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에필로그(1) 엡 1:3~6
2016. 11. 13 (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이사야-하나님의 비전 설교가 50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날, 나는 박 목사님께 간곡한 부탁을 올렸다. 목사님, 이사야의 분량이 너무 많고 이번에 새롭게 이사야를 해석하신 부분이 많아서 아무래도 정리가 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잠깐 생각하시던 목사님께서 선선히 답을 주신다. 그래, 에필로그를 두 번쯤 할게.

(2) 옛날 이사야 설교가 참 좋은 설교였다면 이번 이사야 설교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박 목사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가보지 않은 길을 처음으로 가보셨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새로운 세계관의 제시였다. 인과응보에 머무는 1차적 세계관,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로 전개되는 2차적 세계관, 그리고 은혜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직접 개입하시는 3차적 세계관 등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후레임을 설교가 아닌 성경연구를 바탕으로 해서 정립했다면 훨씬 더 쉬운 일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박 목사님께서는 설교를 준비하시는 이사야 본문 중에서 이러한 것들을 찾아내셨다. 이 세계관들은 일단 발표하면 알아듣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본문 중에서 찾아내고 정립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외람되지만 칭찬을 아낄 수가 없다.

(3) 그런데 오늘 설교는 뜻밖에 우리가 율법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경고가 핵심이었다. 아니 이사야가 그런 얘기였어? 이 의문을 그대로 박 목사님께 여쭈어 보았다. 정확히 그렇다는 답을 하신다.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서 오늘 에필로그를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에필로그는 마감이 아니라 시작이 되었다. 다시 보는 이사야가 책으로 나오면 꼭 이 숙제를 풀어 볼 생각이다.

2.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은 이사야의 핵심 되는 내용을 요약해서 여러분에게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다. 오늘은 율법주의에 대한 이해를 나눔으로써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허락된 인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이사야서의 결론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나.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자

(1) 이것은 강제로 항복을 받는 것과는 다르다. 기쁜 마음으로 항복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항복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핵심이 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다.

(2)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그것을 점검할 때에는 율법을 사용한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책과 회개를 되풀이 한다. 이것은 이사야서에서 확인한 신자의 지위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3) 구원이란 자격을 획득하거나 안심하는 지경을 지나서 책임과 명예로운 선택과 기회를 가지는 신앙생활의 적극적인 실체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실에서 우리의 환경을 바꾸어 주시지 않는다. 믿지 않는 자들과 동일한 현실을 겪게 하셔서 시련과 고난을 당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실까?

하나님의 관심은 나를 고치는 것에 있는데, 그래서 내가 그 모든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에 이르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다. 바울의 신앙고백 (빌 1:20~21)

(1) 세상에서는 살고 죽는다는 것은 극단적인 대조이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에게 그 둘의 차이는 없다. 왜냐하면 신자에게는 살아 있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을 담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죽는 것도 그에게는 하나님이 그의 죽음에 무엇을 담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에 실체가 담기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공허할 뿐이다.

(2) 믿음과 소망과 간절함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응답을 안 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조건 속에 담아 보라고 하시는 것이다.

(3) (롬 7:14~24를 보자) 여기가 성경의 내용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 것이다. ?선을 행하기를 원하나 도리어 죄를 행하는 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 7장을 보자) 나무와 열매의 비유다. 율법이 우리에게 좋은 일 하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그 일을 행할 나무가 아직 안 되어 있다. 여기에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는 비명이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열매를 주겠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의 본체(존재)를 바꾸어 놓겠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열매를 사거나 줍거나 해도 우리는 여전히 당혹감 속에 있게 된다.

(롬 7:25를 보자) 바울은 여기서 감사한다. 감사한다는 것은 답이 있다는 뜻인데, 바울은 아직도 이중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선을 만들고 싶으나 만들지 못합니다 라는 고백을 여전히 하고 있다.

그러나 롬 8:1에서 예수님의 등장으로 이 문제가 해결된다. 우리가 드디어 예수님 덕분에 어떤 나무가 된 것이다.

(4) 예수님이 나무가 된 나의 본체라면, 믿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나를 묶는 접착제인가? 아니면 나의 선택인가?

이 일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재창조다. 첫 번째 창조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것이라면 재창조는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본체로 만드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5) 예수님이 우리의 본체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고전 1:26~31을 보자) 이 구절은 교만하지 말라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소원을 들어주시거나 보상하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하신 것이다.

이것이 창조라는 증거는 우리 속에 있다. 구원받은 우리의 태반이 수준미달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해 내신 구원 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기적이다.

라. 율법주의의 폐해

(1)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얻었는데 다시 우리 안에 근거를 쌓으려 하고 안심하고 확보하려 한다.

(고전 1:30~31을 보자) 내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가 곧 나의 구원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구원은 어떤 조건으로도 성립되지 않으며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어 우리를 재창조 하신 것이다.

(2) 우리는 자랑을 예수 안에서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무엇인가 구별을 하고 싶어 한다. 자신에게 납득이 되게 하고 싶다.(나는 원래 구원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어 라고 하고 싶은 것이다)

(3) 율법주의는 이런 폐해가 있다.

1) 흠을 지우려고 한다.

2) 잘못을 회개하기에 급급하다.

3) 내가 비록 잘못했지만 내 본심은 원래 안 그렇다. 잠깐의 실수였다. 원래는 잘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주는 폐해는 대단히 큰 것이다.

(4) 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회개에만 머물러있고 아무 것도 안한다. 자기의 위치를 확보하려고 이렇게 변명한다.
하나님 내 잘못보다 내 진심이 더 큽니다.

당신이 어제 잘못했는가? 그러면 오늘 그것을 만회하려 하지 말고 오늘을 잘 해보자. 모든 삶의 정황 속에는 잘할 수 있는 기회와 잘못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더욱이 우리는 세상이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십자가, 부활, 기적, 용서, 구원, 믿음, 소망, 진리.

(5)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로부터 24시간을 부여 받으면서 한 번도 멋있게 못살아봤다. 그 중요한 원인은 자책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무슨 싸움을 하겠는가? 권력인가? 자존심인가?

3. 결어

(1) 우리는 할 수 있다. 매일 잘못한 걸 지우러 다니지 말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러 다니자. 율법주의를 벗어나자.

(고전 15:51~58을 보자) 율법은 우리에게 율법을 지켜보라고 한다. 그러나 율법의 본질은 사랑이다. 우리는 못했고 예수님은 하셨다.

(2) (롬 13:8~10을 보자) 율법주의로 가면 율법이 공포로 다가온다. 공포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안심은 공포가 없는 상태이지만 사랑은 공포와 정 반대되는 적극적인 내용이다.

신앙은 적극적인 명예와 위대함의 모험이다. 자기를 내어주고 공포보다 더 큰 열정으로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우리가 처한 어려움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성육신의 자리이다.

4. 에필로그

(1) 이 설교 마지막 무렵에 박 목사님은 질문을 하나 하셨다.

?공포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1초쯤 망설이다 내가 대답했다.

?안심입니다?

?사랑입니다. 안심은 공포가 없는 상태이지만 사랑은 공포와 정반대되는 적극적인 내용입니다?

?아멘?

?그런데 왜 맨 날 앞자리에 앉으십니까??

폭소가 터졌다. 나는 왜 맨 날 앞자리에 앉는 것일까? 앞자리에서는 목사님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중요한 얘기를 하시는구나 하는 짐작을 해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설교에 집중하게 된다. 나는 다음 주일도 물론 맨 앞자리에 앉을 것이다. 박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날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박 목사님도 늙어 가시고 나도 따라서 늙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가끔은 이렇게 유쾌한 조크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