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남성성가대원 여러분!
벌써 10월도 다 지나고 내일이면 11월입니다. 이 한해도 이제 두 달정도 남아있습니다. 한해 잘 마무리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늘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우리모두 되길 원합니다.

오늘은 지난번에 이어서 하이든의 생애와 음악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지난 주일 장년2부모임에 초대되어 바흐의 음악과 신앙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었는데요, 시간이 좀 부족해서 준비한 음악을 듣지 못해 서운했지만 그래도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남성성가대의 젊은 대원 모집을 홍보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교향곡의 아버지로 잘 알고 있는 하이든의 삶을 보면 그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에서 전 많은 감명을 받곤 합니다. 하이든의 부친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국경마을 로라우(Rohrau)라는 지역에서 작은 호텔을 운영하던 평범한 가장입니다만 자녀들이 많아 늘 가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732년 이 로라우에서 태어난 하이든은  부다페스트와 비인을 오가는 여행객들이 자주 드나드는 여러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음악이나 묘기를 공연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소위 유랑극단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 유랑극단의 단원들은  하이든의 부친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투숙하면서 하이든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는 바이올린을 장난삼아 가르치곤 했나 봅니다. 그런데 하이든은 이들의 가르침에 매우 빠르고 정확하게 배워나갔고 이를 걱정하던 부친은 마침 비인의 성 스테판 성당에서 소년 성가대원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어린 아들을 보내게 됩니다. 이때 하이든의 나이는 9살이었습니다.

1740년 비엔나의 성 스테판 성당에서 소년 성가대원이 된 하이든은 본격적으로 바이올린과 오르간을 배우게되었고 특히 성악에 입문하면서 이 분야에도 전문지식을 쌓게 됩니다.
사실 소년성가대는 많은 교회나 성당에서 운영되었는데, 그 목적은 전문적인 성가를 연주할 목적이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남자어린이들로만 구성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남존여비 사상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남자만 성가를 불렀냐고요? 요즘 같으면 말이 안되는 일이지만 이 당시 가톨릭 교회의 전통은 여성을 찬양에 사용하지 않는 다는것이지요. 그것은 6세기 그레고리오 교황의 칙령에 의해 남성만이 교회에서 찬양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아뭏든 소년성가대원 활동은 4년만에  변성기를 맞아 그만두게되었고,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칸토르의 도움으로 소년성가대원들의 발성과 음악훈련을 위해 계속 성당에서 남아있게됩니다.
그러다가 1759년 그러니까 하이든이 28세가 되면서 모르친(Morzin)이라는 작은 마을의 성당에 책임자로  발탁되어 오르간을 연주하거나 성가대를 지휘하게됩니다.

1761년 그러니까 하이든의 나이 30세가 되면서 그의 인생중 황금기를 모두 보냈던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찌 대공의 개인 음악가로 취직을 하게됩니다. 이 에스테르하찌 대공으로 말하자면 이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의 친 동생으로 만약 그가 유고시에는 바로 권좌를 이어받을 수 있는 소위 권력의 제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막강한 권력자인지 알 수 있겠죠. 더구나 이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은 온 유럽을 호령하던 시절이었고 많은 경제권이 몰려있어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음을 감안하면 매우 유력한 지위였지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2012.10.31.

송진범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