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목사님의 설교-15.9.9

1. 들어가는 글

(1) 오늘은 무겁게 글을 쓰지 않으려고 결심에 결심을 했다. 박목사님 설교는 그 내용이 진지하고 언제나 본질의 문제를 말씀하시기 때문에 설교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너무 무거워 진다. 그래서 오늘은 가볍다는 말을 들어도 좋을 만큼 수필처럼 쓰고 싶다.

(2) 8/9에 설교하시고 2주 만인 8/23 설교하셨는데 좀 쉬셔서 그럴까? 설교에 힘이 있으시다. 지난 토요일(9/5) 당구장에서 여쭈어 보았다. 목사님, 컨디션 좀 어떠세요? 어, 나 조금 좋아졌어. 이번 여름을 잘 보낸 덕인 것 같아. 그래서였을까 9/6 설교는 정말 힘이 넘치셨다. 나는 좋다. 절로 신이 나니까. 목사님은 힘드시겠지만.

(3) 9/6 설교 때 목사님께서 강대상에서 설교 중에 물으셨다. 한 술 밥에가 맞아요? 성질 급한 내가 대답했다. 배부르랴. 나도 그건 알아, 한 술 밥이 맞냐구? 이 날 성가대와 앞쪽에 앉으신 분들이 웃은 이유는 이 대화 때문이었다.

2. 기도

(1) 8/23 설교는(사 38:1∼8)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것이었다. 목사님께서는 이 본문을 통해서 기독교의 본질을 설교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내 귀에 들어온 것은 기도에 대한 것이었다.

(2) 언제부턴가 나는 기도를 아래와 같이 정리했었다.
첫째, 기도는 하나님께 요구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둘째, 기도는 세상에 대한 공격이다.

셋째,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인 물질로 응답하시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을 강하게 훈련시키신다.

(3) 너무 자의적이라고 보시는가? 이렇게 정리하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이날 기도의 정의를 확 바꾸셨다. 기도란 우리의 과거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의 눈물과 한숨을 회복시킬 수 있다.

(4)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신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 우리의 소원이나 정성에 붙잡혀 있지 않고 아버지의 신실함대로 응답하심을 감사드립니다.

(5) 박목사님께서 풀어주신 히스기야의 기도는 이런 것이었다. 하나님, 저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니 제 기도 들어주십시오. 사람들은 이 기도의 깊은 의미를 알고 있을까? 이 단조로워 보이고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은 몇 마디 안 되는 기도의 진솔함을 알고 있을까? 히스기야 기도의 핵심은 히스기야가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한 말이 저 하나님을 압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누가 하나님을 모를까? 이런 생각이 드신다면 이날 설교는 다시 들으셔야 할 것 같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다만 인과율의 법칙에 매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이시라면 과거도 바꿀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런 히스기야의 믿음을 보시고 응답하신 하나님의 징표는 이미 지나갔던 해시계가 뒤로 물러가게 하신 것이었다.

(6) 여호수아 생각이 나시는가? 여호수아는 기도로 시간과 해를 멈출 수 있었다. 히스기야에 와서 기도가 발전된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몰랐던 것이다. 여호수아의 기도 응답은 시간과 해라도 멈추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었다면 히스기야 기도의 응답은 시간도 돌이켜 뒤로 가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7) 박목사님은 여기서 몇 걸음을 더 나가셨다. 기도란 우리의 과거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라는 과감한 선포를 하셨다. 그리고 추가로 설명을 하신다. 우리가 이미 흘린 눈물과 한숨 일지라도 하나님은 회복시키신다 라고 말이다.

3.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사 40:3)

(1) 9/6의 설교는(사 40:1∼8) 하나님의 위로와 순종의 삶에 대한 것이 주제였다. 목사님께서는 설교 중에 위의 제목처럼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설명하셨는데 내 귀에는 그 부분이 집중적으로 들려왔다.

(2) 마태복음을 강의하실 때도 이 부분을 언급하셨었다. 그리고 이것과 관련된 세례요한의 역할도 얘기하셨었다. 내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목사님께서 새로운 가르침을 주신 것일까?

(3) 세상은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치 않게 바꾸었다. 때로는 구부러진 길을 만들고 때로는 움푹 파인 길을 만들었다. 어느 그 뿐이랴. 세상은 하나님의 길에 돌더미를 쌓거나 가시덤불을 놓아서 어떻게든 하나님의 길을 가시밭길로 만들었다.

(4) 세상이 하나님의 대로를 가시밭길로 만들 때 쓴 재료들이 있다. 실패, 절망, 사필귀정, 인과응보, 고난, 좌절, 불안, 고통, 재앙 등등 우리는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다. 그것들은 창세 이후 인간이 범죄 하면서부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대로를 계속 망가뜨리고 있었다. 오래 참으시던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계기로 이렇게 선언하고 계신다.

너희 실패들아, 절망들아, 고통들아, 좌절들아, 너희가 궁극적인 권위가 아니다. 너희가 내 백성을 꾸짖고 괴롭힐 때 마치 너희가 최종적인 결정권자인 것처럼 말하지 말아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제 광야에게 사막에게 심판에게 고개를 낮추라고 말하여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 길로 데리고 가시니 고난아, 고통아, 실패야, 너희 허리를 낮추고 너희 자세를 바꾸어 내 길을 평탄하게 만들어라. 그 길로 내가 내 백성과 함께 가리라.

(5) 나는 이날 전율을 느꼈다. 아! 이 말씀이셨구나. 하나님의 대로는 무엇이 그 대로를 망가지게 했으며 이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 길을 평탄케 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까지 인도하시는지를 알아들은 것이다.

(6) 하나님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 그렇게 하셨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현실이 아버지의 손에 있음을 너무나도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은가? 너무 감사해서 소리라도 쳐야 되는 것 아닌가?

4. 결어

(1) 나는 요즈음 목사님 설교집 로마서와 사도행전을 같이 보고 있다. 사도행전은 조금 가볍고 재미있는 것 같고 로마서는 아무래도 조금 무겁지만 그래도 재미는 있다. 그래서 하루에 사도행전 한 편, 로마서 한 편을 읽고 시간이 되면 사도행전은 두 편을 읽는다.
(2) 요즘 내 싸움은 처절하다.

나 : 지금 내 인생은 뭔가? 이 나이가 되도록 해 놓은 것은 없고 아직도 고생은 연줄처럼 널려있고 육신의 고통은 거미줄에 얽매인 듯하다. 이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로 이루어진 것이라 말인가?

사도행전(로마서) : 그렇다.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욱 그렇다.

하나님 : (대체로 침묵하시다가 가끔) 재철아, 네가 지금 그 고생 가지고 불평을 하는 것이냐? 내가 하박국에게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 라고 했던 말을 귓등으로 들었던 것이냐?

나 :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저와 제 가족이 하나님 품안에 있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도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시고 저에게는 고생을 조금만 덜하게 해주시옵소서. 아멘.

(3) 아주 오래된 대중가요가 있다. 제목은 열두 냥짜리 인생이고 라디오 연속극의 주제가였다. 그 가사 중 한 부분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는다.

“사랑이 좋으냐 친구가 좋으냐
막걸리가 좋으냐 색시가 좋으냐
사랑도 좋고 친구도 좋지만
막걸리 따라주는 색시가 더 좋더라”

초등학교 저학년 때 장기자랑 시간에 앞에 나가 이 노래를 불렀다. 물론 뜻도 몰랐다. 한 가지 분명했던 것은 여자 담임선생님 얼굴이 상당히 빨개지셨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이 좋을까?

아주 힘든 날 뒤돌아보면 여전히 거기에 계시는 예수님이 정말 좋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