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08 / 마 5:41-42 / 2010.05.09 / 개역개정판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오늘 본문에서 보는 ‘억지로 오리를 간다’ 하는 내용은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이 로마에 속국으로 있었고, 로마법에 의하면 정치적 군사적 이유로 현지인에게 부역을 시킬 때, 그 부역을 시킨 장소에서 시간은 얼마나 시킬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거리상 그 부역자들을 모은 자리에서 2킬로 이상, 오리 이상 데리고 갈 수는 없다는 법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정치적 권력에 의하여 그 억지로 가게된 이 통제력의 피해를 보는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십리를 가라’ 이렇게 답하심으로 우리 지금 생각하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허락하는 하나님의 의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본문에 있는데로 정치권력 혹은 정부의 권세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은 권력투쟁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세상 권세와 힘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세상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는 전혀 다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셈이죠.
실제로 로마서 13장에 가보시면 세상 정권에 대하여 세상은 긍정적인 이해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그 관계되는 성경구절은 7절까지 이어지지만 우리 4절까지 본대로 세상 정권을 하나님의 허락하신 통치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냐하면 모든 정부권세는 국가와 사회에 최소한의 질서를 지키기위한 권세로써,
하나님의 의하여 허락된 권세라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실제로 모든 정권들이 다 만족할 만한 정권이 아니었다는 건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만,
마음에 들지않는 잘못된 정권이라 할 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게 사실입니다. 무정부 상태보다 무서운건 없죠.
그래서 정부의 권세라는 것이 소극적이지만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아래 이 세상과 인류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넓고 크신 통치의 한 은혜로 주어졌다, 우린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억지로 오리를 가게하는 정치권력과 하나님의 통치의 본질은 매우 다르습니다.
지금 로마서 13장에서 본 바와 같은 이런 정부의 혹은 정치의 권력이라는 것은 일종의 통제력입니다.
법으로 규제하여 초소한의 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강제집행하는 힘이죠. 악을 행하고 범죄하는 자들을 처단하여 사회를 지킵니다.
그러나 그런 권세속에 적극적인 힘은 없습니다.
통제력으로 쉽게 도덕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이런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는 하나님 통치의 의로움과 자비로우심을 정부권세가 만들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르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 가지는 하나님의 통치의 다름은,
세상권세가 가지는 통제력과 다른 것이다, 그것을 너희는 순종하고 그 통치의 의를 드러내어야 한다 라고 지적받고 있는 셈이죠
마태복음 4장에 가시면 예수님께서 그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전에 광야에서 준비하시며 그 사단에게 세번의 시험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여기 보시다시피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허락하며 실현하기 위한 것인데 그것은 세상권세와 다르습니다.
세상권세와 다투지도 싸우지도 않습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자기에게 경배하면 세상권력을 주겠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얘기하느냐하며는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낸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온 이유는,
힘으로 인격들을 혹은 존재들을 통제하러 온 것이 아니라, 조작하고 압제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하는 통치에 우리를 불러 하나님앞에 항복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려고 왔다 그럽니다.

기독교신앙이 갖는 하나님 통치의 본질인 하나님의 의는 지금 보시는 바와같이,
세상이 가지는 통제력과 전혀 달리 그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은혜로우신 허락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는 우리 기독교 신앙인들이 즐겨 표현하는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은,
하나님의 통치아래 초청받는 복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통치의 의, 그 통치의 본질은 세상의 권력과 달리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은 너무 자주 쓰이고,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것이고 모든 경우에 정답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사실 우리 신앙인들에 있어서 진부합니다.
현실적인 신앙의 갈급함앞에 믿음이니 사랑이니 이런 정답들은 자주 자주 우리를 불만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억지로 오리를 가는 문제에 제시된 기꺼이 십리를 가라는 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통치가 가지는 그 사랑을 본질로 하는 하나님의 의의 내용이 얼마나 세상과 다르며 큰 것인가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보는 여러분 잘 아시는 사랑에 대한 성경의 정의를 생각해 보십시요.
맨 처음 나오는 사랑의 정의는 이겁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조작하지 않는다, 강요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영어 표현이 좀 더 본문에 가까운데요. ‘Love is long suffering’ 고통스러운 것이랍니다.
고통스럽다는 건 여기서 뭘 의미하는냐 하며는 상대방을 내 마음에 들게 강제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중요한 본질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존중하시고 우리가 마음에 안드는 것을 통제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억지로 오리를 가게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구원의 놀라움이죠.
우리는 그 사랑에 대해서 여러분 현실속에서 매일 그 사랑을 말하고 또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랑이 얼마나 힘든가를 경험하십니다.
부부사이에 또 부모와 자식사이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린 통제합니다.
부부 싸움은 늘 그겁니다. 나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은 왜 내 마음에 들지않냐 이겁니다.
자식한테도 물론 그겁니다. 물론 사랑해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하면 너무너무 모자랍니다.
우리가 지금 신자로써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를 믿노라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사랑으로 우리를 대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사 당신의 통치아래 두셨기 때문에 가지는 현실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불만스러워하는 현실이죠. 우리는 하나님이 통제력을 행사했으면 싶읍니다.
하나님이 내 환경을 바꿔주고 내 지금의 갈급함을 문제들을 즉시 해결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들의 소원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않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우리의 지금 당면 문제를 해결해 주도록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되기를 거부하십니다.
그래서 신자의 인생은 고달픕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실존속에서 우리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나님의 통치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배우게 하시며, 우리를 깨닫게 하시며, 우리로 승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서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십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정의하는 이어오는 말들을 보시면,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감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성을 내지 않는다는 거는,화를 낸다는 거는 통제력의 한 방법이죠. 그죠.
화를 냄으로써 입을 입을 막아버리고 내 고집을 내 주장을 관철시키는, 하나님은 그런 일을 안하십니다.
성내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온유하며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딥니다.
이것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 묘사되는 세상의 어떤 힘, 통치권의 본질과,
하나님 통치와 대조시켜 우리에게 가르치는 너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를 누리고 있고,
허락받고 있고 그리고 그 의를 행사해야 된다 라고 가르치는 부분이죠.
마태복음 20장 25절에 가시면 바로 이 문제로 예수님 공생애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과 이런 일종의 다툼을 가집니다.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이 죽어셔야하는 이유를 사실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많은 초월적인 기적들, 오병이오의 기적이나 바다를 잠잠케 하거나 중풍병자를 고치거나 죽은자를 살리는 능력으로 말하자면 정치적 군사적 우위에 있는 로마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리라 기대했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종교라는 이름이 세상권세보다 커야 하리라 그렇게 기대를 했죠.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의 기대와 전혀 달리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억울하고 오해받고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그 오늘날에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당황해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면,
우리의 믿음이 실천에 있어서 부족 할 지는 몰라도 고백과 믿음의 진심에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는데,
실제로 우리의 신자된 현실은 고통스럽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응답은 너무 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의 고단한 것, 또는 세상의 거짓된 것과 비교할 때, 우리는 어쨌든 상대적으로 나은데도 하나님은 보상해 주시지않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도 모르게 또는 본성적인 종교성과 결부되어 기독교 신앙을 정치적 권력으로 추구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이 사회속에서도 기독교가 이 사회에 영향력을 갖기를 원하는 진실한 의미에서도
정치적 권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데, 우리는 기독교가 정치적인 힘이었으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거라고 생각하고,
그것은 개인 모두의 신자된 현실에서도 동일한 기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각 개인의 신앙의 현실속에서도 실망하고,
실제로 국가와 사회의 일원으로서도 신자로서의 생활은 사실 틀립니다.
기독교 신앙은 정치적인 힘으로써 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길, 가르치신 길 그대로 우리는 사랑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을 견디며 기다려야 하며 믿어야 하며 섬겨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이 그리 하셨듯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통치와 다른 하나님의 통치를 증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통치속에서 우리는 큽니다.
세상의 권세가 가지는 억지로 오리를 가게하는 현실속에서 그 억지로 당하는 일속에서 우리가 반응하고 책임지는 하나님 통치의 백성으로써의 그 온유함과 사랑과 섬김이 드러나며, 그 때 우리 자신에게도 하나님 통치의 위대함이 더욱 분명해지고 우리를 통하여 세상은 세상의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의 다름을 분명하게 보는, 빛과 소금의 역할이 제대로 시행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치적인 권력이라는 문제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책임을 이렇게 떠넘기는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즉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이 나라와 민족이 기독교신앙을 가짐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되기를 바라는 힘으로써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성경이 요구하는 기도와는 사실 다르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국민으로써 이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써 우리가 속한 사회와 국가에 대하여 책임있는 그 기도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앞에 이 나라를 이 시대를 위하여 기도해야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라는 이름의 명분이 되고 권력이 되고 모두의 합의가 됨으로써
우리가 이 국가가 가지는 권력이 요구하는 억지로 오리를 가게하는 일을 면하려는 기도가 된다면, 잘못입니다!  
그렇게 될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이 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아무 근심걱정이 없는 나라가 되고,
내가 져야할 십자가가 없게되는 기도로써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기도를 하시면 안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통치속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못하고 해답이 없는 고통속에,
문제속에 직면해 있는 것을 불쌍히 여기고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국가와 민족을 들먹여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동일하게 여러분 개개인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 개인이 겪어시는 신앙상의 모든 여러분이 가지는 불만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으로 통치하시고 하나님의 목적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에 가 보십시다.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어떤 힘보다 더 큰 힘, 의에 있어서 진리에 있어서 생명에 있어서 가치에 있어서, 아니 그 모든 무엇 어떤 부분 어떤 내용으로든 세상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신성의 충만으로의 부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 바로 이리로 부름 받은 줄 알아야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목적하심의 대하여 우리가 그 아들 예수를 보내어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 이라는 것을 사랑과 의와 진리와 거룩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기독교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현실속에서 매우 곤혹스러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나중에 더 자세히 살피겠습니다마는

우린 기본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고백들이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하나님이 누구시냐와 가장 중요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거듭확인해야 됩니다. 이 문제를 놓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정말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누구시냐, 그가 나를 위하여 예수를 보냈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를 세상적인 가치와 세상적인 효용성을 떠나서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셔야 됩니다.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십자가는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냐하면!
이 지금 본문에 의하면 십자가는 이 세상이 의인된 예수를 죽이는 세상이라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낸 사건이며,
이 세상 권세의 거짓된 것과 허망한 것을 드러낸 사건이며, 또한 십자가는 죽음으로 결과될 죄인들을 구원해내는
하나님의 자기희생이라는, 하나님 통치의 자비와 능력과 그 복을 증언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결과될 자리,  
절망과 수치밖에 없는 곳에서도 생명과 영광을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와,
모든  것을 죽이고 더럽히고 파멸시키는 것밖에는 할 수없는 세상의 힘과의 대조. 이것이 십자가죠!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이런 하나님의 통치와 그 통치의 본질로써 이해하지 못하면,
사랑하라는 말, 용서하라는 말, 섬기라는 말들이 도무지 힘이 없어보이죠.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인지를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살면서 느끼셨다시피 나이가 드시면 여러분 인생의 경험이 쌓이면 결국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다운 것이라는 걸 배우게 됩니다.

인간답기 위해서는 영혼깊은 필요가 채워져야지, 다른 무엇으로도 그것을 대신 할 수없다는 걸 배우죠.
인생은 짧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 죽음으로 우리의 인생을 끝냅니다.
오래 살 것같고 세상이 제시하는 힘들이 유일한 해결책같은데,  살아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 모든 그 경험속에서 하나님 말씀의 진실된 것을 확인하고 세상의 거짓된 것을 확인합니다.
같은 골로새서 3장에서 지금 산상설교하면서 자주 인용하는 다시 3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확인합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다면 그 통치의 본질을 누리고 있고 책임져야하는 사람이라면 뭘 요구합니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척 보셔도 이 요구하는 것속에는 능력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적인 힘이 요구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세상에서는 힘이 아닙니다.
여러분 해보셔서 알겠지만 겸손하며 희생하며 용서하면 또 누구를 섬기면 지는 것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기는 것같지 않습니다.
성질을 부린 것같은 사람이 이긴 것같고, 참는 사람이 지는 것같아서 참 지기가 어려운데 옛날에도 있다시피,
그 사건이 지나고 집에가면 성질을 부린 것은 끝까지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본인 마음에 그 자리에서는 성질을 부리고 고함을 지런 것이 득의양양한데 두고두고 그것은 본인의 상처로 남고 미결의 문제로 남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지면 본인에게 상처로 남지않습니다. 그것은 실패로 남지않고 좌절로 남지않습니다.
여러분 사람사이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사람들한테 제일 지는게 뭐냐하면 우린 사실 더 큰 무기를 가졌는데,
그 무기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거죠. 사랑이라는 것, 용서라는 것, 섬기다는 것이죠.  
세상사람들은 술 한잔 먹으면 서로 치료를 합니다.
술 한잔 먹고 털어지는데, 우린 어떻게 성경들고 손잡고 기도하는데 털어지지가 않느냐 하는 것이죠.
사랑이 힘이 없다고 느껴서 그렇습니다. 용서하고 지는 것이 힘이라고 우린 아직도 승복하고 있지못하고 있는 것이죠.
이 문제들은 여러분 마음에서 그 진심이 우러나오기를 기다리셔서는 안됩니다. 노력하고 연습하셔야 됩니다. 노력하고 연습하셔야 됩니다!

사랑의 통치속에 있는 걸 기억하십시요. 섬기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십시요.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자들이 가지는 특권이며 책임이며 세상권세가 해낼 수없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이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요구하는 세상속에 있습니다. 왜요?
그속에 있는 영혼들을 불러내도록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하는 것은 또 다른 힘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힘을 가지는데 그 큰힘은 물리적이지 않습니다. 정치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것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냐에 관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인생과 여러분의 존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내기 시작하면,
겉으로만 몰리던 사람들이 은밀히 찾아오는 결과를 금방 보십니다. 속얘기를 하러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여러분을 다르게 보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하나님을 보기 시작하죠.
그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계속 13절 이하로 확인을 하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는 은혜로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주를 힘입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주를 힘 입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부르시고 여러분에게 허락한 하나님 통치와 하나님 의의 놀라움을 누리시고 실천하시고 열매 맺으십시요.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써 이 세상을 삽니다.
하나님 통치의 무한함과 영광됨과 능력과 그 자랑을 품고 살며 나누며 살며 책임지고 살며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채우며 사는 인생되었습니다. 충성되게 하옵소서. 믿음을 지키게 하옵소서. 세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