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33) (삼하19:1~8)

2018. 3. 4 (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내가 예배시간에 맨 앞자리에 앉는 것은 물론 박목사님 말씀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예배시간에 다른 생각이 들지 않고 오직 목사님 말씀만 들으며 따라가는 것은 큰 축복이다. 어떤 날은 마치 내 기도를 듣고 하시는 것처럼 말씀으로 기도에 응답을 하시고 어떤 날은 말씀 그 자체로 내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신다. (사실은 개운하다로 표현하고 싶었다.)

(2) 몇 년 전 부터 내 자리 옆에 김동현 집사가 앉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름도 몰랐는데 지금은 만나면 반갑고 메일도 한다. 김집사님이 물어본다. 사무엘이 끝나면 어디를 설교 하실까요? 글쎄요 한번 여쭈어 봐야 되겠는데요. 저는 요한복음을 다시 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네 집사님, 설교라는 게 목회자도 즐거워야 되지만 우리도 즐거워야 되니까요. 요한복음을 말씀드려 볼게요.

(3) 예배가 다 끝나고 로비에 잠깐 서 있는데 김집사님이 다시 오셨다. 집사님 목회자도 즐거워야 되지만 우리도 즐거워야 된다는 말씀, 정말 좋은 거 같아요, 그 말씀 꼭 좀 전해 주세요.

설명이 필요 없지 않은가? 예배란 목회자와 성도가 하나 되어 즐거워하는 것이지 않는가? 장로교회는 이렇게 말 하고 싶을 것이다. 예배란 하나님과 성도가 하나 되는 것이라고. 내가 듣기에 같은 얘기다.

2. 설교내용

가. 서 론

(1) 다윗의 생애는 밧세바 사건을 기점으로 전반부는 매우 영웅적이었으며 후반부는 매우 비참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밧세바 사건이 없었더라면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마음이다.

(2) 다윗은 자신의 인생의 절정에서 밧세바 사건을 일으키고 끝없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다윗이 압살롬을 처절하게 부르는 것이 아들을 사랑해서 그런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기의 생애에 대한 탄식
이었는지 우리는 잘 알 수가 없다.

(3) 다윗에게 압살롬의 죽음은 다만 자식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절망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승리와 기쁨과 진심은 이제 다 사라지고 나는 이 지경이 되었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오래 살게 하셔서 이 꼴을 보게 하시는가?

나. 성경의 도전

(1) 시 51편은 다윗이 밧세바 사건을 절절히 회개하고 주 앞에 새로운 사람으로 섰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어떤 말끔한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다윗이 대표하는 은혜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윗의 삶에 나타나는 이 설명할 수 없는 비극은 무엇인지 답을 해야 한다.

(2) (요12:20~26) 명절에 예루살렘에 왔던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아니라 유대교에 귀의한 이방인들이었던 것 같다. 이들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도 공유하고 있고 메시아가 오셨다는 소문도 들었던 것 같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을 때 예수님은 답을 하셨다. 내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메시아인 것을 이제 이방도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메시아 인 것을 증명하고 답하리라, 내가 영광을 얻겠다라고 말씀 하셨다.
어떻게 영광을 얻으신다는 것일까? 죽어서 얻겠다고 하셨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았으나 이해를 틀리게 하고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신자들에게는 늘 있는 일이다.

(3) 은혜의 대표자라고 하는 다윗은 왜 가장 부끄러운 모습으로 그의 인생 후반부에 서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지 보자. 예수님은 누가 메시아냐 하는 질문에 나다 라고 하셨고 그럼 증거를 보이라는 요구에는 그래 내가 메시아의 영광을 증명하마, 내가 죽으마 라고 답을 하셨다.

(4) (사53:1~6) 여기서 성경은 메시아가 어떤 모습 어떤 방법으로 일을 하실 것인가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기독교 교회사에 늘 있었던 질문 하나가 있다.

“ 왜 하나님은 당신 같은 사람을 세워서 일을 하십니까?”

물론 이 질문은 이런 뜻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 조금 나은 사람을 쓰십시요. 그런 소리를 처음 들었던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이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과 적대적인 대척점에 섰을 때 그들은 이런 비난을 했던 것이다. 바울의 외모를 폄하하든지, 말이 어눌하다든지, 질병이 많다든지 하는 것으로 공격하면서 신의 사자라면 최소한의 장애는 벗어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공격을 했던 것이다.

성경은 다윗의 전반부가 아니라 다윗의 후반부에 본문(text)이 담겨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오히려 우리는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5) 이사야 53장이 가르치고 있는 내용은 예수님이 사역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지혜이고 능력이라는 것이다. 다윗이 은혜의 대표인 이유는 다윗이 받은 은혜가 다윗의 삶에 어떠한 보상을 주었는가가 아니다. 다윗이 받은 은혜가 어디까지 담기는가 하는 것이다. 은혜를 받을 만한 자리에서 받은 것이 아니라 다윗이 절망하고 끝이라고 생각했던 자리에서 은혜를 받았다. 우리가 흔히 하는 실수는 인생이 은혜를 받을 받을만한 자와 은혜를 못 받을 자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바로 밧세바 사건으로 깨어져야 하는 것이다.

다. 은혜란 무엇인가?

(1) 우리 모두는 다윗보다 나을 수 없다. 먼저 영웅성에서 그렇고 다윗이 겪은 인간의 존재론 적 죄를 벗어 날 수도 없다. 우리의 가장 많은 죄목은 무지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드셨는지를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구할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의 최선을 들어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우리가 정하고 능력만 하나님께 구하는 우를 범하며 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상이다. 우상은 다만 금송아지만이 아니다. 우상은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창조와 영광의 대상물이 되는 것을 순종하지 않고 타협하고자 하는 생각이 바로 우상이다.

(2) 끝없이 우리는 이 문제를 도덕과 윤리와 유용성과 승리와 성공의 문제로 보고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우긴다. 여기를 하나님께서는 꺾으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바로 이것을 꺾는 것이다. 우리의 최선이나 열심은 종종 예수님을 죽이는 결과를 빚는다. 바울이 바로 이런 잘못의 대표자였다.

(요13:21~30) 배신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그 사랑을 하려면 배신과 십자가를 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배신과 십자가를 넘지 못하면 사랑이 담길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 담길 자리가 없으면 사랑은 오히려 독이 되고 공포가 된다. 사랑은 적개심과 폭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넘어선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3) 사랑은 진심의 극치가 아니다. 이것은 다른 세계의 것이다. 이것은 다윗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이 만들어 내신, 이 세상은 만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십자가의 승리 때문에 우리가 누리게 된 은혜이기도 한 것이다.

(요14:8~12) 빌립은 왜 예수님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시옵소서 라고 했을까? 빌립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사역이 별로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빌립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 기적을 기대했기에 그것을 보여 달라고 한 것이다.

(4) 다윗의 전반부 생애는 후반부 생애에 삼켜지고 만다. 다윗의 전반부 생애에는 아무런 영광과 위대한 것이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 나는 너희의 최선과 헌신에 무엇을 담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창조한 것을 잊지 말아라. 내가 담는다. 그리고 너희를 창조한 것을 예수 안에서 내가 회복 하려고 한다. 그렇게 영광을 심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어려운 인생이라도 다윗의 절망보다 더한 인생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거기까지도 내 은혜를 담을 것이니 너희는 걱정하지 말아라. 은혜가 찾아오는 범위, 자리, 자격에 다윗이 있다.

신약을 시작할 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다윗은 은혜의 대표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기록한다. 이 보다 더 처참한 상황이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은혜는 어디까지인가? 성경은 이를 웅변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러한 기록을 담담히 써내려가고 있으며 다윗은 거기에 고마워하며 서 있는 것이다.

라. 결 어

(1) 인간의 최선과 노력이 극성을 보이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성경의 (마25:14~30) 달란트 이야기는 이야기로 끝나면 안 되고 우리의 현실이 되어야 한다. 달란트 비유의 핵심은 종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에 있다. 여기에서 종은 다만 종이 아니라 동역자의 위치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신이 동역자임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종은 주인과 자신을 상벌의 관계로 밖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2) 우리가 최선을 다해 이루는 어떤 성공, 말하자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승리, 성전을 짓겠다고 하는 종교적 열심 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의 영광을 너희에게 주고 너희로 하여금 영광된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내 아들 딸이 되고 내가 너희의 아버지가 되는 것을 나는 가장 바란다. 그리고 너희와 나는 잘잘못으로 계산해야 되는 관계가 아니다.

(3) 은혜의 범주가 어디까지 일 것인가 하는 우리의 질문은, 우리에게 희망과 기회가 된다. 우리가 가장 잘 못하는 자리에서 우리의 잘못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자책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배우는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하는 말은 이렇다. 얘야 너는 품삯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내 파트너인 걸 네가 모른단 말이냐, 너는 나와 같이 영광을 나눌 존재니라.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말을 우리에게 하시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드디어 우리의 인생을 명예로 이해한다.

(4) 무엇을 넘어와야 은혜가 주어진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유용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가장 못났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무릎 꿇어 우리의 인생과 존재를 겸손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회개이자 헌신이며 성경이 얘기하는 기적이다. 어떤 결과를 만들어야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내려 주셨다고 만족하겠는가? 여기가 시험의 장소이다. 이런 생각은 자신의 생애를 살지 못하고 시험에 지는 것이다. 여기서 일어나라. 기적은 가장 못난 우리가 만들어 낸다.

3. 에필로그

(1) 우리교회 초등 3부를 담당하고 있는 교역자는 강한빛 전도사님이다. 금년에 합신 3학년이시다. 아주 신실하고 착하다. 한번은 설교 중 이런 예화를 들었다. 전도사님은 아이들에게 성찬식을 설명하고 싶었다. 우리 교회에서 어른들이 성전에 모여 무엇인가를 먹으면서 하는 게 뭘까요?

(아이들에게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회식이요.

(전도사님 웃음을 참고 다시 물으셨다.)

아니 그렇게 많이 먹는 것 아니고 조금 먹는 거요.

(이번엔 천재적인 대답이 나왔다.)

분식이요.

(2) 물론 전도사님은 그게 성찬식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얘기하셨다. 아이들의 생각은 얼마나 정직하고 직선적인가? 내가 초등3부 교사를 십여 년 째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3)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어린 생각을 좋아 하시지 않을까?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18:3)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