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05 / 마 5:27-30 / 2010.04.18 / 개역개정판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오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십계명 제 7계명에 있는 ‘간음하지 말라’ 하는 말씀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예수그리스도만 할 수 있는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의 의와 다른 의, 예수를 믿는자들에게 허락되는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 율법을, 이 계명을 예를 들고 있습니다.
간음하기말라는 말은 너희는 들었지만, 나는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너희에게 선포한다, 그것이 7계명의 진정한 취지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오늘 본문으로 본 바와같이 이 문제가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하는것 때문에 그 앞에 있었던 살인문제와 같이 이 예수님의 설명도 자주 오해됩니다.
살인문제를 다룰 때, 살인하지 않았다고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 것이 아니라, 노하면, 형제에게 분노하면 이미 그는 살인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같이 여기서도 동일하게 그 행위의 여부가 아니라 그런 행위를 만들어내는 우리의 본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하자면 살인하지 말라가 분노하지 말라로 온 것같이, 간음하지 말라가 오른눈을 빼고 오른손을 잘라라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현실적으로 행할 수 있는 문제고,
말하자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현상이 아니라 원인을 제거하라는 명령으로 이해된다면, 이것은 다시 그저 율법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율법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우리 인간존재의 필요를 스스로 채울 수 있느냐 그 필요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있다고 믿는다라는 문제와 결부되기 때문에 앞에 살인문제에 있어서 그것이 인간이 자신의 한계와 무력함을 아는 공포에 관한 문제였다면, 오늘 이 간음의 문제는 인간의 한계와 무력함을 아는 기만의 문제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그 두려움을 남에게 화를 내고 남에게 해를 끼쳐 자기를 보호할려고 했던 것같이,
오늘 간음의 문제에서는 답이 아닌 것을 답으로 찾아 자기는 답을 얻은 것같이 스스로를 속이는 행위가 지금 간음의 문제로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려는 내용이다 그것이죠. 골로새서 3장 1절에 가 보시겠습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이 문제는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생명안에 있는 영생하는 존재가 되었고 영원한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나오는 5절 이하의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라는 이 대조되는 하나님 섬기지않을 때, 예수믿기전에 원죄상태에 있는 자연인의 모습과 비교하는 것 때문에 그것이 자꾸 도덕성으로 오해됩니다.
신앙의 내용은 도덕성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덕적인 분이고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를 성경이 논할 때는, 자연인과 신앙인의 차이를 비교할 때는,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존재에 창조주로써 그리고 복을 주시려는 부모로써, 그 통치와 복주심아래 보호받고 있는가, 그렇지않은가를 대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성보다 더 중요하게 생명에 관한 문제이며 영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자가 하나님의 통치, 그 생명과 거룩함으로 부름을 받고 약속받고 있고 보호받고 있는 것과 달리,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되고 하나님과 상관없을 때에는 우리가 어떠했느냐하면,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속에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다 우상숭배라고 묻습니다.

우상이란 여러분 잘 아시듯이 자기가 소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이루어 줄 수단입니다.
우상은 인격도 없고 도덕성도 없습니다. 능력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죠.
실상은 사람이 주인이죠. 사람이 우상을 만들 때 스스로가 만든 우상을 자신이 정한 내용과 가치를 만들어주는 힘만 갖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진정한 우상의 진정한 주인은 다시 자기자신으로 돌아오고 마는 것입니다.
그 자기자신이 자기의 주인이 된 인간이 만들어 내는, 즉 하나님없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은 여기있는 바와같이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입니다.
이것들은 다 지금 여기에 다 나열된 바와같이 도덕적이기전에 생명이 없는 것이고 진리가 없는 것들 입니다.
사망이 그렇듯이 시간이 흐를수록 썩어져가 그 자신에 생명없음이 나타나질 수밖에 없는 것들, 그것외에는 만들어낼 수가 없다하는 것과 대조됩니다.
이 문제를 왜 성경이 이런식으로 설명하는가하며는 체스트턴이라는 사람의 말로 기억하고 있는데, 정확치는 않습니다만, 이런말을 어느글에 했습니다. 창녀촌에 방문을 두드리는 그 두드림은 하나님의 방문을 두드리는 손길이랍니다. 기이한 표현을 썼죠.
그러니까 사람이 정력과 이런 음란한데 탐닉하는 것은 영혼의 갈증에 대한 몸부림이라는 거죠.
하나님을 만날 수없으면 무엇으로라도 그 갈증과 그 고통을 무엇으로라도 잠시 덜어야되니까 창녀촌에 문을 두드린다는 것이죠.

그러나 오늘 우리가 다루는 것같이 이 문제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우리가 눈을 빼고 손을 자른다고해서 우리 마음에 탐심이 없어지지 않듯이, 정력이 없어지지 않듯이 바꾸어 말하면, 그런것들을 덧붙힌다고해서 또 다른 하나의 팔을 덧붙힐 수있고 눈을 덧붙히고 무언가 필요를 외부로부터 들여온다고 해서 마음을 채울수는 없다는 대단한 역설입니다.
지체를 잘라 마음의 나쁜 솟아나는 생각을 없앨 수없듯이 우리의 그 잘못된 속을 밖에서 해결할 방법을 구할데도 없다 이게 오늘의 지적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지적받는 간음에 관한 문제는 다만 성적인 부도덕성을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나누었던 살인에서 살펴봤듯이 그것은 사람을 죽이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냐에 대한 한 나타나는 결함의 증상이었죠. 마찮가지입니다.
우리가 간음이라고 지적되는 이 성경의 지적이 얼마나 우리의 치명적이고 그래서 인격과 온 삶에서 늘 드러나는 현상이냐하면,
하나님으로밖에 해결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없이 인간 혼자 책임져야한다면 이런식으로 드러난다 라는 증상들인데, 그것이 오늘 골로새서 3장식으로 얘기하면 5절에 다시보죠.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이게 앞에 있었던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과 병행되는 겁니다.
평행법적으로는 지금 8절에는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본성의 습관으로 아직도 그 증상이 나오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대책이 없는 증상이냐하면, 여러분 주변에 술 드시는 친구분들 보시면, (혹 합석해 보시면 뭐 혹시 여러분은 사이다 먹고 그 자리에 앉아계셨을지라도 우리는 술을 한잔하면) 그 마음의 긴장의 끈이 풀어지고 속에 있던 얘기가 이렇게 술술 나오죠. 그래서 술이라고 그런다고 그러는데,
그 안주가 뭔가하면 앞에 놓여있는 음식이 안주가 아니고 누구를 비방하는 겁니다.
그 왜 하느냐 하는 얘기로 성경이 하는 거죠. 이건 얘기를 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럽습니다.
마치 이렇게 얘기하면 그걸 비난함으로써 나는 그 수준과 내용에서 예외인 것 같은 그런 인상을 주는 것을 원치않습니다.
우리는 다 동일합니다. 그런데 가장 뚜렷한 특징이니까 이 술안주 비유를 든 것입니다.
그기서야말로 적나라하게 ‘그 누구있지? 그게 말야 지난 번에 내가 인사 했는데 고개도 끄덕이지 않더라구’ 이게 우리의 술안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조금 더 교양있고 인격적인 훈련이 되어있는 사람에게도 나타납니다. 근데 점잖게 나타납니다.
그냥 ‘누구는 말야 뭐 이래’ 그러면, ‘야! 뭐 그런 얘기를 하냐’ 이렇게 나타나죠. ‘그 뭐 궂이 말을 하냐, 입에 올릴 가치도 없지’ 이러는 것이고,
예수를 믿으면 뭐라 그러느냐하면 ‘나 그사람 위해서 기도해’ 이렇게 나오죠. 아니 이말 좋은 말입니다.
좋은 말인데 우리 좋게 못습니다. ‘아 나 당신 위해서 기도해’ 그말이 우리가 찌르는 말일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누구를 위해서 기도를 하냐하며는,
우리의 본성과 이게 섞여서 아! 신자답긴 해야되고 실력은 모자라니까 기도를 그렇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 저 사람 내 맘에 들게 해 주세요’죠.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죠.
어느 글엔가 그런 얘기 나왔죠? 제 기억으로는 ‘오두막’이라는 책에 나온 걸로 기억하는데
‘용서란 내가 상대방을 용서하는게 아니라 상대방을 하나님께 돌려 보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 하나님께 놓아보내는 것이다 그럽니다. 우리는 못합니다.
그게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예수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왜 이 얘기가 우리에게 중요하냐하면, 만일 그렇지않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한다면 살인하지도 말고 노하지도 말라, 간음을 안할 뿐만 아니라 음욕을 품지 말라 라고 권하고 그 책임을 묻는 것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죽으러 오시는 겁니다. 우리를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러 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친히 설명하신대로 모든 율법은 ‘하나님 사랑하라, 이웃 사랑하라’ 라는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게 되고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의 사랑과 구원에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사랑을 힘입자,
우리는 비로소 이웃을 약탈하거나 자기를 기만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우리에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골로새서 3잘 말씀 9절에 이렇게 갑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여기서 거짓말은 단순히 뭘 속이는게 아니라 훨씬 본질적이거든요.
뭐요,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만들 수 있다고 속이지 말라, 네 이웃을 희생재물로 삼으면 너를 그나마 해결할 수 있다고 속이지 말라 이거죠.
그러니까 간음한다는 것은 아까 창녀얘기를 한 바와같이 창녀와 하룻밤을 잠으로써 영혼의 갈증을 채울 수 있다는 그 기만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상대방을 한 인격으로 존중하지 않고 내 필요를 위하여 희생시켜야만 된다는 거짓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이 두가지 거짓,
그러니까 예수 없으면 우리가 누구가 되느냐하면 흡혈귀가 되는 겁니다!
흡혈귀가 된다는 것은 한 생명을 빨아먹어야 자기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누구의 인격과 존재의 가치와 생명자체를 희생시켜야, 나의 하루삶을 위한 식량을 삼아야되는 이 거짓됨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오심과 당신으로 말미암는 그의 백성들의 주이시고자하는 구원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 가면 같은 내용을 약간 달리해서 이렇게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는자 되었다. 그러고 뭐와 당장 대조시키냐하면 그러니 옛날같이 살지마라의 3절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우린 뭐에서 오해의 소지가 생기느냐하면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이 명분상 그 부인할 수 없는 가치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것을 도덕으로 요구하면 우린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얘기하는 건 도덕으로 얘기하지 않습니다. 도덕으로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가 도덕과 윤리로 기독교신앙을 여러분에게 제시하면 여러분은 제 앞에서 그 도덕성과 윤리성의 명분을 부인하거나 반대할 수 없지만, 그렇게 살수는 없는데 설교자가 혹은 여러분 소속하신 교회의 영적 지도자라는 목사가 ‘이런건 당연히 해야되지 않느냐’ 라고 요청하는 것만으로는 여러분은 항복하시지 않습니다.
그걸 성취할 능력을 제시해야 됩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필요성 입니다.
예수없이 이런걸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안에 들어와 있는자와 예수밖에 있는자의 가장 큰 차이가 뭐냐 그러면,
율법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그것이 옳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행할 수 있는자는 그걸 제대로 성취할 수 있는자는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없다. 여기에 기독교신앙의 핵심이 있죠.
예수를 믿어라 그거죠.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도덕군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거죠.
그래서 도덕과 법을 넘치게 성취하는 거죠. 옳은 정도가 아니라 사랑으로 가라는 거죠. 사랑으로!
그래서 이제 3절 이하를 봅시다.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인문제에서 우리가 얼마나 쉽게 분노하느냐, 자녀에게 우리가 분통을 터뜨리는 이유가 근본적으로 뭐라 그랬죠? 부모인 내가 자식을 어떻게 책임질 수 없다는 사실, 그 한계를 알기 때문에 분통을 터뜨리고 또 그렇게 사랑스러운 자식이 스스로 인생을 스스로의 힘만으로 제어할 수 없다는 걸 우리가 압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자녀들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우리에게 무슨일이 생기면 우리가 분통을 터뜨리죠.
누구랄 것 없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아무도 아무를 도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뭐가 다르냐, 내가 이웃을 도우려면 내가 살아있어야 됩니다.
내가 누구를 이렇게 구해주고 힘을 주려면, 내가 내 발을 온전한 터 위에 굳게 세워서 나를 지탱하지 않고 남에게 도울 손을 내밀 수가 없습니다. 그게 예수 믿는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여기 말하는 어리석은 말들 희롱하는 말들이라는 이라는거, 우리 사실 삶의 현장에서 많이 쓰는 겁니다.
우리 사실 정부나 사회에 대해서 분통을 터뜨릴 때가 많은데 그것도 다 공포입니다.
그리고 나를 나를 걱정끼치지 말아달라라는 간음일 때가 많습니다.
나라가 튼튼하고 사회가 건강하면 그기다가 안심할 근거를 만들고 싶은 겁니다.
그 거짓에 속지말라 입니다. 그 거짓에 속지 마십시요.
여러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상대방이 고의로 들이받지 않습니다.
상대방도 조심해서 잘 오다가 잠깐 실수에 그만 받았는데 결과는 엄청납니다.
우리는 그기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인간의 원죄와 하나님 없는 인간의 무력함과 죄악됨을 여러분들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예수 믿는다는 말이 가지는 답도 여전히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가면 이 문제를 19절 이하에 이렇게 동일한 내용, 동일한 강조를 다시한번 반복합니다.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것은 자기의 나라입니다. 인간의 나라, 피조물인 우리가 스스로를 다스리고 보호하고 채울 수 있다고 믿는 나라입니다.
여기는 여기에 지적한 것같이 우리가 골로새서 3장이나 에베소서 5장에서 본 바와같이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들은 헛된 것들입니다.
썩어져가는 것들입니다. 생명을 만들수도 없고 생명의 필요를 공급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22절 이하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를 부르고 인도하고 채워나가는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이것은 마치 생명이 가득한 숲을 보는 것 같습니다.
수목이 울창하고 꽃이 피고 향기가 나고 많은 생명들이 깃들여있는 풍성한 숲을 보여주는 것 같은 우리생명의 풍성함과 넘침과 부요함들 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른데서 구할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가 우리를 통치해서는 또는 세상 무엇으로도 세상의 정부나 세상의 법이나 지식이나 그 무엇으로도 생명을 만들고 생명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요한복음 6장 무얼 분명하게 선언하느냐하며는 인간의 가장 깊은 근원적이고 가장 중요한 본질의 그 문제에 대하여 그 답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아! 예수 자신이십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무엇보다 우선해서 예수 자신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그 분을 모르고 그 분을 소유하고 있지않으면, 오늘 우리가 살펴본 바와같이 살인에서 지적된 것이나 간음에서 지적된 것같이 자신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를 믿는자의 다름, 예수를 소유한 자의 다름, 생명을 가진 자의 다름이 가장 우선적으로 실천되고 증거되어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되어야하느냐하며는, 도덕성과 능률이 아니고 은혜여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하는 것이죠.
제가 서두에 창녀 얘기를 해서 서로 사실 언급하지않는 부분인데, 결론부분에도 한번 창녀2 (아까는 창녀1)를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신자가 창녀촌에서 일하는 비참하게 사는 여인을 보고 이렇게 보냈답니다.
‘왜 그렇게 사는가, 교회 나와 예수를 믿어라’  그러자 여인이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합니다.
‘나 이미 충분히 비참합니다. 내가 왜 교회 나가서 더 비참해져야 합니까’ 이 말이 갖는 의미를 아시죠.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예수 믿는 것이 내가 남들보다 조건과 자격이 다른 사람이라는 그런 기만을 그럼 위선을 가지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우리의 본서입니다.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된다는 걸 질색을 하는 인간의 알량한 자존심입니다.

그 본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않든 교회는 언제나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게 뭔가하면, ‘예수를 만날려면 나부터 만나’ 이거거든요.
내 나라는 사람이 예수가 필요해서 나오는, 내가 가난한 자요, 핍절한 자였다는 증언을 하러 서 있지않고, 나는 예수를 도우러 나왔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바람에 모두가 와서 입을 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말한 것 같이 내가 이미 충분히 비참한데 내가 왜 교회게 나가서 또 괄세를 받아야하는가,  왜 경멸을 받아야 되는가.
이 인용은 어떤분이 아시는 실화를 쓴 것인데, 우리 모두에게 사실은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 모두의 신앙은 우리가 우리 교회를 잘 만들어야된다하는 부분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많이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었다는 문제를 덮어놓고 그 다음에는 다시 예수 안 믿는자와 똑같이 자존심을 세우고 자기는 간음하지않고 살인하지않는 자인 것같이 자기를 증명하여 윽박지르고 있는가.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고 자신을 속이고 있는가, 라고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를 소유한 자의 넉넉함으로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리를 지킬 때에만 여러분은 비로소 비로소 이웃을 도울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사실은 교회가 맡은 책임,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빛이고 소금인 유일한 유일한 기관입니다.
그 책임을 우리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소모적인 기만과 발돋움에서 벗어나 은혜를 구하는 자로서의 여러분의 자리로 여러분의 신앙을 되돌려놓고 겸손과 그래서 그 겸손속에 가지는 하나님 통치함의 부유함을 누리는 신앙의 삶으로 돌아오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생명과 진리와 능력과 의로우심과 자비로우심과 사랑의 자녀되었으니 우리로 감사하는 자, 겸손하는 자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우리 이웃을 주예수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도울 수 있는자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존재가 우리의 삶이 우리가 사는 이나라 이시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되게 하옵소서.
지금은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하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의 넉넉함과 감사함과 충만함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그 오심과 베푸시는 은혜로 기적의 삶을 살리라 약속하고 돌아가는 심령들 위에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