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글

(1) 이 글을 쓰기 전에 먼저 김정우 교수님께 개인적으로 사과를 드려야 되겠다. 1년에 한두 번 우리 교회에 오셔서 설교를 해주시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는 별로였다. 나의 그런 은밀한 교만을 단번에 꺾으시는 설교를 지난 6월8일(일)에 해주셨다.

(2) 교수님의 설교가 끝난 바로 다음 주 6월15일(일)은 우리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가 있었다. 이 두 설교에 너무 큰 은혜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이 두 설교는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루었다. 그것은 감동이기도 하고 받은 은혜를 더욱 뚜렷이 가슴에 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3) 아래 쓰고자 하는 글은 잘잘못을 다루는 글은 결코 아니며 더구나 누구의 설교가 더 좋았다 하는 비평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시는 방법은 이렇게도 다양하고 다른 방법일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독후감일 뿐이다.

2. 김정우 교수의 설교

가. 6/8(일) 욥기37:2~7 김정우 교수 남포교회

나. 내용

(1) 욥37:7 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손에 표를 주시어 라는 구절이 있다. 언젠가 한 번 어떤 기자가 이 구절을 제시하면서 성경에도 손금을 말씀한 부분이 있다 라고 얘기했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으며 이 말을 듣고 이 단어에 대한 연구를 해보았다.

(2) 이 단어는 욥9:7 에서는 별들을 봉하시며 라고 쓰였고 욥14:17 에서는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라고 쓰였으며 욥33:16 에서는 귀를 인치듯 한다 라고 쓰였는데 결국 손에 표를 주시어 라는 뜻은 손을 봉인하다 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으며 손을 묶어 하는 일을 못하게 한다 라고 이해할 수 있다.

(3) 엘리후는 욥37:2~13에서 겨울을 묘사하고 있으며 겨울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봉인하고 계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과 작품을 보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4) 인생은 추워지면 아무 일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 우리가 건강할 때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 인생에게 강제로 겨울을 주신다. 엘리후는 이때가 바로 하나님의 일을 감사할 시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5)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과 우주에는 큰손이 있으며 그 손은 이 모든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강제로 주시는 이 겨울이 짧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신다.

모든 생명체는 겨울을 만난다. 겨울을 만나야 뿌리가 깊어지고 여름의 무더위를 이겨 낼 힘이 생기고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 겨울은 이렇게 생명체를 위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런 새로운 질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겨울을 주시는 것이다.

(6) 욥13:27 에는 발을 차꼬에 채우시며 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발자취를 점검하다, 발바닥에 무엇인가를 새긴다는 의미이며 고대에서는 종을 표시할 때 사용했다. 즉, 욥은 나는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종이 되어 있다 라고 진술하는 것이다.

(7) 이 시대를 보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에 의하여 손발을 묶이고 있는 시기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보게 하신다. 이것은 중요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여기서 주님의 작품을 보아야만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간다. 우리가 이렇게 깊이 나아갈 때 주님의 세계가 열린다.

(8) 욥은 고난을 통해 창조세계를 보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탄식하고 빈정대고 화도 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허락하시겠다는 것이 바로 욥기이다.

(9) 정의라는 것은 인간세계 내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는 외부에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네가 인간세계의 정의만을 가지고 내게 덤비느냐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10)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가 가진 패러다임이 깨어질 때, 겨울이 올 때, 우리의 손발로 아무것도 못할 때 오히려 주님은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지혜로, 성숙으로, 도덕성으로 나아가라고 하신다.

(11) 젊은 시절의 우리는 우리의 힘대로 하려고 한다. 그래서 팔을 걷고 뛰어 든다. 수동적인 것은 회색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시간에 대한 깨달음이 생긴다. 우리는 점점 더 수동적이 되어가고 기다리게 된다. 우리가 침묵 속에서 기다릴 때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기도를 이끌어 가신다.

(12)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보증금으로 주셨다. 우리는 그것으로 매일 확신하고 확인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증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소망을 바라보면서 세상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13) 우리의 인생에는 내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하나님의 신비를 우리의 이성이 다 풀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은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의심할 수 있지만 내 속에 있는 내 영혼은 하나님을 믿는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을 생각해보고 묵상해야 한다.

(14) 우리는 인생의 혹한 속에서 그 혹독함을 담담히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구해야 하며 그 속에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신비를 알아야 한다.

3. 박영선 목사의 설교

가. 6/15(일) 로마서(44) 롬15:22~33 박영선 목사 남포교회

나 내용

(1) 바울은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똑같다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유대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이방인들이 모은 헌금을 유대인들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이는 여러 도전을 받는 일이었다.

(2) 만일 이방인과 유대인이 같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유대인을 선택된 민족으로 택하셨을까 하는 질문이 당장 나온다. 그들을 선민으로 택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이 있지 않느냐는 항변인 것이다.

(3)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게 지켜진다 라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4)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과 자비를 보이셨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선민을 택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분명하심을 드러냈고 이방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심으로써 은혜를 드러내신 것이다.

(5)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 인생에는 확실히 분명한 역할을 맡은 사람과 긍휼의 대상이 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있다. 즉, 잘난 자와 못난 자가 있는 것이며 진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은혜가 더 필요하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6) 이 둘 중 어느 하나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다 담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누구의 도움을 받을 때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나 억울할 때 상대를 없애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7) 세잔의 사과에 대하여 말하겠다. 이 말은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구하는 노력을 의미하는 관용구가 되었다. 세잔은 자기 아내의 초상화를 대강 그렸다. 왜 그랬을까? 세잔은 아내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기술로는 다 표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세잔은 그림을 보는 사람이 상상으로 자신의 눈이 보는 한계를 넘어가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바랬던 것이다.

(8) 시8:1~9 을 보자. 이 시는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영광을 감격하게 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그 창조의 영광을 사람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라고 찬양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인간이 상상하는 천사의 모습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하셨다고 감사하고 있는데 이 말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만족할만한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상상력을 통하여 인간이해에 대한 폭을 넓힐 수 있게 하셨다는 뜻이다.

(9) 그러나 우리는 윤리적, 기술적, 심리적으로 완벽해지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단호하시다. 너는 일을 해결하는 자가 아니다. 너는 나를 끊임없이 의지해야 할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10)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지 않고 모든 일을 직접 하시는 것이 훨씬 쉽고 효율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을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만큼 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이것을 모르니까 우리는 조건과 힘에서 남보다 우위에 서고 싶어 하는 것이다.

(11) 고전4:1~5 을 보자. 이건 이런 뜻이다.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을 살아라. 자기 배역에 충성해라. 이게 뭔가? 라고 하지마라.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잘못했으면 후회해라. 실제로 해보고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인생이다. 못난 것밖에 없는데 그 못난 인생이 훌륭해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인생이다.

(12) 사랑은 하나님께 충성하고 남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즉,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다. 사랑은 내 마음의 항복을 보이거나 나의 넘치는 실력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13) 당신에게 분명함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분명함이 모든 사람에게 넉넉함으로 쓰일 수 있게 하라. 당신에게 분명함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을 감수하도록 하라.

(14) 예의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그 너비와 지혜와 신실하심을 인정하는데서 나온다. 당신이 하나님을 안다면 당신은 관용과 충성과 헌신이 있어야 한다.

(15) 누가 우리에게 물을 수 있다. 지금 용서하라고 말하는 당신은 용서를 했는가? 라고 말이다. 그때 우리는 못했습니다 라고 대답해야 한다. 질문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면 왜 그런 말을 하는가? 답을 해야 한다. 용서가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우리는 그 길로 가야 한다. 그걸 겪어야 한다. 욕설이나 보복은 우리의 삶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용서는 우리가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것이고 우리는 그 고난을 따르는 것이다.

(16)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아픔을 위로하시고 우리에게 큰 복을 주신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 분명한 증거이다. 그러니 우리의 할 말은 하나뿐이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4. 결어

(1) 김정우 교수님께서 학자답게, 손에 표를 주셨다는 말씀은 손을 봉인했다는 뜻이고 손을 봉인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부러 겨울을 주셔서 할 일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과 하나님의 작품을 보게 하려는 하나님의 은혜를 뜻한다고 말씀한다.

(2) 인생은 이렇게 겨울을 겪어야 뿌리가 깊어져서 여름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말씀이 쉽지는 않지만 우리 마음속에 선명한 정의를 내리고 그 정의를 학문적으로 풀어간 후 우리를 은혜의 장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3) 이에 비하여 박영선 목사님은 하나님은 누구시며 인생은 무엇인가를 말씀으로 먼저 증거 한다. 그러면서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눈에 보여 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무한한 상상의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나 이성이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다 나타낼 수도 없는 무한한 존재라고 말씀한다.
(4) 그러나 인생은 그 길을 가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유일한 정답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5) 박목사님은 최근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내가 한 설교를 여간해서는 다시 듣지 않는다. 내 설교를 다시 들으면 약점을 보완한다 할까? 고쳐서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견 좋은 태도일 수 있으나 동시에 커다란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더 앞으로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다.

(6) 목사님은 이어서 예를 드셨다. 나는 만주 벌판 전체를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넓은 땅을 세분하고 잘 가꾸는 것은 내 후배들이 할 일이다. 나는 거칠지만 걸음을 크게 성큼성큼 나아 갈 뿐이다 라고 말씀했다.

(7) 나는 위 두 설교를 통해 큰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시는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게 크고 많다는 것도 깨달았다. 학자는 학자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설교자는 설교자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8) 나는 이 두 설교를 듣고 내가 받은 은혜를 내 삶의 현장에서 실천해야겠다는 다짐을 더욱 새롭게 했다.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야겠다. 내일 일은 잘 모른다. 내일은 내일이 걱정할 것이므로. 끝.

2014. 6. 30. 이재철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