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09 / 마 5:43-48 / 2010.05.16 / 개역개정판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오늘 본문에서 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닮는 자로 부름을 받는 신자들의 놀라운 특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결론에서 확인해 보겠지만,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고 요구하는 것들은 무거운 짐이거나 책임에 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되는 영광된 특권에 관한 내용이 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것으로 사랑이라는 것은 세상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원수를 사랑하는 경지, 그 내용에까지 확대되는 것임을 모든 신자들이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와 대도시키고 구별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가져야하는 사랑의 크기이며,
그것은 그냥 요구되는 어떤 법칙이거나 어떤 이상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그런 분이기 때문에 요구하는 신앙적 요구 사항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되는 것은 우리가 모시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주시는 관용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아니 하나님 당신의 어떠하심은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같은 하나님이 관용의 하나님이라는데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세상의 의와 구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의는 그 최고의 경지를 갈 지라도 그것은 도덕성을 넘어가지는 못합니다.
도덕성이란 옳고 그름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지금 성경이 예수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베푸시고 확인케하시는 의는 용서하는 의입니다.
감수하고 넘어가고 고쳐주는 그런 의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 가시면 바로 이 문제를 가장 대표적으로 대조시키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안식일에 제자들과 밀밭사이를 걷다가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습니다.
유대인들이 당장 시비를 걸었죠.
안식일엔 아무일도 하지 못하게 되어있는데 이삭을 잘라 먹는것이 하나의 일을 행한 것이 되고 안식을 범한 것이라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저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하는 뜻을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 라는 호세아 6장의 말씀을 인요하여 말씀하시면서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니라’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규칙보다 자비를 우선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오늘 본문보는 마태복음 5장4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구별없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대뜸 생각나는 것이 그러면 질서가 없어지지 않느냐 그 생각이 제일 먼저 일어납니다.
그러면 혼란만 생길 것이 아니냐, 옳고 그름이 없다면 그것은 혼돈 그 자체아니냐.
옳고 그름이 무효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옳고 그름이 최고의 덕목이 아니며, 최고의 법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한 법칙이 있는데, 그것이 관용의 법칙이라는 것이죠.
도덕법과 옳고 그름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 위에 또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사실 우리에겐 너무나 다행한 일입니다.
피조물 된 인간이 둉서라는 것이 없다면, 우린 사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사람들 입니다.
여러분 그 무슨 실수를 하면 미쳐 생각지 못해서 실수를 하곤 합니다. 그러나 조심하고 조심했어도 실수는 벌어집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대비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대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수는 일어납니다.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뭐냐하면, 용서일 것입니다.
우릴 누가 한번 넘어가주고, 기다려주고, 고쳐주는 것보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사실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것을 성경이 하는 얘기죠.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마가복음 2장으로 가보십시다.
같은 문제에 예수님께서 그 문제를 이렇게 또 설명하셨기 때문입니다.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또는 가며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7절에서 보는 바와같이 이번엔 뭐라고 더 이 문제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또 직접적으로 설명하시느냐하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인식일을 위하여 있지않다 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들은 우리가 그 요구를 지켜 성립시키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복되게하기 위하여 주시는 요구들 입니다.
법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가 존재하지않고,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존재하지않고, 우리를 위하여 신앙이 주어집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부모의 심정이 꼭 그렇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요구들은 그 원칙을 지키자고, 그 원칙을 세우자고 자녀를 강요하는 것 없습니다.
자녀를 위하여 세우는 것입니다.
요즘은 세대가 좀 변해서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지만, 우리 때에는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와라, 이것이 아주 중요한 십계명 중에 하나였습니다.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와라, 밥은 어디가서 먹어도 잠은 집에와서 자야된다, 중요한 십계명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법칙과 그 원칙을 보호하자는 것이 아니고 그 규칙이 가지고 있는 뜻이 자녀들에게 유익한 것이기 때문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법칙을 어긴다고 죽이지않습니다.
혼은 내지만 원칙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위하기 때문에 혼을 내지, 잘못에 벌을 가하느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요구하는 그 신앙의 대상이며 주인이고,
그 요구의 주인인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편 103편으로 가 보십시다.

6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7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이 8절이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굉장히 중요한 설명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할 때. 하나님은 말하자면 도덕성보다 자비로움이 우선해서 그 속성과 당신이 대표하는 내용으로 성경이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그러면 용서하는 분이고 자비로운 분이다, 그런 것이 최우선입니다.
능력과 도덕은 이것 다음에 나오지 그것이 먼저 나오지않습니다.
구약에서 대표되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는 물론 창조주다 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이 누구시냐하는 것은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묶어서 보다 본질적으로 얘기를 하면,
하나님은 여기 있는데로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증명된 사실이라고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7절에 있는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어떤 내용을,,, 8절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우리 출애굽기 설교를 할 때 설명을 했던 그 내용인데요, 집에가서 오늘 한번 찾아보십시요.
출애굽기 34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종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시내산으로 불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써 율법을 주십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올라가서 40일이나 내려오지않자, 기다리던 백성들이 지치고 신앙에 실패해서 우상을 만듭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사실 하나님을 진노케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꾸짖어시고 진멸하겠다고 모세에게 말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 그 능력으로 신실하심으로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으로 이 백성들을 구원하셨는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을 근거로해서 이 백성을 용서해 주십시요 라고 빌고,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하십니다.
그 사하실 때 모세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당신을 선포할 때,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이렇게 모세앞에 당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때 하나님 당신 스스로 선포하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선포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냐.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누구냐의 첫번째 본질입니다. 우린 이 사실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이 위에 나머지가 서 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9절 이하를 보시면,

9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우리가 피조물임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신적 도움과 보호와 인도가 필요한 자임을 기억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철없음을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 하나님이 당신의 자비로우심과 의로우심을 근거로 하여 그 아들을 보내셨으며,
그 아들안에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시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구원의 복된 것처럼,
부른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닮으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의 비유속에서 아주 적절하게 그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우리는 보통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로 알고 있습니다.
자기의 유산 상속분을 달라고해서 외국에 나가 허랑방탕하고 주려 죽게되자 할 수 없이 돌아온 아들에 관한 비유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이 아버지를 보십시요.
둘째 아들이 자기 분깃을 달라고 하는데, 오늘날 우리도 거의 비슷합니다만 유대사회에 있어서 유산은 부모가 죽은 다음에 주는 것입니다.
살아 생전에 달라고 하는 것은 상당한 불효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꺼이 줍니다. 그러나 나가서 다 탕진하고 돌아오죠.
그도 면목이 없어서 어떤 생각을 하느냐하면, 돌아올 때 ‘우리 아버지 집에는 그 하인들 중에 굶주리는 자 없다, 우리 아버지는 넉넉한 분이다’ 이게 다 아버지가 주인공인 겁니다. 그래서 돌아오면서 아버지를 만나 하인으로 살 생각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로써 반깁니다. 그렇죠?
20절에 있는 바와같이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잔치를 엽니다. 기뻐합니다.
이렇게 안합니다. ‘내가 너보고 뭐라 그랬니? 너 3년 가면 내가 잘 간다고 그랬지?’ 이렇게 안하시는 하나님인 겁니다.
아! 이거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 해보면 젊어서 신앙생활 잘 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분 젊었을 때는 그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 , 즉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충분히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의욕이 앞서는 때이기 때문에 신앙생활도 멋진 이상으로써 가집니다.
그리고 유효한 신앙을 갖고 싶습니다. 신앙이 반듯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결과를 맺는 신앙을 갖고 싶습니다.
그러나 결국 성경이 요구하고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신앙인생을 이렇게 세월을 지나서 경험을 해서 배우는게 뭐냐하면
‘관용’으로 오는 것입니다. 넉넉함으로 오는 것이죠.

이 오월이 되면 ‘가정의 달’ 처음에는 이게 ‘어머니날’ 하나로 시작한 것인데, ‘가정의 달’로 확장이 되었습니다.
이 때쯤되면 가장 대표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옛기억을 회상하는 글들이 신문지상에 자주 나오는데 어느 해인가 이런 기사를 읽었습니다.
따님이셨는데, 어렵게 살아서 어머니가 광주리 장사를 해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광주리 장사를 했다는 건 광주리를 파는 사람이 아니고 광주리를 이고 다니는 장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건어물을 팔기도하고 야채를 팔기도 했죠.
근데 어느 날 하교길에 친구들 하고 오다가 어머니를 만난 겁니다.
광주리를 이고가는 어머니를 만났는데, 어머니가 “얘 누구야?” 하고 불런 거예요. 반가워서,,,
근데 이딸은 순간 당황한 거죠. 자기 어머니가 광주리 장사를 하는 것을 친구들에게 발설할 수 없었습니다.
“아주머니 웬 일이세요?” 그랬습니다. 근데 어머니가 “어,,, 지나가는 길이었어”  그리고 도망 가셨다는 것입니다.
두고두고 후회스러운 거죠. 두고두고…
그 나이에 “아 어머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저랑 뭐 몇분외에는 없습니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그 때는 그것 못합니다.
그 때는 뭐 어떤 이념을 위해서 이상을 위해서 죽을 수는 있어도 혈서는 쓸 수는 있어도 그건 못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되면 지금 기억속에 나오는 어머니같이 ‘아주머니 웬 일이세요?’ ‘어, 지나가는 길이었어’라고 할 수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리로 부르시는 겁니다.
이 아버지를 보십시요, 큰 아들까지 대듭니다.
‘아니 재산 다 팔아먹고 허랑방탕하고 제멋대로 살다가 돌아온 아들한테 소를 잡는다고요? 저한테는 염소새^끼도 안 줬잖아요’
‘얘, 내께 다 네 꺼아니냐’ 기가 막힌 하나님이죠.
이 비유를 예수님이 하시죠.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에 근거하고 무엇에 목표할까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근거하고,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목적할 수 있는 복으로 부름을 받는 겁니다.
하나님이 심사위원이거나 심판관이 아니십니다.
어떤 도덕이나 임무를 우리에게 부여하고 어떻게 하나보자 하는 분이 아니고,
당신을 닮으라고 합니다. 당신이 누구신가에 근거로하여 기독교 신앙은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보내셨으니까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는 말이,
지옥 가지않고 천국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책임져야하는 혹은 하나님이 명령한 어떠한 기준을 만족시켜야하는, 어떤 임무를 완성해야하는 것, 보다 큰 것이죠.
하나님이 누구시냐에 관한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서는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이며,
그것을 이해해야 우리는 우리의 신자된 삶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현실과 실존, 삶의 모든 정황과 형편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의 사이에서의 갈등, 혹은 뭐 요구, 불만, 반발 이런 모든 것을 이렇게 싸안고 여러분을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세월이 흘러야 깨닫게 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 기이한 약속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를 다음에 더깊이 다루겠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것의 근거가 하나님이 누구시냐 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왜? 그리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아들이 되리라 이겁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요구는 없죠. 에베소서 5장에 당장 이런 지금 말씀한 이 요구가 그래서 등장합니다.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을 본 받아라는 것은 하나의 강요일까요?
말하자면 책임일까요? 임무일까요? 짐일까요? 할 수없이 지켜야하는 억지스러운 규칙일까요.
지금 우리가 살펴본 바와같이 이것은 다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없는 영광된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닮는 거 거든요.
하나님이 당신의 만족을 위하여 보통 쓰는 당신의 만족을 위하여 우리를 소모품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수단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을 닮게 하는 일에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당신의 영광과 거룩에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보는 바와같이 그것은 넉넉함으로의 부름입니다.
관용으로의 부름입니다. 물론 그 관용속에 도덕성도 있고 능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크죠.
성령의 열매에 나오는 것과 같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같은 이런 것들은 얼마나 귀합니까?
어떤 효능과 기술보다도 또 어떤 규칙을 지켜내는 무슨 책임 정직보다 더 크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큰데로 우리를 부르고 있죠.

그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예수의 희생,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 그 모욕과 고통속에 죽으심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그냥 진정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보^지않고는 참으로 고통과 희생에 불과합니다.
고귀한 것이죠. 여러분의 삶에 여러분의 자기성취와 자기증명보다 더 큰 것이 뭐냐,
그러면 이웃을 위하여 여러분들이 힘이되고, 그들을 고쳐내고, 그들과 함께 갈 수있는 힘일 것입니다.
함께 갈 수있는 힘, 혼자 상대를 이기고 저들을 희생하여 그 위에 승리를 가지는 것보다,
내가 희생하여 저들을 승리케하여 함께 승리로 가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예수안에서 부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되는 진리들 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끝나죠.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것말고 다른 것으로 이것을 대체하시면 안됩니다.
중간에 얘기한 것같이 도덕성이나 임무, 능력이나 업적으로 이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되시고 우리를 그 자녀로 부르사 우리가 하나님을 닮게 하시고 하나님의 요구하심과 붙드심과 인도하심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합당한 그 약속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앞에 감사드립니다.
승복합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기로 약속합니다.
그 하나님이 어떠하심을 나의 인격과 나의 삶에 순종하기로 약속합니다. 지켜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