 통해 이루시면서 한번 더 강조하신다.

하나님 “ 이삭은 아브라함이 나을 수 없는 후손이었다. 아브라함이 만들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러니 이삭은 필요 없거나 없어도 될 존재 였다. 그렇다면 죽여도 되는 것 아니냐? 알아들었느냐? 아브라 함. ”

아브라함 “ 알겠습니다.”

하나님 “ 알았으면 되었다.”

그러면 왜 이삭을 살리시는가? 이삭은 없는 것의 실체이다. 바로 여러분이다. 여러분은 없어도 되지만 있게 함으로써 없어도 되는 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와 약속이 충만해진다. 그러니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 대해 실망하거나 절망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 나는 없어도 되는 존재지만 이렇게 있으니 내 속에는 창조와 부활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잘못했으니 죽어야 돼 라는 생각은 우리를 속이는 자의 생각이다.

3. 에필로그

(1) 분명히 박목사님의 설교는 진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33년 동안 수 없이 여러 번 다윗에 대한 설교를 해 오셨지만 이렇게 다윗을 완전히 뒤집어 엎으시고 따라서 우리도 덩달아 엎어지는 설교는 처음이기도 하고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2) 이사야서를 하실 때에도 1차적, 2차적, 3차적 세계관을 제시하셔서 놀라우면서 신선했다. 그러나 이번 다윗은 그런 표현이 미약하다. 이번 다윗은 우리의 다윗에 대한 환상을 완전히 우라까이 해 놓으셨다. (왜 좋은 말 놔두고 일본말 쓰냐구요? 거친 말 하시는 설교자 밑에는 거친 말 하는 제자가 자란다고 박목사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3) 나는 정말 놀라서 여쭈어 봤다. 목사님. 그럼 다윗이 젊었을 때 썼던 수많은 믿음의 시편과 그 신앙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밧세바 이전이니 의미 없다 할까요? 아니면 나름 가치가 있다고 해야 할까요?

선뜻 답을 안 하시고 다음 주일(29일)쯤 설교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매우 기다려진다. 뭐라고 하실까? 또 우라까이 하실까? 끝.

(* 저자 주: 우라까이 – 본래 일본말이나 완전히 바꾸다 라는 뜻으로 한국에서 가끔 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