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 남포교회 한성윤 목사 설교

요 2:1~11
2016. 10. 30 (일)

1. 들어가는 말

(1) 우리 교회에 가끔 외부 교역자님들이 오신다. 한결같은 불만은 교인들이 설교 도중에 전혀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아멘도 안하고 표정도 무표정이고.

아멘의 부작용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일까? 하긴 어떤 설교를 들어보면 1시간 설교에 거의 전 교인의 아멘 소리가 몇 십번이 나온다. 그래가지고서는 설교를 어떻게 들을까?

나는 1996년에 남포교회에 처음 왔다. 그전까지 송파에 있는 감리교회 권사로(감리교는 남자 권사가 있다) 13년 동안 다녔는데 첫날 예배에 참석했을 때 깜짝 놀랐다. 너무 조용했다.

몇 주가 지난 뒤 나는 담임목사님(박 목사님)께서 아멘을 별로 긍정적으로 생각 안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순전히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생각을 정리하고 한 번의 예배에서 한 번 이상은 아멘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후 지금까지 나는 대예배시간에 한번 또는 두 번의 아멘을 큰 소리로 한다. 처음엔 생각하고 했지만 지금은 저절로 이다. 가끔 박 목사님께서도 물어 보신다. 오늘 어디서 아멘 해야 할지 어려웠지? 그런 날은 100번에 한 번이나 있을까? 나는 이제 박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언제, 어디서 아멘을 해야 하는지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멘 소리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간다.

(2) 나성 남포교회의 한성윤 목사님이 나는 초면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자, 이런 생각이 처음 10분은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30분은 집중해서 들었다 그리고 한 목사님의 설교도 정리를 해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목사님께서도 우리 교인들의 반응 없음에 적지 아니 당황하시는 것 같았다. 한 목사님, 반응이 좋았던 날입니다. 박 목사님이 설교하셔도 저희 교회는 별 반응이 없습니다.

2.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은 유명한 가나혼인잔치에 대한 것이다. 1절을 보면 이 잔치가 사흘째 되던 날이라는 설명이 있다. 본문을 추적해 보면 이 사흘째 되던 날은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기 시작한 날을 첫째 날로 해서 일곱째 날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2) 요한은 이 ?7?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두고 싶었다.

1) 첫째 날은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면서 제자들에게 나는 메시야가 아니다 라고 얘기했다.

2) 둘째 날에는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나오셨다.

3) 셋째 날에는 세례요한이 예수님께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4) 넷째 날에는 예수님이 빌립을 만나셨다.

5) 그리고 일곱째 날 가나의 혼인잔치가 있었다.

(3) 요한복음과 창세기는 유사성이 있다. 각 1장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것을 기록했다. 또 요한은 창세기의 천지창조가 ?7?이라는 숫자로 매듭을 지은 것처럼, 가나의 혼인잔치가 ?7?이라는 숫자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어 요한복음이 창세기와 유사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4) 창세기의 창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첫째, 둘째, 셋째 날에는 일종의 그릇을 만드신 것이다.(하늘, 바다, 땅) 그리고 넷째, 다섯째, 여섯째 날은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들을 창조하시고 주관자들을 두셨다.

(5) 요한복음의 세례를 보면 세례요한의 세례는 이런 의미가 부여된다.

1) 첫째 날 세례요한은 세례를 시작했다. 이 세례는 출애급 사건과 대조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수 있는 길은 여러 개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굳이 바다를 지나게 하셨다.

2) 바울은 고전 10:2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석한다.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고 백성들은 살아서 생명으로 나왔다.

3) 그렇기에 세례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받은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그 후의 부활을 상징했다.

4) 예수님은 이렇게 구원의 그릇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릇에 채울 제자를 키우시고 백성들을 부르셨다. 요한은 이렇게 예수님의 세례가 창세기와 견줄 만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 가나의 혼인잔치

(1) 이 혼인잔치는 창세기가 언급한 하나님의 안식과 연결된다. 이때 안식의 의미는 하나님이 지으시려는 것을 완성했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안식에 정점을 찍으신 것이다. 이렇게 창조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며 예수님이 오셔서 시작된 창조는 바로 구원이며 이 구원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이처럼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뜻하셨던 뜻이 오늘 내 인생 속에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성경은 이 일이 보장되어 있음을 증거한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은 세부적으로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서 고백한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제 인생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다. 어려움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1)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고백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옳습니다.

내가 짓이겨져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나는 기뻐하리라 라고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 신앙이다.

(2) 힘들 수 있다. 소리를 지를 수 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없애지 못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선언이다.

라. 안식의 또 다른 의미

(1) 신약에서의 안식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시작해서 계시록의 어린양 혼인잔치에서 끝이 난다. 안식은 단순히 쉰다는 의미를 넘어서 역동적이며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일이다. 그래서 안식은 잔치다.

(2) 바울은 자기가 겪는 극단의 고통 속에서도 기쁘다는 표현을 했다. 이것은 다만 바울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우리는 그렇게 부름을 받았다.

마. 우리는 왜 어려움에 빠지는가?

(1) 우리가 안식에 들어가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있지만 아직 그 나라가 우리에게 완전히 주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에는 포도주가 떨어지는 위기가 온다.

(2) 이때 우리의 반응은 하나님 해결해주십시오 이다. 이 역할은 가나혼인잔치에서는 마리아가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만 넘어가려고 하시지 않았다. 여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과제가 있다 인생은 문제해결보다도 더 귀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성경은 이것을 새로운 창조의 완성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3) 더 좋은 포도주란 무엇일까? 성경은 창세기 보다 더 나은 창조를 암시하고 있다.
창세기의 창조는 무에서의 창조였다. 이것은 0 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암시되는 예수님의 창조는 죄에서의 창조였다. 마이너스 ∞(무한대)에서 시작한 것이다. 마이너스 무한대, 즉 더 이상 비참해질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있는 우리를 새 사람으로 창조해 내신 것이다.

그래서 이 창조는 더 놀랍고 영광스럽고 더 나은 창조이다.

(4) 그러니 이 구원을 실패시킬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모두가 무거운 돌덩이 하나씩을 들고 온다. 당신의 돌덩이가 아무리 무거워도 그 돌덩이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녹을 수밖에 없다.

(5) 가나혼인잔치의 핵심은 예수님이 거기에 계셨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처럼.

바. 예수님의 성육신

(1) 우리가 이런 더 나은 창조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해도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달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보다 나은 것을 받을 수는 없다.

3. 결어

(1) 우리의 인생이 우리 손에 있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화선지에 마음대로 뚝뚝 떨어지는 먹물을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늘 종이를 바꾸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이 종이가 하나님 손에 있다면 그 떨어진 먹물까지도 포함하여 놀라운 명품이 된다.

(2) 오늘 내가 하루를 잘못 살았다고 하자. 그러나 최소한 나는 하루만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간 것 아닌가? 내가 비록 반쪽짜리 연탄에 불과하다고 해도 한번은 뜨거운 불길로 타오를 수 있는 것 아닌가?

(3) 이제는 남에게 칼을 품지 말고 내 인생의 마지막 한 올이라도 태우겠다는 각오로 인생을 살자.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그토록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귀하게 아름답게 살게 하옵소서.

4. 에필로그

(1) 박 목사님께서는 강해 설교를 하신다. 성경 본문이 뜻하는 바를 말씀하시고 그것을 해석하거나 풀어서 그 의미가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야 하는가를 강조하신다.

(2) 한 목사님의 설교를 한번 들은 것 가지고는 잘 모르겠는데, 한 목사님은 본문이 암시하거나 숨겨져 있거나, 자칫 흘려버릴 수 있는 내용들을 예리하게 발견하셔서 전달하시는 것 같다.

가나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을 창세기의 창조보다 더 나은 창조라고 말씀하면서 우리를 긴장 속으로 끌고 가신 것이 대표적이다.

무에서의 창조보다. 죄에서의 창조가 더 나은 창조다.

이런 말씀은 자칫 하나님께 실례(?)되는 발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두 창조를 모두 하신 분이 같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한 목사님의 설교는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3) 설교가 끝나고 박 목사님과 한 목사님 내외분이 식사하는 자리에 같이 할 수 있었다.

?사모님, 한 목사님께서 그러시는데, 그냥 강대상위에서 계속 생활하면 안 될까요? 라는 희망을 말씀하셨다면서요??

?그러게 말이예요. 그게 제일 좋기는 한데 그렇게는 안 되네요?

(4) 천하의 박 목사님도 결점이 있다. 감히 나더러 지적하라고 한다면 약간의 결벽증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우리보고는 먼지만 털어내다가 중요한 걸 놓치지 말라고 가르치시지만, 목사님이야말로 어떤 일에 마주하시면 너무 깨끗해지려고 하신다. 그냥 조금 참으시면 될 일도.

(5)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강대상 위에서만 살 수 있겠는가? 강대상 위에서 사는 것은 두 분 목사님들께서 고민하라고 맡기고 우리는 강대상 밖 세상에서 여전히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니 나도 한번은 타오를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만으로도 오늘은 덜 춥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