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의 인터넷 기사 중에서 ‘서천석의 행복한 육아’라는 공감되는 내용이 있어서 퍼 올립니다.

두 살에 한글? 둔재 될 수도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때로는 결과가 의도를 정반대로 배반할 때도 있다. 월드컵에서 수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던 공격수는 자책골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며 중세 시대 페스트가 대유행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전염병을 막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기도를 한 데 있다. 마찬가지 현상이 아이 키우기에서도 흔하게 나타난다.

캐임브리지 대학에서 교육과 뇌신경학을 연구하는 우샤 고스와미 교수는 다섯 살부터 글자 읽기를 시킨 아이들이 일곱 살부터 글자 읽기를 시작한 아이들보다 학창 시절의 학업 성취도가 낮다는 결과를 보고한 바 있다. 연구가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아이들의 뇌가 글자 읽기에 준비되지 않은 시기에 글자 읽기를 시도하면 도움은커녕 해가 된다.

설마 하는 마음이 드는가? 그렇다면 두 돌의 아이에게 자전거를 제공해보자. 아이는 울고, 짜증을 부리고, 옆으로 쓰러지고, 자전거를 미워할 것이다. 그 나이에는 아직 자전거를 탈 신체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자전거 크기에 비해 몸이 작아서만은 아니다. 아이에게 꼭 맞는 크기의 자전거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무릎을 꺾어서 힘을 주는 고급의 운동 기술, 방향을 유지할 정도의 힘을 가진 어깨 근육이 없다면 자전거는 언감생심이다. 아이의 뇌와 몸이 자전거 타기에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읽기도 자전거 타기와 마찬가지이다. 읽기에 필요한 두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읽기는 아이를 괴롭히는 도구에 불과하다.

이런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두 돌이 갓 지나서 책을 혼자서 읽는다는 아이의 이야기가 광고로 나오면 많은 부모들은 마음이 급해진다. ‘하루라도 빨리 책을 읽어야 학교에 가서 공부가 뒤처지지 않는다는데.’ ‘요즘은 사고력이 중요하고, 사고력은 독서가 좌우한다는데 글자를 빨리 알아야 독서든 뭐든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유아 한글학습 교재들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아이 키우는 집이라면 앞장에 그림이, 뒷장에 글자가 쓰인 카드를 하나쯤은 발견할 수 있다.

플래시 카드를 통한 한글 학습이 바람직하지 않은 유아용 한글 학습 방법이지만 엄마는 기어 다니는 아이를 앉혀 놓고도 카드를 넘긴다. 아이에게 글자가 제대로 보일지, 또 아이가 글자들의 미묘한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지도 모른 채 일단 엄마는 조기 교육에 희망을 건다. 당연히 아이는 글자를 그저 그림으로 인식할 뿐이며 일정한 소리와 일정한 모양을 연결지을 정도의 능력은 아직 없다. 글자 읽기를 시도하려면 소리를 더 작은 단위인 음소로 나눠서 인식하여야 하는데 이것도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이다. 그 순간의 아이의 뇌를 열어서 들여다보면 부모도 수긍할 것이다. 청각과 시각 정보를 통합하는 신경은 아직 발달 초기에 불과하여 기능이 허접하고 언어중추는 소리를 나눠서 구별할 정도에 이르지 못해 있다.

물론 일부 예외가 존재한다. 어떤 아이는 말도 잘 못하는 세 돌에 글을 술술 읽는다. 엄마가 무릎에 앉혀서 책만 읽어주었을 뿐인데도 혼자서 띄엄띄엄 읽기를 시도하는 네 살 아이들도 있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 아이라고 못하겠나 하는 투쟁심이 솟구친다. 그 아이가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아이도 부모가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부모는 인식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이들은 발달의 속도가 모두 다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읽기의 시작이 빨랐다고 장기적인 학업 성취도까지 높은 것은 아니라는 연구도 많다는 점이다.

빨리 읽는 아이들을 말릴 필요는 없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빠른 읽기가 아이의 발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이를 말리기도 하였다. 지금은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읽을 수 있다면 놔두자. 읽기를 즐긴다면 분명 언어능력과 사고력의 발달에 유리하다. 그러나 읽지 못하고 읽기 싫어하는 아이를 억지로 가르치려 들지는 말자. 적어도 학교 가기 전 마지막 여름까지는 놔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읽기 교육을 모두 그만두자는 것은 아니다. 가장 좋은 읽기 교육은 엄마가 읽어주는 그림책이다. 엄마가 그림책을 반복해서 읽으면 아이는 동화책의 글밥을 어느 정도는 외우게 된다. 다 외우고 있으면서도 아이는 엄마의 말이 궁금하다. 무슨 말이 나올까 기대를 하면서 책의 글자를 관찰한다. 이때 어떤 모양의 글자가 쓰여 있을 때 엄마 입에서 같은 소리가 나온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글자와 소리를 연결 짓기 시작한다.

각운, 두운이 들어간 글, 의성어와 의태어가 쓰인 글을 읽어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달 달 무슨 달’, ‘갈래 말래 올래 돌래’ 와 같은 말놀이는 아이들을 즐겁게 하면서도 소리를 잘게 쪼개어 인식하는 ‘음소 인식’을 도와준다. 소리를 잘게 자음과 모음으로 구별하여 인식하는 속도가 빨라지면 아이는 각각의 음소와 글자를 연결하기 쉽다. 이쯤이면 글 읽기는 바로 코 앞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글자를 배운 것이 아니라 급하게 글자를 배우면 글자를 소리의 표시가 아닌 그림으로 인식한다. 각각의 단어를 통째로 그림처럼 외우기도 하고, 조금 나은 아이는 한 글자씩 모양을 외운다. 이렇게 외워서 글자를 알게 되면 글자를 읽을 때마다 머리 속에서 무수히 많은 통글자를 다 꺼내서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한글을 자판으로 치면 26개 자판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한 글자씩 이뤄진 활자로 갖다 쓰려면 한쪽 벽이 모두 활자로 채워져야 할 것이다. 통글자 읽기는 아이 머리 속의 엄청난 기억 공간을 낭비하며, 제대로 된 글자를 맞추고 확인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도록 한다. 결국 읽기는 속도가 붙지 않고 아이는 읽기를 괴로워한다.

다행히 부모의 노력과 전혀 무관하게 상당수 아이는 자생적으로 글자 읽기의 올바른 방법을 터득한다. 부모는 자신의 노력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부모의 한글 교습이 도움이 되었다기보다는 부모와 보낸 시간 그 자체가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일부 읽기에 취약한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에게는 부모의 잘못된 노력이 난독증을 만들 수 있다. 읽기를 잘못 가르친 것이다. 또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가 읽기를 즐거운 활동이 아닌 괴로운 활동으로 인식하여 회피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부모의 좋은 의도를 결과가 배신한 셈이다. 그 배신의 핵에는 어리석은 욕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