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목사님 안녕하세요?
서울 강서 성서 아카데미(강서구 발산동 소재) 조성윤 목사입니다.
올 초부터 인터넷을 통해 목사님의 은혜로운 창세기 강해를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4장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에 대한 해석에서 한 가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제사 후 가인이 이유 없이 아벨을 죽인 것이고 그 원인은 아담의 죄가 전가되어 드러난 것이라고 간단히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죄의 유전성에 의한 파급성의 정도로 볼 때 목사님의 말씀은 옳습니다. 큰 원칙에서 공감합니다. 그러나 사건 이해에 있어서 다소 평면적으로 단순화시킨 면이 없지 않나 생각됩니다. 오늘날 어떤 범죄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단순히 ‘그건 아담으로 인해 전가된 죄 때문이지’ 라고 한다면,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쉽게 공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죄 때문이라고 쉽게 결론짓기 전에 사건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와 안목,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우선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얽힌 실마리를 하나씩 풀 수 있는 것이죠. 성경은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서이기에 앞서 본질적으로 구원서이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본래부터 규정된 자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유랑의 길을 떠난 방랑자 가인, 그를 아벨 되게 하는 작업-그것이 곧 ‘하나님의 구원역사’라고 생각하고 그 첫 시작은 당시 사건을 기록한 본문 말씀에 대한 성실한 점검과 이해라고 봅니다.  

제사 후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을 좀 더 실체적으로 규명키 위해서는
우선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를 깊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오늘날 이 제사는 대부분의 성서주석가나 설교자들의 말씀에서 보통 개인적인 신앙문제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을 일깨우는 참된 예배의 모범적 사례로서 말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정성껏 예물을 잘 드려 하나님께 축복받았으며 반면 가인은 그렇지 못해 시기심에 의해 동생을 죽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개인적 신앙 관점에서만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까지 한 일련의 사건들은 다소 의외입니다. 한 가정이나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에서 개인적인 신앙문제로 갈등도 있고 대립도 있을지언정 형제간의 살인까지 이르는 극한 상황은 사실상 납득하기 힘든 거죠. 물론 과거 교회사를 보면 신앙노선의 차이로 교회 형제끼리 서로 대립하고 죽이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만, 가정 안에서는 좀처럼 그런 경우는 쉽지가 않습니다. 종교가 서로 달라 그렇다면 이해가 됩니다만 가인 아벨 사건은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경우입니다. 일부에서는 이 사건을 실제 사실이 아닌 영적 실존의 상징적 표현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 인격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육의 싸움이지요. 혹은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신앙의 형제끼리 벌이는 사랑과 미움의 전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미움도 일종의 살인이니까요. 그런 시각에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4장의 내용은 일차적으로 상징 이전에 구체적 현실세계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에 대한 증언이라는 점입니다. 실존적 의미 이전에 실체적인 사건 규명이 우선이라는 뜻이죠.

그렇다면 이 문제는 개인의 신앙과 실존적 차원을 넘어선 매우 다른 성격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제사를 단순한 개인의 신앙문제를 넘어 보다 새로운 시각에서 봐야 사건의 본질적 성격이 제대로 규명될 수 있다고 봅니다. 바로 구원사의 관점입니다.
이삭의 축복에서 보듯 제정일치(祭政一致)의 고대사회에서 제사나 제물의 흠향은 가문이나 국가 계승권의 승인과 관련 있습니다. 역사 드라마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오직 왕과 그의 후계자로 인정된 자만이 선대왕의 위폐를 모신 종묘에 가서 제를 올릴 수 있습니다. 반면 그 외 어떤 자의 제사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정통성이 없으면 선대왕들이 아예 받질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제사에 참여한 자가 대표자로서 모든 권력과 부를 차지하게 됩니다. 한 가문도 비슷합니다. 결국 상속에 따른 힘과 재산권의 독점입니다. 지금도 그러한 면이 남아있지만  이것이 고대사회 제사가 지닌 정치적 성격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는 것은 아담의 타락 후 끊어진 구원역사를 다시 새롭게 시작하셨음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준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아벨이 장자가 아님에도 하나님이 그를 구원 언약의 계승자로 세우셨음을 알리신 것입니다. 오직 신앙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을 적임자로 보고 그를 선택하신 것이죠. 영적으로 무지한 가인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서 하나님께 버림 받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을 제친 동생 아벨에 대한 분노와 시기심, 그리고 아비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함께 장자로서의 집안 권리를 아벨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이 든 것입니다. 물론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자존심에도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극도의 사랑의 소외감 같은 것입니다. 제사 후 가인이 아벨을 심히 미워하여 죽이기까지 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창세기 4장 2-8절). 에서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동일한 패턴입니다.

지금도 어떤 면에서 가인 아벨의 비극은 영육 간에 반복되고 있습니다. 교회 사명에 대한 주도권의 시비, 교회와 가정에서 일어나는 형제간의 오해와 불신, 대립,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시기심과 소외감, 자존심의 싸움과 물질의 문제, 재산권의 다툼….

모든 하나님의 법이 그러하듯 구원역사에서 언약의 승계는 영적차원입니다. 일반 세상과는 다릅니다. 가인과 아벨은 평소 행위대로 합당하게 받은 것입니다. 자신의 그릇에 맞게 분복대로입니다. 아벨이 구원역사의 대표자로 세움을 받았다 해서 하나님이 그를 가인보다 달리 편애한 것도 아닙니다. 집안의 모든 재산권을 아벨에게 넘겨준 것도 아닙니다. 하늘의 방법은 공의로우면서도 순리적이고 인격적입니다. 아벨을 죽인 후 가인이 너무 고통스러워 괴로워했을 때도 비록 책망은 했을지언정 냉정하게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표식까지 주며 보호해주고 위로해준 하나님입니다. 모든 인생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방식에 있어 구원의 뜻을 위한 구별과 구분은 있을지언정 편애와 차별은 없다고 믿는 것이 옳습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하늘의 공의로운 처사를 육적으로 판단해 오해하고 아벨을 죽인 것으로 봅니다. 이후 사랑의 소외감을 가진 한 실족한 자의 슬픈 운명이 시작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떠난 방랑자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겪는 험난한 삶의 노정이 그것입니다.

부족한 글이 다소 길어졌습니다. 목사님의 이해를 바랍니다.
조성윤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