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04 / 마 5:21-26 / 2010.04.11 / 개역개정판

(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마 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살인하지 말라의 문제는 앞절에 마태복음 5장 20절에 있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고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의지와 열심을 동원하여 지켰던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저들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의가 더 나아야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실제적인 차이점을 그 다름을 예로 든 것이 이 살인하지 말라 입니다.
살인하지 않는 것, 살인이라는 행위를 하지않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분노를 품으면 안된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셈이죠.
그러나 이 문제가 살인이라는 행위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살인을 결과시키는 분노가 있는 이상 그것은 살인과 마찬가지다 라고 말씀하시는게 틀림없지만 그 둘을 비교하는 데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십계명을 보면 첫째 계명에서 네째 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고
다섯번째 계명부터 열번째가 사람에 대한 계명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묻죠.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 라고 가르칩니다.
십계명, 혹은 율법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우리가 다시 한번 그 계명을 이해하자면,
사람이란 그의 필요를 하나님으로부터만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묶여 있는 것은 네 이웃이 네 필요를 채우기 위한 약탈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으로부터 채우고, 그래서 이웃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채우는 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이웃과 우리의 필요를 경쟁하지 않는다, 또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필요의 대상도 아니다, 이웃은 오히려 사랑의 대상인데 그 이유는 우리의 필요는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하게 채워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셈입니다.

그러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의 필요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고 우리 이웃으로부터 얻어질 것이 아니니,
이웃을 해하려고 하거나 이웃을 약탈의 대상으로 여기지말고 하나님이 얼마든지 넉넉히 주시는 것을 증거로 이해해라,
하나님이 나만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네 이웃의 그많은 이웃들 많은 존재들에게도 넉넉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이란 걸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 내 이웃에게 주시는 것, 그 충만함과 넉넉함에 대하여 서로 서로 감사하며 확인하며 격려하며 감사하며 살아야한다 라는 계명이죠.
그렇다면 바리새인이 잘못 이해했던 살인이라는 행위에 관한 것이 이 율법의 전체 목적이었다면,
분노라는 것은 무엇인가 일때에, 분노는 역시 결핍에서 오는 비명이다 이거죠.
살인이라는 행위가 내 필요를 이웃에게서 채워야된다라고 생각하는 하나님 없는 자의 결핍, 공포의 비명이라면,
분노는 역시 내가 내 필요를 스스로 채울 수 없고, 내 이웃이 가지는 어떤 것들을 빼앗아서라도 채울 수 없는 한계와 절망에 대한 표현이라는 것을 인식해라,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서두에도 말씀드린 바와같이 분노가 살인의 뿌리이므로 살인만 안하면 전부가 아니라,
마음에 분노를 품고 있으면 결국 살인의 씨앗을 품고 있으니까 잘못이다 이렇게 가면 똑같아지는 겁니다.
살인하지 마라가 분노를 품지 마라로 갑니다. 그렇게 얘기할 때에는 이 가르침의 예수님의 필요라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는 산상설교 시작부터 설교된 팔복에서부터 처음부터 선포된 중요한 핵심된 내용,
예수그리스도의 필요성,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본질이라는 것을 전제해서 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예수없이 살 수 있는, 살인하지 마라가 분노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는 또다른 우리가 지켜야하는 명령으로만 요구된다면
우리는 살인에서나 마찬가지로 분노에서도 우리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살인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저지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듯이,
분노란 그 스스로의 필요를 채울 수 없는 모든 인간이 가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자기 사실에 대한 깨우침입니다.
우리의 분노를 생각해 보십시요.
공포라는 것은 우리가 뭐 우리삶의 어느 곳에서나 만납니다.
우리 자녀를 기르는데 있어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우리 자녀가 공부를 잘하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 훌륭하게 되기를 바라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공부를 잘해서 이 세상에서 괄세받지않고 살기를 바랍니다.
공부를 잘 한다고 꼭 이세상에서 만사형통하리라고 믿지않습니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는 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는데는 우리가 해 줄 수 있는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우리의 자녀를 대신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부모가 자녀들이 공부안하거나 못하는데 대하여 퍼뜨리는 분노입니다. 그 분노속에는 속수무책의 감정이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대로 놔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정말 비명입니다.
그러고 세상이 얼마나 냉혹한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또 비명을 지르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자녀에게 훌륭해지라고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이 공갈을 치죠. 너 그렇게 해 가지고 어떻게 살려고 그래.
이것이 우리 모두가, 예수 믿는 부모 입에서도 자주 나오는 비명입니다. 그것이 비명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뿐만아니라, 우리 이웃들의 존재와 삶에서도 답이 없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 이웃의 못난 것이나 결함이나 혹은 실수나 나와 연결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화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고쳐줄 방법이 없고 만회할 가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회할 가진 것이란 우리 자녀가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요.
그 때 저지르는 실수라는 것은, 뭐 우유병을 엎는다든지 장난감을 부숴뜨린다든지하는 정도는 우리가 만회할 수 있습니다.
그기에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점점 살면서 우리가 대신해 줄 수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그것이 전부입니다.
우리는 분통을 터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기에 대하여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아야하는 것은 율법을 대표하는 기본적인 성경의 취지와 가르치는 것같이 하나님 사랑으로서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라는데 이제 촛점이 모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소유한 자만이, 예수를 믿는 자만이,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만이 만회할 수 있습니다.
채우고 고쳐주고 넘어가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인간으로써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 그러면, 얼른 생각할 때는 능력일 것 같습니다. 그죠?
그러나 조금더 깊이 생각하시고 살아보시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서와 이해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능력을 가졌어도 우리 자신과 우리 인생과 세상을 다 제어할 수 없고 만족시킬 수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결국 용서같이 필요한 것이 없고, 사랑해 주는 것같이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세상이 세상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우리가 바꿀 힘을 갖고 있지않습니다.
여기에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필요성!  예수그리스도의 구세주되신다는 기독교신앙의 선포에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없는 성경의 선포에 이 귀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우리의 분통을 터뜨리다보면 해결할 수없는 이 문제 때문에 즉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세상이, 인간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없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약간 비겁한 방법을 씁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물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종교라는 것으로 도망가는 것이죠!
또는 어떤 이념, 신념으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도망가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화해부터해야 합니다. 사람을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여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일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
그럼 화해하고 정상화하는 걸 어떻게 해야되는가? 하나님을 모시는 것밖에는 없다! 하는 얘기죠.
그 뒤에 나오는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용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구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않고 아무에게도 꾸중을 받지않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않고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거죠.
용서를 구해라. 용서를 구해라. 우리가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답이 있을 때 뿐입니다.
답이 없는 사람은 용서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용서를 구하느니 할복을 하고 말죠.
그 예수그리스도의 필요성,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독교신앙의 다른 것을 오늘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성경 전체에서 얼마나 사실은 얼마나 거듭 반복하여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는 내용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이유, 이 어떤 이유는 아마 우리의 자연인 된 본성에 의해서 기독교신앙을 성경이 가르치고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내용에 대하여 본성적으로 희석시키는 것 같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과 두려움을 대조하고 있다는 것 대단히 재미있지 않습니까?
왜 사랑안에는 두려움이 없다일까요? 사랑이 없으면 두려움이 있다는 뜻이죠! 사랑외에는 두려움을 내쫓을 수 없습니다.
근데 이 사랑을 논하는 가장 큰 이유는 7절에 보시다시피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여기가 핵심이죠!
기독교신앙을 대표하는 개념이 뭐냐라고 물으면, 예수를 믿지않는 세상사람들도 사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근데 사랑은 세상에는 없는 개념이랍니다. 하나님만이 사랑의 실체이십니다.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고, 사랑을 만드시며, 사랑을 채우시며, 예수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소위 구원을 받은자만이 이 사랑을 누리고 소유하고 받고 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두려움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왜 그렇다고요? 인간은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채울 수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리 세상에서 가치있게 느끼는 어느 것으로도 그 영혼이 만족할 수없는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생활하면서 살면서 언제나 거듭해서 경험하시고 확인하는 성경의 지적이며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보는 분내는 자, 분내는 자, 그리하여 누구를 멸시하여 누구를 멸시하여 자존심을
그저 위로하는 차원에 서 있는 것으로는 답이 되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이 지적에 스스로를 비추어봐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는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다른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것인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확인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제 지금 요한일서 4장 7절부터 다시 이어 보시면,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물론 우리는 예수 믿고 영생을 얻었으며 천국간다는 말은 모든 신앙고백을 가진자들이 합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그 고백의 내용에 범위와 깊이를 자주 오해를 합니다.
죽어서 천국가는 것,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이외에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속에 사는것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오늘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삶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우리안에 아무런 아무런 실력이 없는 사실에 대하여, 가진것이 없는 사실에 대하여 놀랍니다. 그리고 두렵습니다. 공포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답이 없고 세상에 있는 무엇으로도 이 영혼의 필요를 채울 수가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놀랍니다.
사실은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는 셈이죠.
사람과 사람사이에 좋은 말을 하고 편을 들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넘어갈 실력이, 넘어갈 아무것도 우리가 가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의지하고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은 내가 난파하고 있고 내가 먼저 무너지고 있는 탓입니다.
누구를 껴안고 버텨줄 여유가 없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나서 살았구나라는 걸 비로소 알게 됩니다.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냉혹함, 비참함, 왜곡됨, 그 폭력성에 대하여 드디어 드디어 마주설 수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가하는 어떤 공격도 사실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우리를 뭐 힘들게 할 수는 있어도,
인간의 인간된 가장 중요한 내용을 세상은 사실 도울 수도 없고 헤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세상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안에서 하나님과 화목된 후에라야만 그 답이 하나님께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기댈 데가 있습니다. 의지할 데가 있습니다. 맡길 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로소 질 수 있습니다. 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우리는 쉽게 예수를 믿으면,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초월적인 방법, 기독교라는 종교적 기적으로 세상적 공격들을 대꾸하고 반응하고 조금 더 나아가서 보복하고 승리할 수있는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약속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간된 가장 깊은 본질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기에서 우리는 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세상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살면 세상이 공격하고 시험하는 모든 것에 세상이 원하는 답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공격보다 우리가 더 크다는 것이죠. 세상이 공격하는 것이 이 표피에 불과하고 우리는 심층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넉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이 말입니다.
그건 아주 오늘식으로 말하자면 ‘살았다 이제는 살았다’ 그런 생각이 납니다.
여러분 어디 산에 갔다가 길을 잃었는데 아는 길이 나오는 거죠, 살았다! 그러지않습니까. 어디 배타고 표류하다 육지를 발견했을 때 살았다!, 어디 난관에 봉착해서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데 도움을 줄 수있는 아는 사람을 만났다, 살았다! 를 깊은 깊은 영원한 우리의 운명과 존재의 가치에 관한 문제에서 살았다라는 것을 예수로 말미암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인 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를 믿는다라는 고백이 가지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골로새서 3장에 가시면 성경은 오늘 우리가 보는 살인하지않는 것과 분노라는 것을 연결하여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있어야 살인하지 않는것과 마찬가지로 분노할 필요가 없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우리가 가진자라는 것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골 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중요하죠? 사랑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너희는 사랑을 받고 사랑을 넉넉히 받을 수있는 자 되었으므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어라 입니다. 이건 가진자만이 하는 겁니다.
세상이 말하는 가진자와 다른 것이죠. 권세와 명예와 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필요을 채워 주실 수있는 유일한 하나님, 하나님과 그의 사랑을 가진자만이 할 수있는 겁니다.
우리가 이제 분노를 터뜨리는 일 중에는 이런 요구도 있습니다.
예를들면 나라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릴 때가 있습니다. 좀 더 멋있는 나라, 좀 더 훌륭한 정치를 해라, 라고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고 사회에 대해서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사회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라고 분노를 터뜨리죠. 좀 더 책임있어라, 좀 더 진지해라, 좀 더 도덕성을 지켜라, 이런 분노를 터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전부 그렇게 얘기함으로써 말하자면 남들보고 나 살기 편하게 하라 이겁니다. 그건 살인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시작할 때, 살인하지 말라가 내 필요를 상대방에서 뺏아오지 말라 라는 가르침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누구보고 너 정직해라, 너 책임 다해라 라고 얘기함으로써 결국 내 필요와 내 안전을 누구에겐가 요구하는 것입니다.
국가와 사회에 어떤 윤리에 떠넘기는 겁니다. 그것이 잘못됐다고 세상에서는 얘기할 수 없죠.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옵니다.
하나님이 한 개인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세상이 가지는 어떤 강제권도 어떤 명분도 사람을 고쳐놓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그의 생애에 만나는 모든 사람의 필요에 응하십니다.
죄지은 자를 용서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병을 고치십니다. 위로하시고 죄인들과 가난한 자들의 편이 되십니다.
유일하게 한 부류, 바리새인에 대해서만은 진노하시고 저주하십니다.
왜 그러죠? 저들이 다른 것 때문이 아닙니다. 윤리 도덕적으로 삶의 자세와 책임에 대해서 더앞선 사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없이 인간이 필요를 채울 수 있다고 우기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분통을 터뜨릴 때마다 너만 잘하면 내가 편해진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여러분은 하나님없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라고 고함을 지르는 순간이다라고 아셔야됩니다.
세상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나오는 말씀을 보십시요.

(골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가장 중요한 공통된 단어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 그리스도의 말씀, 주 예수의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의, 그들의 의와 비교할 수없는 다른 차원의 의, 예수안에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께 속한 자에게만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다른점 입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감사가 나옵니다. 15절도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절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절도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건 무엇을 은혜로 얻는 자들의 반응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신자로써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됩니다.
죽은 다음의 보험 정도가 아니며, 종교하는 영역내에서만 통용되는 무슨 그 방법이 아니라,
이 세상이 어떤 곳이며 인생이 얼마나 버거운 것인가를 아는데 그 모든것을 넉넉히 넉넉히 감수하여 눈으로 보이게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해결된 자로써 살게 된 정체성, 우리 기독교신앙적인 용어로 믿음안에서 살 수있게 됩니다.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여러분 신앙고백의 특별함, 그 복된 것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신자된 인생을 살아가시고 이기시고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웃으시는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요. 그리고 얼마나 무한한 복인지요.
우리는 비로소 인생을 살 수 있고 세상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되심입니다.
이 능력, 이 넉넉함, 이 복됨, 이 진리, 생명가지고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신앙고백을 지키고 누리고 증거하고 복된 삶, 기적의 삶 살아가는 우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