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하나님의 비전(50) 사 66:15∼24
2016. 10. 16 (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박 목사님의 식성은 단연 고기 중심이다. 고기가 있는 밥상을 좋아하시고 여러 가지 반찬이 상에 있어도 고기를 주로 드신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마르실까? 그 제 1원인은 목사님의 수면 부족에 있다. 잠을 잘 못 주무시거나, 자는 시간이 짧거나, 도중에 자주 깨거나 이다.

(2) 이번 주일(10/16) 점심은 목사님을 따라 교역자실에서 먹었다. 사실은 이 점심에 종종 참여하는데 그건 순전히 박 목사님이라는 빽을 쓰기 때문이다 이날도 목사님은 권사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이재철 집사는 많이 아픈데 교회가 낫게 해야 돼. 고기를 많이 줘?

고기의 종류는 직접 저에게 전화하는 분께만 알려드리겠다.

(3) 식사가 끝나고 3층 선교관 앞마당을 걸어가면서 나는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이렇게 은혜가 넘치는 말씀을 듣는데 사는 건 왜 그렇게 어려울까요?

목사님의 답은 1초도 안 걸렸다.

?역기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그걸 들어봐야만 알 수 있어. 역기를 보거나 무겁다는 걸 머리로 안다고 들어지는게 아냐?

(4) 고난 앞에서 인간은 반드시 둘 중 하나의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맞서든가, 지든가. 여기야말로 중립지대란 존재할 수가 없다. 맞서는 방법 중 대표적인 것이 견디는 것이며 지는 방법의 대표적인 것은 고난을 피하여 숨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고난을 견디려면 그 고난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만 견딜 수 있다. 이 고난은 왜 주어졌을까,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말씀은 뭘까 하는 등등의 수없는 질문이 고난 속에 있는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생겨난다. 그 질문에 대한 답 중 하나를 하셨다. 답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몫이지만 내 해석은 이렇다.

인간은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 인간은 고난이 있어야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과 하나님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답하신다. 나는 너의 고난을 함께 당하고 있는 너의 아버지란다.

그러니 고난 속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고난을 알겠는가?

2. 내용

가. 서론

(1) 이사야에서 두 가지 주제를 만났다. 그것은 원칙과 심판이라는 주제와 은혜와 구원이라는 주제다. 55장부터 66장까지 은혜가 책임과 심판을 회복한다고 약속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다시 심판이 등장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은 구원을 하시겠다는 것인가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2) 눅 15장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 여기에는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드라크마와 돌아온 탕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비유들은 물론 잃은 것을 찾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들은 모순된 결론들을 가지고 있다.

즉 본문은 양을 찾았는데도 결론에서 회개하라 라고 촉구를 한다. 드라크마의 경우도 같다. 그렇다면 본문은 양을 찾아서 기쁘다는 얘기인지 아니면 회개를 추구하는 것에 방점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주인이 찾아낸 얘기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은혜를 강조한 것이고 길을 잃은 자가 돌아와야 한다면 그것은 회개 책임의 문제가 된다.

나. 은혜와 책임

(1) 세 번째 돌아온 탕자는 앞의 두 비유와 다르다. 이건 찾아낸 아들이 아니고 제 발로 돌아온 아들이다. 불평하는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얘야, 내 것이 다 네 것 아니냐?(눅 15:31)

(2) 돌아오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신분과 지위를 이해해야 되는 문제다. 물건처럼 찾아오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찾은바 된 존재가 마음속에 회개를 해야 되며 정체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3) 여기서 왜 아직도 은혜와 책임이, 구원과 심판이 각을 세우고 있는가에 대한 답이 시작된다.(롬 8:15∼17을 보자) 너희는 공포에 질릴 필요가 없다. 심판에는 당연히 공포가 따르지만 이 심판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책임을 묻는 것이라면 그것은 너희 정체성이 가지는 명예를 격려하는 것이 된다.(롬 8:18∼21을 보자) 하나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라는 구절이 있다.

자유란 책임이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다.
책임이 자유 없이 요구되는 것을 공갈이라고 한다.
책임은 더 이상 자격의 기준이 아니라 명예와 기회가 된다.

(4) (엡 1:3∼6을 보자) 창조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영광의 꽃이 우리가 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감사가 되고 자랑과 기쁨이 되어 우리가 다시 그의 찬송이 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영광으로 증거 되고 그 목적과 뜻이 피어나며 모든 피조물이 내용과 지위와 실력에서 아름다움이 충만한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이 모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로 묶이고 예수로만 완성된다. 이것이 현실에서 완성되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며 창조의 꿈이다.

이것이 이사야의 제목이 하나님의 꿈으로 붙여진 이유다.

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1) (요 17:18∼24를 보자) 여기서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과 성부와의 연합은 사랑으로 되어 있고 우리를 그 연합으로 초대하고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외면하는 세상에 그 아들을 보내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하거나 권력과 힘으로 압제하는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부와 패역 속에 예수님을 보내어 사랑을 증명하셨다.(히 5:8)

(2) 뿐만 아니라 그 예수님이 우리 손에 죽는 것을 감수하여 모든 것을 뛰어 넘는 사랑을 예수로 증명하신 것이다.

(3) (롬 8:38∼39를 보자)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부족한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격과 차원이 다른 사랑이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세상이 저지르는, 모든 거스르는 것으로도 꺾지 못함을 증명하셨고 이기셨기에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고 그것이 바로 고난이다. 이런 세상에서 너희도 책임지고 사랑의 자리에 와라, 이것이 이사야가 요구하는 책임이다.

라. 우리의 인생

(1) 지금의 조건과 현실, 내일은 못 볼 것 같은 짐을 지었지만 거기서 하나님 사람으로 자유롭게 신자 된 책임을 다하라.

우리는 이것만 풀어달라는 기도를 한다. 그러나 신앙은 무언가를 손해보고 감수하라고 하고 거기서 위대해지라고 한다.

(2) 천국에 사망이 없다는 것은 환경의 문제를 훨씬 벗어난 수준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는 자리를 의미한다.

사 66장24절의 패역한 시체는 공포를 보라는 얘기가 아니라 사망이 우리의 발밑에 있는 것을 볼 것이라는 예표를 말한다.(고전 15:54)
(3) 인간 최고의 공포는 죽음이다. 원망, 분노, 자책은 결국 살아서 뭐해 라는 죽음의 길로 우리를 끌고 간다.

3. 결어

(1) 우리가 지금의 조건에서 위대할 수 없다면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모독하는 것이다.

(2) 야곱의 생애는 이러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하나님 : (밤새워 씨름하신 후) 나, 간다.
야곱 : 축복하지 않으시면 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 :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 : 야곱입니다.(약탈자, 사기꾼입니다)
하나님 : 다시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라.
너는 이스라엘이다.(이긴 자이다)

(하나님 : 부모는 자식을 이길 수 없다. 너는 내 자식이다. 너 어디 가서 나는 약탈자다, 나는 고아다 그러고 다니지 말아라, 내가 네 아버지다. 알아들었느냐?)

(3) 힘든 인생이다. 그러나 위대한 인생이다. 우리를 패배시킬 것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우리의 사랑과 책임과 자유와 영광을 막을 것은 없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4. 에필로그
(1) 이사야를 시작하신 것은 2015. 1. 25이다. 그리고 이번 주 2016. 10. 16에 끝나셨으니까 1년10개월 정도가 걸렸다. 물론 매주 하셨으면 더 일찍 끝났을 것이다. 이사야 다음에 어떤 말씀으로 설교하실 지를 물었다. 뜻밖에 대답은 사무엘이었다. 나는 예레미야를 기대했었다 좀 딱딱한 성경말씀이라 목사님 해설을 들으며 가고 싶어서.

(2) 내가 마음속으로 더욱 원하는 말씀이 있다. 요한계시록이다. 다시 보는 요한계시록 말이다. 이것을 수요일에 하시지 말고 주일에 하셨으면 좋겠다.

몇 년 전 수요예배에 갔다. 요한계시록을 시작하시는 날이었다. 평소보다 두 배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오늘이 요한계시록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많이 오셨겠어요? 아직도 신기한 걸 좋아하는 거지?

(3) 죄송한 말씀이지만 목사님은 요한계시록 설교에서 세상말로 죽을 쑤셨다. 왜 그랬을까? 목사님만이 아실 일이다. 한 가지 답은 있다. 언젠가 설교준비에 대한 얘기를 했을 때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먼저 내가 은혜를 받아. 그래서 넘치는 것을 나누게 돼?

무슨 심령부흥회 강사가 하는 말로 들리는가?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이 더 잘 알겠지만.

나는 그 당시 목사님의 영혼을 불편하게 했던 교회의 문제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비록 문제들이 목사님의 고통을 열배나 더하게 했지만, 목사님께서는 그 고통을 겪으면서 「다시 보는 로마서」를 끝내셨다.

심한 고통 속에서 명설교를 탄생시키는 하나님

박영선의 초기 대표작이 「하나님의 열심」이라면 후기의 대표작은 단언하지만 「다시 보는 로마서」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