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식예배 (2018.1.3.(수))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1/3(수) 연초에 했던 성찬식은 참으로 은혜가 있었다. 성찬식에 모범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성찬식을 꼭 정리하여 하나의 모범이 되게 하였으면 하는 희망이 있었다.

(2) 성찬식 말씀의 내용은 엄중했다. 그러나 엄중함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나를 돌아보게 하셨다.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께 너무 많은 것을 주십사고 기도했다. 이제는 이 쓸모없는 나일지라도 누군가를 위해 내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자리에서.

(3) 박목사님께서는 감기에 약하시다. 잘 걸리고 오래 간다. 1/3에도 감기기가 있으셔서 걱정했는데 어느 때 보다 더 강건하게 강단에 스셨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 우리교회는 설교는 100% 홈페이지에 올리고 있는데 이런 예식은 안올린다. 그러나 이번처럼 이런 예식이 중요한 경우도 많다. 목사님들의 예식 설교도 그냥 올려주시면 좋겠다. 이번에는 CD를 방송실에 따로 부탁해서 받은 후 컴퓨터로 못 듣고 CD플레이어로 3시간 이상을 들으며 작업했다.(목사님 좀 하라고 해주세요)

(5) 2017.12.24.(일) 주일 설교, 12.25.(월) 성탄절 설교, 2018.1.3.(수) 성찬식 설교는 이렇게 설명 할 수 있겠다. 우리의 기도(12/24)와 하나님의 응답(12/25)과 그에 대한 우리의 찬양(1/3) 이었다.

2. 설교내용

가. 성찬

(가) 배병

(1) (고전11:23~26)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 그와 같이 잔을 가지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 성찬예식에 담겨 있는 내용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 또 이 구원을 온 세대에 전하기 위해 심판을 유보하시고 시간을 연장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주의 복음이 알려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에는 악과 사망이 아직 심판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죄와 사망의 권력이 그대로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를 구원해 내셨다. 마찬가지로 신자들도 생애 속에서 이와 똑 같은 조건 속에 있으므로 고통 속에서 그 임무를 수행해 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3) 금년에 우리가 한걸음 더 나가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도 몸 찢고 피 흘리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것을 쉽게 헌신, 희생, 각오와 같은 단어들로 묶어 버리지 말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주시기 전 마지막 밤에 제자들에게 이 예식을 정하시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내 몸을 찢는 자리까지 피 흘리는 자리까지 갔다 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해야한다.

(4) 우리의 생활 속에서는 반복적으로 협박과 위협을 당하거나 공포를 겪는다. 하나님은 이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따라 위대한 삶을 살라고 하신다. 이 위대한 삶은 우리의 충성과 죄가 보상받아서 어떤 상이 있으며, 주님을 모르는 악인들을 쓸어버리는 일들이 아니다. 그것들이 최고의 권력을 가진 것처럼 굴며 그러기에 우리는 억울한 정황에 놓이게 되는데 여기서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신다. 그것이 성찬예식이다.

하나님이신 주께서 이 땅에 내려와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우리는 무지와 거부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결과로 더러움, 어려움, 못남이 왔지만 주님은 그것을 받아들이시며 나아가 자신을 내주신 것이다. 주님의 떡을 받고 주님의 잔을 받으면 우리도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우리가 보상 받아야 하고 우리가 승자이어야 한다는 생각을벗어 버리고, 우리가 나라를 구해야 할 것 같은 생각과 교회를 부흥시키겠다는 생각에서 떠나서 우리가 처해진 삶의 현장에서 좋은 말을 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닥치는 매일에서의 원망과 분노, 보복이 현실인데 여기서 좋은 말을 해야 한다 그 실력이 없으면 입 다물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있으므로 세상은 우리의 빛 때문에 보게 되고 세상을 알게 되고 희망을 갖게 되고 격려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여 세상이 빨리 없어져버리고, 빨리 문제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성찬예식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 주가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조건을 살아내야 하며 그것이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영생을 약속으로 받은 자가 세상의 폭력을 어떻게 참고 받아 내는지, 멋지게 굴겠습니다. 누가 하소연을 하면, 고생 했겠구나 라고 하겠습니다. 누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면, 유모어 센스가 있구나 라고 하겠습니다.

성찬예식에 와서 흑흑 흐느끼고 가면 안 된다. 1년에 몇 번 울고 미안해하고 각오하고 감동하고 가지 말라. 현실을 살아내는 실력에서 한걸음씩 전진해라. 그렇지 않으면 성찬예식을 모독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예식에 참여하는 순간부터 올 때 보다는 나아져 있어야 하고 그렇게 돌아가야 한다. 여러분이 빛이고 진리고 생명을 담고 있는 사람이다. 주께서 가셨던 길을 우리에게 넘겨주셨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되라가 그 말씀이다. 그러니 우리는 성찬예식에 와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맞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방법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확인되는 자리가 성찬예식이다.

(5)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자랑이요, 명예인지를 모르면 계속 현실에서 도망가는 수밖에 없고 원망하는 수밖에 없고 설명 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살지 말라. 그것은 비겁한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있어서 누군가가 나에게 기댈 수 있고 누군가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손목이라도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이것은 능력이, 지혜가, 효험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각각의 조건과 있는 형편에서, 우리와 같은 형편에 보내진 우리의 이웃들 앞에서 구원의 문이 되어야 한다. 그 증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부활 승천을 얻은 자의 영광과 소망과 실력을 보여야 한다. 이렇게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

(기도)

(6) (요6:53~5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다 같이 떡을 나눔)

(7) 우리가 예수를 몰랐을 때에도 우리의 삶은 예수로 인하여 유지되었다. 우리가 부르거나, 호소하거나, 자격을 갖기 전에도 주께서는 친히 우리에게 양식이었고 생명이었고 유일한 의미이었다. 주께서는 십자가로 절정을 이룬 그 삶을 누구에게나 허락하사 우리가 주님을 모를 때, 우리가 인생에 참된 책임을 지지 않을 때 주께서는 우리를 책임지고 계셨다. 이런 과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이 떡에 참여하는 것이다. 내가 몰랐을 때에도 하나님은 이미 나의 아버지 이셨고, 나의 구원 이셨다. 나를 구체적으로 만드셨다. 그러니 제 인생과 제 현실은 아버지께서 주신 구체적인 기회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광된 현실입니다 라고 고백 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주님의 뗀 살에 참여하는 것이다.

(나) 배잔

(1) (빌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 주님의 피가 아니라 주님께서 흘리신 피를 나눔으로써 어떻게 주께서 현실적으로 우리의 양식이 되시고 우리를 붙드셨는가, 우리를 살게 하셨는가에 참여한다. 주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 피를 양식으로 주신다. 우리의 표현에도 피 흘리기까지 충성했다 라는 말이 있다. 또는 피 흘리기까지 효도했다, 의리를 지켰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최선, 또는 가장 지극한 헌신을 표현한다.

이런 말들은 우리에게는 지극함이라는 추상 명사로 각인 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더럽고 못난 짓을 하지 마라, 여기 영광되고 명예로운 역할과 자리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참고 용서하고 좋은 말을 하면 사람들이 회개를 한다든가, 감동을 한다든가, 나를 이해한다든가 하는 약속은 없다. 신자가 좌절하는 이유가 이것이며 우리가 잘할수록 세상은 우리를 쉽게 여길 것이다. 무턱대고 언제나 잘해야 된다는 차원이 아니다. 분노하고 저주하고 원망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못난 짓이고 소용도 없다.

(3) 피를 토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것은 그냥 무서울 뿐이다. 여러분이 누군가의 공격을 막기 위해 험하게 굴 수 있다. 이러면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손대지 않을 수 있지만 이 방법은 세상의 방법이다.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보인 선택이다. 자기를 비우고 피 흘려 몸 찢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영광으로 증언하신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설명하시고 인간의 가장 높은 명예가 무엇인가를 설명하신다.

우리가 신자들끼리 모여서 위급함이 없고 시험이 없는 곳에서는 무슨 고난이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각자의 삶에서 매일 부딪치는 현실의 도전 앞에서 이것을 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참다운 실체이다. 이것을 해야 한다. 하면 위대한 것이다.

이런 결심을 마음에 하면 희한하게 눈물이 나는데 감동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것을 선택해야 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실행할 실력이 없다는 갈등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이다. 이제 울면서 때우려는 것은 졸업하자.

다음에 구역에 가면 이렇게는 얘기하지 마시라.

“지난 번 성찬식에 너 꼭 와서 들었어야 해”

이 말을 하지 말고 여러분의 삶을 모범과 영광으로 해내라. 이것은 아무도 보상하지 않는 것일 수 있지만 자신의 영혼과, 인격과 본성에 참다운 자부심을 준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의존적인 것 이상으로, 우리의 기대와 상상과 이해를 상회하는 이 위대 하신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4)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설명하신다. 아들을 보내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모든 생애에 걸쳐 그 아들을 우리의 양식으로 주시는 삶을 각자에게 허락하는 분이라고 한다.

모세는 질문 했다.

“하나님 도대체 지금까지 뭐하시다가 이제야 저를 찾으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대답하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한 적이 없는 자니라.”

모세가 가장 막막하게 생각했던 광야 생활에 대해 하나님은 내가 가장 치열하게 일 해왔던 기간이라고 답을 하신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 있는 원망과 불만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리이며 여러분은 거기서 멋있게 굴어야 한다. 자기 삶을 살아라. 그 다음엔 하나님께 맡겨라. 기독교 신앙은 고함에 있지 않다. 변명에 있지 않다. 믿는 각자의 고백을 요구하신다. 각각의 생애와 현실 속에서 그 항복을 요구하시며 충분한 것으로 우리를 먹이시며 지키고 계시고 인도하고 계신다. 이것이 그의 피에 참여하는 참된 성찬예식이다.

(다 같이 잔을 나눔)

(기도) 끝.

3. 에필로그

(1) 내가 언젠가 본당에서 대표기도를 했는데 예배가 끝나고 한 장로님이 말씀했다. “이 집사님은 참 독기를 하시는군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독특한 기도를 한다는 뜻이란다. 장로님은 한 가지 더 가르쳐 주셨다. 우리 박목사님은 참 독설을 하신다고 했다. 독특한 설교 말이다.

(2) 나에게 박목사님께서는 지난 22년간 똑같은 설교를 하셨는가, 독특한 설교를 하셨는가, 아니면 그저 그런 설교를 하셨는가? 결론부터 말하겠다. 은혜가 넘치는 설교를 하셨다. 변한 게 있다면 목소리가 전에는 보이스 소프라노였는데 지금은 그래도 많이 바리톤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허스키 하지만) 또 있다. 전에는 설교시간에 욕을 마음놓고 하셨는데 지금은 잘 참으신다. 더 있다. 전에는 청중석에서 반말이나 이의를 큰 소리 말하는 경우, 반드시 야단치시거나 대답을 하셨다. 요즘은 자연스럽게 넘어가신다.

(3) 목사님께서 자주 쓰는 설교의 용어, 자주 쓰는 예화, 자주 쓰는 문장들 때문에 내용이 같다고 오해하여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을 잘못 본다면 당신은 정말 불행한 사람이다. 잘 들어보라 날마다 똑같은 설교를 하고 계시지 않다. 똑 같은 결론에 이를 뿐이다. 설교의 결론이 하나님께 안 간다면 누구에게 가겠는가?

박목사님 설교는 22년 전 보다 훨씬 더 깊어졌다. 이사야를 다시 하실 때 너무 은혜가 되고 감격스러워 여기가 박목사님 생애 설교의 정점이거니 했다. 아니었다. 사무엘에 오셔서 설교되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특별히 다윗을 통해 우리를 깨닫게 해주시는 그 은혜. 그래서 나는 포기했다. 미리 박목사님 생애 설교의 정점을 찍겠다는 것을.

(4) 성찬식이 이렇게 엄중한줄 알았으면 성찬식에 참여하지 않는 게 좋겠다구요? 나도 그런 생각이 조금은 들었는데 그 대신 내 기도를 이렇게 바꾸기로 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저에게는 능력이, 지혜가, 효험이 없습니다. 그리고 많이 아픕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누군가가 나에게 기댈 수 있고 누군가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손목이라도 붙잡고 매달리려고 한다면 저는 기꺼이 저를 내어 놓겠습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와 부둥켜안고 울며 하나님 아버지께 매달리는 기도를 계속하겠습니다. 예수님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