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 김준용


        마음의 양식 – 다시 돌아 보는 삶의 의미
양  호 장로
·남포교회
·서강대학교 교수

“평생동안 추구해 온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고교동문이며 LA 영락교회 장로이던 김명조 군이 얼마전 소천하였다. 그해 송년모임에 와서 기도를 하던 그 맑은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장례식날
관속에 누워있는 그를 보니 아주 수척한 얼굴로 굳어 있었다. 내일 닥칠 일조차 알지 못하는 인생

이제 그 영혼은 육체를 떠나 영원히 썩지 않고 고통과 환란이 없는 하늘나라 에서 행복한 영생을 누리게 되었으나 이땅에 남아있는 우리는 내일 닥칠
일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임을 잊고 아직도 육신의 안락은 한없이 자기를 위해 있다고 믿고 싶어하며, 곧 닥칠 죽음과는 자신을 연관짓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다시 깨닫게 되었다. 주위에 가까운 분들이 하나 둘 떠날 때마다 우리는 잠시 허망한 삶을 돌아보는 돗한 순간을 갖지만 곧 잊어 버리고 갖가지
현실적,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오늘도 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떤 삶을 살아야 후회없는 삶이 되는 것인가?
행복한 황혼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는 어리석은 인간이다. “아마도 행복해지기 위해서 교포은행의 CEO 자리도 스스로 그만두고 나오지 않았던가?
과연 후회없는 만족한 삶은 있는 것인가? 과연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결국 인간은 한평생 이 문제에 답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몸부렴치다가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 반문해 본다. 유대인의 성전 탈무드에서는 행복을 재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얻음’에 따라 행복을 재고 있다.
다른 하나는 ‘잃음’으로 재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건강과 질병의 관계와 비슷하다. 평소에는 건강을 감사할 줄 모르다가 건강을 잃을 때에야 비로소 건강을 되찾고자 한다.
아픔이나 괴로움을 느끼게 되어서야 건강할 때가 행복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보람과 소중했던 것을 잃어 버렸을 때에야 행복했던 것을 회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환난과 고통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시련을 극복하는 신앙이 더욱 깊게 성숙해진다고 가르친다. 그 연단을 통해서 구약의
‘욥’과 같이 인내와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굳게 갖고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몇해 전 은행을 떠난 후에 내가 깨닫고 있는 마음의 양식은 “겸손할수록
허리를 굽히고, 남의 비판에 경청할 수 있는 용기”였다. 37년 간의 은행 생활을 스스로 접고 은퇴했을 때에 많은 비판에 직면했었다. 그러나 합리적이지 못한
경영과 의사 결정이라는 환경 때문에 스트레스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국의 한인은행 CEO들의 정신적 고통은 건강을 해치는 뱀의 독보다 더 해로울 수 있음을
체험한 나는 현실적으로 잃을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는 사직을 결정했을 뿐이다. 지금 돌아보아도 나는 올바른 결정을 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현실적인
잣대로는 실패했다고 여겨질지라도 그에 대응할 만한 큰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더욱 더 겸손해지리라고 생각하고, 남아 있는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됨으로써 마음 속에 진정한 평안을 얻는 길을 다시 보게 되었고 무엇이 우리의 한시적 삶속에서 더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 기억하게 된 나는 은행장 시절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다.
그토록 돈이 많은 빌 게이츠나 워렌 버햇도 결국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자선 사업쪽으로 남은 여생의 목표를 잡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남을 행복하게
하는 자선을 통해서 자신도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선(Charity)이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고 한다. 또 ‘베푼다’는 뜻이다.
돈으로 얻을수없는 행복을 이웃을 위해서 베풂으로써 자기 자신도 행복해 짐을 깨달은 사람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깨달은 성공한 삶을 사는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흔히 행복은 크고 좋은 일에서만 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행복이란 가장 보람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일을 완성하였을 때 찾아 오는 것이 아닐까?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는 교도소에서 27년을 복역했는데 그는 교도소 마당 한 귀퉁이에 조그마한 밭을 가꾸어 보람과 기쁨을 누리며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얼마 전에 현존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장수하던 126세의 노인이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필자의 나이보다 두 배를 살다가 가셨으나
과연 행복한 완성된 삶을 살았는지는 본인 만이 알 일이다. 평생을 순례자로 살며 그 누구보다도 많이 성경의 복음을 전파한 빌리 그램함 목사도 이제 90세의 나이가 되어
모든 사물이 때가 되면 그 기능이 저하되듯 육체가 쇄약해지고 기억력의 감퇴 때문에 그가 가장 즐겨 암송하는 다윗의 시편 23편을 다 외우지 못한다고 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는 이 시편은 다윗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택함 받은 성도가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성도는 당장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빠질지라도
완성된 삶을 살아 만족과 안식의 상태에 있음도 묘사하고 있다. 이제 인생의 황촌에 서서 인간적인 육신의 어려움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빌리그램함에게 이 시편 23편은 완성된 삶,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여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었으나 어떻게 늙어가야 하는 것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그딸 안네 그래함 로츠(Anne Graham Lotz)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없이 늙어가고 인생의 황훈을 맞이한다. 불란서 대통령이었던 미테랑은 사회주의자였고 무신론자였다. 말년에 암으로 투병하던 그는
사후 세계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두려움 속에서 말년을 지냈다고 한다. 필자를 포함하여 늙어가고 있는 주위 분들이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지만
또 아직 그 단계는 아니라고 강변하며 일상의 쾌락과 욕심으로부터 빠져 나오기 싫어하지만 황혼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되는 것은 삶을 마무리 하기 위한
자세와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의 준비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빌리 그래함 목사같이 평생을 인생의 허무함과 하나님 안에서의 삶의 영원성을 전파하던 분마저도
이제 인생의 황혼을 맞아서야 겨우 죽음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에 우리 평범한 세속인들이 과연 인생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과정으로 죽음을 준비하며 변화된 삶을 살 수 있겠는지는 의문이다.
평생을 생활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주일날에는 교회에 가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주님 안에서 찾고 있는 많은 평범한 크리스찬들의
의식 속에 인생의 황혼은 궁극적인 가치를 가지지 못한 이 세상 삶의 마지막 단계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성취욕과 재물과 출세와 기타 등등에서
찾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은 인생 자체가 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겁내고 집착하며 때로는 추한 모습도 보여준다.
사후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사람의 지혜와 세상적 가치는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해지는 것을 알면서도 매일 매일의 시간의 흐름 속에 사는 그 동안은 그리고 죽음이
바로 코앞에 닥칠 때까지도 그 무의미한 것들을 놓고 싶어하지 않는다. 쿠바를 47년 간이나 다스려온 피델 카스트로도 이제 82세의 노인이 되어 병상에 누워있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약한 황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생의 황혼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일지라도 또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무신론자일지라도 인생의 황혼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도록, 그리하여 평생동안 추구해온 욕심과 이기적인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또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으로부터의 초대를 준비하며 다시 한번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보아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