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07 / 마 5:38-42 / 2010.05.02 / 개역개정판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오늘 본문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예수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를 가르치시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것은 보복의 원리에서 벗어나며 법적권리나 세상의 힘을 능가하는 하나님 나라의 의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을 대는 것이며,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을 주는 것이며, 억지로 오 리를 가자하면 십 리를 가야하는 하나님나라의 의입니다.

그러나 이 차이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추구했던 의와 예수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써 가지는 의는,
근본적인 것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지 세상에서 추구하는 윤리는 도덕이나 법적기준 혹은 내용보다 더 가는 이상,  완벽이라는 것을 명분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사랑해야 된다, 용서해야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무엇을 근거로하여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어떻게 그런 의를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셨느냐가 예수안에서 성경적으로 이해되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가르쳐주심으로 확인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더 더 지키기 어려운 불가능한 하나의 법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 근본적인 차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지키려고 했던 의와
그 근거와 대비되는 예수안에서 허락되는 진정한 하나님의 의의 차이를 오늘 살펴볼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가시면 21절 이하에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우리가 지금 오늘 산상설교의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을 대는 하나님의 의가 잘못하면 일곱번 용서가 일흔번씩 일곱번 사백구십번씩 용서로 확대되는, 그 크기만 더해지는 것으로 가면 지킬 수 없습니다.
일흔번씩 일곱번이라고 가르치시는 이 차이, 일곱번의 용서와 일흔번씩 일곱번이라고 가르치시는 그 가르침의 중대한 근본적 차이가 뭐냐를그 이후에 비유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비유는 어떤 의미로서는 분명합니다. 용서를 받았으면 용서해야 된다,,,그런 얘기죠.
남을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한다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식의 성경 말씀은 아주 중요한 예수님의 가르침속에도 나옵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구절이 나오죠. 어렵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않으면 우리도 용서받을 수 없다로 분명히 들립니다.
오늘 이 마태복음 18장의 비유도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않으면 주인이 그 종을 불쌍히 여기지않겠다고 하는 것과 일치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23장 서두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같이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습니다.
용서의 문제이기보다 그 통치자인 주인이 어떤 분이냐하는데 촛점이 놓여있습니다.
이 촛점은 그 용서에 있는데, 그 주인이 왜 용서하느냐 하는 것을 여기에서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것이죠.
주인이 만 달란트 빚진 종을 왜 용서하느냐, 이 달라트가 얼마나 큰 돈이냐하면 우선 그 다른 동료 종이 빚진 백 데나리온을 이해하면 됩니다.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실정에서 아마 십만원 안팍일 것 입니다.
한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 입니다. 약 이십년치 인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 달란트라는 건 우리가 사실 현실성이 없는 액수입니다.
너무 커서 예수님 당시 로마의 속국으로 있던 이스라엘이 해마다 로마에게 바치는 국세, 식민지로써 로마에 바치는 국세가 팔백 달란트였으니까 만달란트라는 건 상상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근데 이 주인이 이렇게 큰 돈을 무엇 때문에 용서하느냐 하며는 불쌍해서 입니다.
27절에 보듯이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이게 핵심입니다.
불쌍히 여겼다는 건 빚보다 이 종이 가치가 더 커다는 얘기죠.
빚을 갚기위하여 이 목숨을 빼앗기보다 빚을 포기하고 이 사람을 살리는 쪽이, 이쪽이 더 큰 가치라는 것을
나타내는데 이 비유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의 핵심은 네 주인이 너를 사람  대접을 했거늘, 너는 왜 네 동료를 사람 대접하지 않느냐 그런 얘기 입니다.
네가 주인한테 용서받은 것이 네가 사람으로써 대접을 받은 것인데,
너는 왜 네 동료를 사람으로써 대접하지 않느냐 이게 이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용서라는 문제는 쌍방간에 채무, 쌍방간에 원한의 문제보다 더 크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실 때, 어떤 가치며 어떤 존재인가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때만 용서는 가능하다 그 얘기입니다.
우리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듣는 이 유대사회에서의 법은, 사실은 보복을 제한하기 위하여 허락된 것입니다.
눈을 다쳤는데 눈 이상의 보복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지만 악용했죠.
우리가 법정신을 적극적으로 쓸 실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법을 악용할 수 있습니다.

이 마태복음 18장의 비유를 보면, 이 종은 만 탈란트 탕감받았지만, 백 데나리온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내 눈은 다른 사람 눈하고 다르습니다. 내 눈 다친 것을 다른 사람 눈을 하나 다치게 하는 것으로 해결이 되겠습니까.
보복이라는 것은 절대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행한다고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예수그리스도안에서 말하자면 예수님이 오늘 마태복음 5장에서 가르치시는 것같이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을 대라’라는 식으로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내 눈을 다친 것은 상대방 눈을 상하게 해서 회복할 수 없으나, 예수 안에서 넉넉히 회복되었기 땜에
보복을, 원한을, 살육을, 약탈을, 혹은 투기를 혹은 폭력을 중단할 수 있다.
아니 더 적극적으로 너희가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다라고 가르치는 대목입니다.  
이 부분을 성경은 로마서 3장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

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또는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예수안에서 허락된 구원은 무어냐!
그것은 은혜고 그것은 사랑이라 이렇게 가르칩니다.
지금 읽은 로마서 3장 23장에서 26장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요, 우리를 의롭게 한 구원이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안에서 하나님앞에 범죄한 인류를 은혜를 베풀어 용서하여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고,  
그 구원을 베풀어 하나님의 자녀 삼은 자들을 의롭다고 공포하시고 의를 증명하셨답니다.
어떤 의일까요?
여기 하나님께서 하나님앞에 범죄한 인류를 인간들을 용서하시는데 25절 하반절에 보시면 길이 참으시고 죄를 넘어가셨다고 합니다.

왜요?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의 잘못을 넘어가기로 하셨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인류를 구원하신 구원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의를 나타내셨다는 것은,
그의 옳으심은 사랑안에 있는 의라는 것이죠.
옳고 그르다가 전부가 아니라, 옳게 만드는 의, 사랑이라고 선언하시고 실천하셔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의가 뭐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가 나타났죠.

그럼 구원받는 우리들, 26절이 있는 바와같이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무슨 의가 나타났느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다! 라는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구원에 나타난 의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와 함께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 구원한 우리가 누구냐가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를 누구라고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자 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그것이 모든 용서의,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의의 본질입니다. 사랑입니다.
어떤 사랑?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만이 아니라 나만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포함하여
만 달란트 빚진 종을 용서한 주인같이 나를 용서하시고, 모든 인류를 용서하시기로 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보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의 억울함을 풀기 위하여 누구를 폭력으로 해하지않습니다.
이것이 천국의 의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의죠.
에베소서 5장에 가시면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사랑을 받는자, 라는 것이 이유, 내용, 근거가 되어 우리는 누구를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두에 말씀 드린바와같이, 백 데나리온 빚진자를 용서해야되는 이유는, 우리가 만 달란트 빚진 것을 용서받았을 때,
우리가 사람대접을 받았고, 우리가 받는 사람대접이 주인이 나에게 허락한 대접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는 내 이웃과 내 동료를 동일한 인간대접을 해야 된다는 측면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의가 생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주는 것같이’ 라는 말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에게 허락된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고백이 가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아는 자에게만 가능한 기도입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해야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여 나를 대접하듯이,
내 이웃을 대접하고 하나님앞에 소중하다는 걸 아는 그 이유, 그 근거아래서만 실천 가능한 천국의 의 입니다.
우리는 그가 아무리 결함이 있고 아무리 부족하다 할지라도 그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법을 지키거나 윤리를 지키는 문제를 지금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기독교인이라는 신분과 그 허락된 통치가 어떤 질서, 어떤 원리, 어떤 내용, 어떤 목적 통치자의 인격 성품이 어떤 것이냐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보복을 하지않는다, 폭력을 하지않는다라는 아주 분명한 거칠고 분명한 폭력적 행위에만 국한시켜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궁극적인 율법을 가르치며 예수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천국의 의를,
사실 우리가 얼마나 매일 의식하지 못하고 우리의 삶속에서 쓰고 있느냐하면 우리 아주 자주 쓰는 이런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아주 만연되어 있습니다.

저는 많이 아픈 사람입니다. 아 이게 뭐 자랑이겠습니까.
아픈 사람은 아픈 얘기를 해서 위로를 받고 싶습니다. 저도 그 얘기를 저도 모르게 합니다.
“많이 아픕니다”
“아, 어떻게 아프십니까?”
“아침에 일어나도 한번도 상쾌하지않고 오는 감기 가는 감기 다 걸리고 아직도 내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면 꼭 이따우 얘기를 해요)
“면역력이 떨어져서 그래요”
그건 저도 안다니깐요. 의사선생님이 그러는 건 되는데, 우린 뭐라 그러느냐하면,
“목사님, 그렇게 아프신데도 어떻게 그렇게 훌륭하게 목사일을 하세요?”  그러셔야죠. 여러분 아픈 사람 만나면 꼭 그렇게 하세요.
“얼마나 편찮으세요? 참 그래도 용하세요, 그래도 뭘 꿋꿋이 견디시는데요, 오늘 제가 맛있는 것 사드릴께요” 그렇게 하세요.
그걸 하셔야죠. 그걸 우리가 못하는거예요. 상대방의 처지를 내가 이해해서 빨리 입을 닫고 싶죠.

우리가 제일 못하는 게 뭐냐하면, 상대방 얘기를 끝까지 다 못듣는 거예요.
빨리 입을,,, 그건 이렇고 이렇고 이런 얘기 아냐? 왜 그러죠? 우린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 영혼의 만족이 없기 때문에 우린 누구의 불평과 누구의 원한을 들어 줄 여유가 없습니다.
물론 위로할 힘은 없습니다. 빨리 입을 닫고 말죠.
나는 아직까지 그것이 사건으로 나타나진 않았을지라도 무슨 사건이 터지든지간에 내가 모든 사건의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걸 압니다.
억울함과 분노와 자폭이  근본적인 우리의 이 한계속에 가장 중요한 본질로 자리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우린 싫은 소리도 듣기싫고 누구의 넋두리도 들어줄 힘도 없습니다. 그기에 대한 얘기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여러분이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이 요구하는 식으로 나타나지 않아서 혹 만족하시지않고 확인되지않을 수는 있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다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신다면, 성경이 얘기하는 식으로 얘기하자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여 그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걸 놓지면 우리는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린 신앙인으로써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천국의 의라는 것을 다만 명분으로는 절대 지키지 못합니다.
자기확인을 위해서 쓸 수가 없습니다. 늘 갈증을 느끼고 늘 부족한 것을 본인이 알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이 문제는 지금 에베소서 5장 1절에 보는 바와같은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라는 말을 여러분들이 제대로 이해하지않는 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만족을, 감사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 문제는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이렇게 좀 더 자세히 나옵니다.
이 표현속에 있는 여러분의 신자된 특권들을 여러분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들을 분명히 하는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하나님이 택하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입니다. 어떻게 하라고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어라’

이것들은 고급한 윤리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 거룩하심으로의 부름이며, 하나님의 영광됨으로의 부름입니다.
인간이 고급한 인격으로 신의 성품으로 부름받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리 부름받고 있습니다.
왜요?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통치, 그의 베푸시는 은혜, 능력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13절,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어떻게 용서하셨다고요? 십자가를 지시는 희생과 사랑으로 용서하신 것같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는 것이, 성자 하나님의 깊으신, 성부 하나님앞에 깊으신 순종의 길이었던 것 기억하십시요.
아버지의 기쁘하심에 참여하신 길이었다는 걸 기억하십시요. 그것은 결단코 희생 정도가 아닙니다.

그 희생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존중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존귀하지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의 실력없이 상대방을 예의로 대할 수 없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예수안에서의 천국의 의라는 것은 이런 은혜와 이런 사랑과 이런 능력속에서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안에 있는 구원입니다. 계속하죠 14절,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의는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진실함이든 성결함이든 뭐든 사랑을 떠나서 있는 요구는 없습니다.
사랑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죠. 사랑이 가장 큰 것입니다.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평강과 감사라는 것은 자기 문제가 해결되지않고 넉넉하지않고 갖을 수 있지 못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신앙고백, 여러분들의 믿음에 성경적인 설명에 귀 기울이십시요.
여러분이 가지는 여러분의 신앙을 확인하고 싶으신 것들을 세상적인, 피상적인 것으로 대체하지 마십시요.

참다운 인간의 복과 자랑들은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허락하시는 넉넉한 신의 성품과 거룩과 영광으로 부르신 그 부름과 허락하신 축복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여러분의 살아가는 인생의, 또 여러분과 만나야할 이웃과 사회앞에  우리가 가진 힘이며 세상과 다른 힘입니다.
이 힘이 성경이 말하는 빛이고 소금입니다.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의 인격이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이 가지는 놀라운 예수안에서의 구원의 충만함 그 넉넉함 그 영광됨을 확인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이웃에게서 빼앗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웃에게 우리의 억울함을 풀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해결한 자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은 자로 이게 거룩하게 살게 하옵소서, 넉넉하게 살게 하옵소서.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랑받는 자로 감사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지금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하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의 그 인격과 인생의 고귀한 것을 확인하고 충성을 약속하고 돌아가는 심령들위에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으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