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06 / 마 5:33-37 / 2010.04.25 / 개역개정판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헛맹세를 하지마라 잘못된 맹세를 하지 말 뿐만 아니라,
너희는 맹세하지마라, 너희는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는데 까지만 너희의 한계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대목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아야되는 그 대조, 그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이고,
예수그리스도로만 가능한 천국의 의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모든 것이 율법의 진정한 본질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부터 이 모든것을 이해 해야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본질적인 의미로써 이해되지 않을 때,
율법은 자기의에 불과해진다 하는 지적속에서 가르침을 듣고 있습니다.
헛맹세를 하지말고 맹세한 것을 지켜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맹세자체를 하지말라고 합니다.

맹세란 말하자면 신하고 하는 약속이죠.
그러나 인간은 신에게 자신의 약속을 지킬만큼 능력이 있지않습니다. 신실 하지않습니다.
게다가 진실된 맹세라는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죠. 거짓맹세라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과의 약속을, 신을 속이는 거짓 약속을 할 수는 없죠. 상대방이 신이라면 그 거짓된 약속을 신이 속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거짓된 약속, 거짓된 맹세가 존재하는 이유는 결국은 그것이 사람을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니까 맹세가 신과의 약속을 위하여 동원되는 게 아니라, 또는 신앞에 서는 진지함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속이기 위하여 동원되더라 말이죠.
왜 이웃을 속여야되죠?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천국의 의, 우리 아주 넓게 구원이라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생명과 진리로 거듭나지 하고는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우리 맨처음 살펴본 건 두려움, 두번째 살펴본 건 기만, 그리고 오늘 살펴본 바와같이 권력으로 그 한계를 메꿀려고 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책임질 수 없고, 또 어떤 안전한 근거를 확보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여러가지 두려움에, 또는 거짓된 해결책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 통재력입니다.
일반적으로 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힘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렇게해야  그나마 자신을 어떻게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는 것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그것이 우리 밖에서보는 물리적인 힘이나 혹은 물질적인 힘이나 또는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이런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까지 그렇게 사용한다는 것이죠.

종교를 그 종교의 주인인 경배의 대상인 신과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동원하여 자신의 무기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신앙이라는 것이 그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 당사자의 어떤 영적인 인격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압제하는 권력의 수단에 불과해진다는 것입니다.
여려분 잘 아시다시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든지 자신의 옳음을 증거해서,
상대방을 압제하는 통제력으로 쓰는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가끔 갈등과 다툼이 생기는데 다툴때 이말을 먼저하는 사람이 이깁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실꺼야,,,’  아, 무서운 말이죠. 너만 모르고 있다 이거죠.
그 이렇게 하나님을 먼저 끌어다쓰는 사람이 옳은 사람이 되죠. 그 다음에 할 게 없어요.
남은 건 사탄만 남는데, 그 사탄을 부를 순 없는거고, 너무너무 억울하죠. 우리에게 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앙이라는 이름이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통제력이 되면 교회는 힘을 잃습니다.
교회는 도덕성이 아니고 신성의 문제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자녀 삼기 위하여 허락하신 구원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허락되지 않으면 사랑의 본질인 생명과 진리가 허락되지 않으면,
사랑이 없는 생명과 진리는 그것 자체로 이미 이기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어떤 명분을 갖다대도 우리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가지 못하고 이웃을 통제하는 우리의 독재밖에는 결과시킬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끝절 37절에 있는 말같이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라는 결론을 주십니다.
이것은 기독교신앙에서는 예수안에 있는 구원이 허락한 하나님의 자녀되는 이 하나님의 자녀된 통치에서는 하나님이 권력자입니다.  
하나님만 권력자요 통치자이며 우리는 그 통치를 누리는 자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에 가면 이 문제가 이렇게 사도바울의 입을 통하여 증언됩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아, 깊이 이해해야되는 말씀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헌신과 그 소용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어느 길로 인도하든지 어떤 경우로 인도하든지 나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함으로
내 인생이 내가 나를 책임지고 나의 유익을 구하는 통치아래 있지않고,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다는 것을 나는 증언하겠노라, 그런 뜻입니다.
내가 흥해도 좋고 망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부름, 하나님의 통치가 갖는 이세상이 대신 할 수없는 진정한 복과 영광을 기꺼이 내 증언하겠다, 내 삶으로 증언하겠다 그런 뜻입니다.  
나를 세상이 어떤 식으로 다루고 내 인생이 어떤 경우로 꾸며진다고 할지라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다는 것을 세상은 어떻게 할 수없다.

그르므로 나는 어떤 경우라도 내가 순종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인 것을, 하나님이 드러내시는 일에 쓰신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아무래도 좋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죠. (좀더 감격적으로 묘사했어야 되는데^^) 이런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이 말씀을 다시 생각케 합니다.
어떤 말씀인고하니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보다 깊은 이해를 줍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과 뭘 비교하고 있나 보십시요.
사랑없는 천사의 말, 뭐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감격스러울 수도 있고 놀라운 어떤 것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결국 그것이 자기 자랑으로 갈 수밖에 없고, 자기 자랑은 이웃을 발밑에 누름으로써 획득하는
결국 하나의 폭력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 얘기죠.
우리 세상에 살면서 한 사람의 성공이 가지는 기쁨은, 사실 보이지않는 수많은 경쟁자들을 이긴, 그들을 울게하여 얻은 승리입니다.
우리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마는
또 예수를 믿는다고해서 사랑을 얘기한다고해서 경쟁이라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 승리를 본인이 어떤식으로 확인하느냐할 때, 우리는 누구가를 이긴 승리입니다, 그렇죠?
그러나 성경이 사랑을 얘기하면 자기를 이긴 승리입니다.  
자기를 이긴 승리란 이웃을 해치거나 약탈하여 내 필요를 채우는 승리가 아니라는 뜻이죠.
내 필요를 하나님에게서 얻기 때문에 내 이웃의 것을 뺏을 필요가 없이 내가 얼마든지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승리입니다.
우리의 경쟁은 사람 사이에 능력경쟁이 아니라, 성실함의 경쟁이요, 신실함의 경쟁인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의 싸움이지, 이웃과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신자들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의 방식속에 함께 처해있지만,
그 근본적인 원리나 내용에 있어서 또는 목표에 있어서 세상과 다른, 아주 다른 이유입니다. 내용이기도 하죠.
사도바울은 열심히 사는 겁니다. 빨리 죽어서 천국가겠다는 욕심을 갖고 있지않습니다.
그의 삶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꺼이 사는 것은 사는 것만이 유일한 버팀이고 죽으면 끝인 인생이 아니고,
그의 삶이 살아서 당하는 모든 경우의  그 경우와 환경과 조건을 예수안에서 담아내고 해결하고 답을 주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삶이 이유이기 때문에, 그는 열심히 살아 남겠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죽어서 그것이 더 드러날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이 죽음으로 이끈다면 기꺼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이죠.
전혀 다른 이유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실 겁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는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없이 신앙좋으면 골치 아픕니다.
이 교회의 그 기독교신앙이라는 것을 이런 어떤 고급한 종교적 수준으로가는 싸움으로 이해를 하고
그것을 이웃과 비교해서, 믿음의 식구들고 비교해서 확인하려고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그 이웃을 해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해야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종교라는 것도 결국은 결국은 이웃을 잡게되지, 이웃을 위하여 희생하지 못합니다.
아, 무서운 현실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통치의 가장 큰 본질속에 있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차고 넘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쥐어짜서 이웃을 먹일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이 사랑이 이렇게 강조되죠.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다 그냥 하나의 자기 증명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 쉽게 기독교신앙을 위하여 우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집니다.
한국교회가 더 열심을 내고 더 영향력 있기를 바라고, 또 개인으로도 내 신앙이 더 능력있고 더 쓸모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 열심이 영향을 주겠다라는 숭고한 차원에서 진실한 차원에서 힘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힘이 되기를 바라면 우린 금방 무슨 소리부터 하냐하면 이렇게 군대같이 만들고 싶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한마음 한뜻이 되고 또 정치적으로 영향력있는 자리에 신자들이 포진해 있기를 바라고,
보란듯이 우리 기도 한번해서 국가와 사회에 거부할 수없는 기독교의 힘을 보여주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그 속에 뭐가있냐하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안하시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보낸것으로 할 일 다했고, 이제 하나님은 할 일 다했으니까,
이제 우리가 힘 써 그 하나님이 하신 큰 일 독생자 예수를 보내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낸
그 큰 은혜를 힘입어 이제 우리가 우리시대의 사회나 국가나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로 하나님의 통치로 바꾸어놓자
하는 정말 진실한 소원으로 권력을 탐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약간 간과한 구석이 있습니다.
이사야 42장에 가면,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하나님이 보내실 종, 메시야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 메시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종으로 이땅에 보내질텐데
그는 자비로움 인자함 은혜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고 약속됩니다.
5절 이하에 한번 더 다른 면으로 이 메시야가 소개됩니다.

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그는 구원을 베풀리라 이겁니다. 모든 인간의 난제들을 다 해결하고 그 비극을 다 풀어줄 것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 종, 이 메시야, 우리가 아는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이런 목적으로 보내십니다. 이런 약속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뭐라고 결론짓느냐하면,

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땅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이표현은 약간 좀 불경한 표현으로 들리는데 조금 이해하고 들어주시길) 노릇을 중단하지 아니하리라, 이런 뜻입니다.
여호와라,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여호와라는 이름은 우리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자기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해방하라고 보내실 때 불렀던 이름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옵소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그게 여호와라는 이름의 풀이입니다.
우리 말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로 풀었고, 영어로는 ‘I am that I am’ 입니다.
나는 나로써 나니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죠.  원어에 더 가깝습니다.
나는 나로써 나라는 뜻은 뭐냐하면 나는 언제나 나인 하나님이다, 나는 나임을 잊거나 중단하거나 유보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심을 그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을 못박던 때의 하나님이신 것과 동일하게,
그 후에도 여지껏 온 세상과 우주와 역사속에서 그 여러분 각자의 인생속에서 하나님이십니다.

그 아들을 보내신 때만 더 하나님이셨고 그 후에는 그 큰일을 이루셨기 때문에 그때보다는 덜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 아들을 이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이시는 그 때의 그 열심과 우리를 향한 사랑의 정도는 여일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신 것을 약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부분을 놓치는 것이죠. 우리가 힘을 갖고 싶죠.
하나님이 지금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과 방불한 방식, 능력과 열심과 지혜와 뭘 모든 면에서 우리를 향한 지극함에 있어서,
동일한 통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믿지않기 때문에 우린 우리가 권력을 갖고 싶은 것입니다.
그기에서 속아 넘어가는 거죠. ‘너희는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여 네 인생을 살아라,
그리고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이란다 이래요.
숙명론을 얘기하자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 열심히 사셔야됩니다.
그러나 보란 듯이 살고있지 않다고해서 여러분의 인생과 여러분의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린 아까 빌립보서 20장 21장에서 본 바와같은 사도바울의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가능하다는 걸 압니다.

바울의 생애는 당시 위대하지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순교 당하고 만 사람입니다. 죽어버리고만 사람이죠.
그리고 자기가 많은 교회를 세운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를 위하여 항상 가슴이 조마조마했던 사람입니다.
멋진 부흥사란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 인생도 별 것 아니겠죠.
그러나 하나님이 내 이웃앞에 나를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이웃을 통제할 힘을 주시지않고 내 이웃을 사랑하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가 실력이 있어서 사랑하는 정도까진 아닐지라도,
어쨋든 통제력을 주지않아서 입다물고 있어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형편을 살게하고 계십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나중에 사도가 된 다음에 자신이 사도가 된 과정을 이렇게 디모데전서 1장에서 설명합니다.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이 12절에서 14절에 나오는 내가 지금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서 된 것이다, 나를 기다려줬다, 16절에 보면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자, 이 하나님의 기다려주심, 긍휼히 여기심, 그를 구원하신 은혜, 이런 것들은,
조금전에 본 이사야 42장 말씀같이 나는 여호와라, 내 이름은 여호와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는 하나님임을 잠시도 중단하지않는 하나님이라, 내 통치는 중단되지않는,
내 통치는 가장 큰 능력과 가장 큰 지혜와 가장 큰 신비와 은혜와 자비속에서 허락되느니라, 그런 얘기죠.
이사야 42장 8절에서는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겠노라’ 라고 못을 박습니다.
하나님의 하심, 주시는 복, 즉 하나님의 통치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없는 것이라는 거죠.  
세상이나 우상, 우리가 뭐 하나님외에 갖다부칠 어떤 것들, 어떤 힘과도 비교할 수 없는 힘으로 나는 너희를 찾아오는 하나님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것에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아니하겠노라, 그 약속이 바울에게 이렇게 나타나 있는거죠.
그는 어떤 사람이었다고요? 그는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은혜를 입습니다.
하나님이 바울 하나를 자기의 종 삼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능력을 다른것이 세상이나 우상이 하지못하는 방법을 썼나 보십시요.
기다려주셨습니다. 긍휼히 여기십니다. 용서하십니다. 그 마음을 항복시키십니다.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무서운 힘이죠.
감사한 힘이죠.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맹세를 필요치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하나님의 통치아래 살면서 ‘너 인생이 힘들지않냐?’,  ‘힘들다’,  ‘그럼 너 이렇게 살아라’,  ‘그렇게는 못하겠다’,  ‘왜 그러냐?’,  ‘나 예수 믿는다’,  ‘예수 믿으면 복되냐?’, ‘그렇다’,  ‘그럼 너 기쁘냐?’, ‘아니다’, 그렇게 하라 말이죠. 그렇게 하란 말이죠.
그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자된 신앙의 가장 중요한 내용, 즉 순종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것이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의죠.
하나님의 통치아래 사는 자들의 부인할 수 없고 외면할 수 없고 속일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발견한 생명이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되는 데는 시간이 더 걸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길에 들어섰고 그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우린 여기에서 도망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겉으로 볼 때, 왜요? 자기의 의를 위하여 성실하며 고결한 사람만 못해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안에, 하나님의 통치아래, 예수 안에서 거듭난 자들이요, 예수없이 가지는 도덕과, 심지어 종교라 할지라도,
그것은 생명과 사랑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까 우리가 본바와같이 그의 삶을 해결하지도 이웃을 도울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진  예수안에서의 하나님의 통치, 그 의, 생명과 자비와 긍휼과 사랑의 의를
여러분들이 소유한지를 아시는 믿음으로 여러분들의 삶과  여러분의 신앙고백을 지켜나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안에서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 예수안에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하신 것은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요.
그것은 능히 우리 인생과 세상과 우리의 운명을 담아낼 수 있고 넉넉한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린 아직도 연약한 믿음으로 인하여 비틀거리지만,
그러나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난 자요 그 자녀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로써 우린 우리의 신앙을 놓을 수 없습니다.
힘을 더하시옵소서, 믿음을 더하시옶소서, 순종하게 하옵소서,
더깊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허락하신 사랑과 그 통치의 영광을 누리고 순종하고 이웃과 나누는 복된 인생까지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