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17 / 갈 5:2-12 / 2010.03.17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사도바울이 이방인을 위하여 하나님앞에 부름을 받고 그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써 그의 일을 수행할 때,
그에게 가장 대적이 됐던 세력은 믿지않는 이방인 자신들이 아니라, 유대인들 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이 전체로 예수그리스도를 아직 메시야로 믿지않는 것같이 당시에도 예수를 전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신성모독으로 간주됐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겨야되는데 예수를 또 하나님이라 믿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 큰 범죄행위로 이해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초기기독교 사회에서 개종한 유대인들, 유대교로 있다가  예수를 믿게된 사람들이 율법과 예수를 믿는 것의 구별을 분명하게하지 못해서 율법적이기도 예수도 믿고하는 일종의 타협안같은,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약화시키는,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서 자꾸 근거를 가지려는 율법적 사고로 가는데 대하여, 초대교회에서는 크나큰 문제가 야기되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갈라디아서에서의 중요한 주제인 것입니다.
할례를 포함하여 모든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기 백성된 그 조건하에서 요구하는 신앙의 순종할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율법을 순종할 수 없다는 거를 거듭 확인하게 되고  스스로에게 구원의 조건, 구원을 이루어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어야되는데, 그렇게 하지않고 율법을 가지고있고 율법을 지킨다는 것으로 자기들에게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문제를 지금 이 갈라디아스가 중요하게 문제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오늘 2절에서 4절까지 서두의 말씀을 다시한번 보시면,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즉, 율법과 예수를 믿는 일은 공존할 수없다. 그렇게 사도바울은 단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신분과 운명이 예수를 근거로하여 생긴다는 믿음이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나의 운명과 나의 신앙이 내 선택과 내 의지에 근거하여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더 극적으로 대조를 하자면, 나의 능력을 근거로 한 종교를 만드느냐 예수를 근거로하는 종교를 만드느냐
라는 문제의 차이가 되는 것이죠. 간혹 이렇게까지 오해됩니다.
자기를 근거로하든 예수를 근거로하든 착한 사람이 되면 그만아니냐, 그건 전혀 복음을 모르는 생각입니다.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 예수를 주로 섬긴다는 것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착한사람이 된다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한다, 하나님의 나라 그가 주인인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는 뜻이기 때문에
내가 나의 주인이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면서 예수가 주인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문제가 율법을 지키는 문제와 예수를 믿는 문제에서 어떻게 분명하게 대조가 되는냐하면, 고린도 후서 3장에 가시면,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자, 지금 두 대조를 이렇게 나누고 있죠?
우선 다시 정리를 갈라디아서 본문을 하면, 할례를 지켜서 종교를 성립시키려는 것은, 자기의 능력과 선택 자신에 근거한
왕국을 세우는 것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주인이신 통치자인 하나님나라에 왕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근데 이 대조에서 중요한 건 뭐냐하면 지금 고린도후서 3장을 찾은 이유가 율법이라는 것은,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우리 개인의 능력을 시험한다는 것이지, 율법이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고 무엇을 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뭐냐 그러면 여기 3절에 보듯이 ‘돌판에 쓴 것입니다.’  
율법은 돌판에 쓴 것입니다. 율법은 자체로 인격체도 아니고 능력도 아니고 하나의 법조문입니다.
그것은 누구를 도울 수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율법을 지키냐 못 지키느냐에 기준선으로는 쓸 수있어도 율법을 지키는 것에 하등의 도움을 줄 작용을 할 수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율법과 예수를 비교할 때, 성경이 하고싶은 얘기는 뭐냐하면,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통치자가 되셔서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만들고 완성시키는 나라다,
그래서 3절에 대비하기를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마음판에 쓴 것이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이키시고 부르시고 변화시키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찾아오심이요 능력으로 개입하시며 변화시키시는 간섭입니다.
율법과 다르죠. 율법은 결국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가 그 사람의 종교성을 확인하기보다
그사람 개인의 능력, 개인의 자격을 논하는 것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율법의 무서움은 그것입니다.
사실 율법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법을 지킬 힘이 없다 하는 것을 확인하여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우리의 능력으로는 될 수없다.
이게 갈라디아스를 공부하면서 배운것 입니다. 율법이 몽학선생에 불과했죠.

그러나 신기하게도 인간은 자신에게서 근거를 가지려하고 자신에게서 자격을 만드는 것을 훨씬 훨씬 좋아합니다.
예수안에서의 은혜, 통치를 받아드려야한다는 것보다 내가 무엇을 하여
나의 근거를 내가 한것으로써 갖고싶은 욕심이 많은 바람에 무슨 차이가 생긴다고요?
하나님이 예수안에서 찾아와 나를 변화시키시며 목적하시는 일에 맡기는 순종으로 가는 신앙보다,
나를 확인하는 율법을 선택하기를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서 본인도 모르는 순간에 신앙이 자기확인으로 흐를 수 있다 이거죠.
오늘 본문에 마지막 부분에 가면 이걸 판가름하게되는 중요한 명령을 만나게 됩니다만 지금 우리가 확인해야 될 것은 그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를 믿는다라는 말은 우리의 선택이나 의지나 분별이나 단호함이나 이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를 변화시키셨고 자기의 백성으로 부르셨고 자녀로 만드신다 라는 것을 아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고,
율법을 고집하는 것은 내가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고집함으로 하나님이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를 찾아오사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 되기때문에
기독교신앙안에서 율법과 십자가는 공존할 수 없다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스에서 내내 봤듯이, 내가 전한 복음이외의 것을 전하는 자가 있으면 저주를 받아라 그말을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뒤에 5절에 보시면,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이런 표현들이 나오는 이유입니다.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기독교신앙의 핵심은 뭐라고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고 능력으로 개입하셔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갈 수없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나라의 시민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신앙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전혀 선택과 결정의 우리의 의지적인 능력과 책임의 문제 이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기회가 아닙니다. 기회가 아니고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녀를 부르셨다 찾아오셨다, 예수안에서 놓치지 않으신다 이게 복음이죠.
그러니까 우리에게 어떤 조건과 자격을 만들려고하는 순간 무슨 문제가 되느냐하며는,
그나라는 예수를 보내신, 그러니까 예수안에서 성립시키신 하나님의 통치와 내가 공동통치자가 되는 것이 된다 이겁니다.  
그런 기독교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듭 확인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상상보다 큽니다.
우리가 우리의 나라를 만드는 것도 잘못이지만 공동통치자가 되면 우리는 반쪽하나님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갈라디아스가 이 문제를 이렇게 깊이 심각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에 가시면 이 문제를 구약에서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새언약은 분명히 새언약이니까 옛언약과 다르습니다. 옛언약은 시내산언약을 지칭합니다.
율법으로 맺은 언약입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은 아까도 말씀드린것과 같이 율법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증거하고 있지만, 지킬 능력을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새언약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 나타냈던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이룰 수 있도록 우리 마음판에 새긴 언약입니다.
이 옛언약과 새언약의 차이는 언약의 내용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성취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그 주인공이 예수그리스도시다 그러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장에 가면 이 문제가 이렇게 소개되고 있죠.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1)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어떤 사본에, 나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옛사람과 뭐가 다르냐할 때,
그는 이제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로 인도받았다는 뜻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인도함을 받았는데 그 차이가 뭐냐,
우리 육신이 약하여 우리 스스로 율법을 지킬 수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사
이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이루게하는, 사망과 죄의 권세로 부터 그 율법으로 재판하는 모둔 정죄를 이기고
그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있는 자리로 우리를 구원해 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조금더 계속해서 읽으면 확실해 집니다. 5절을 보시면,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2)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 중요한 신자된 그 정체성입니다. 기독교신자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우리가 홀로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책임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율법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준이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준이죠. 그걸 지키고 못지키는건 우리 자신의 능력에 달린 문제이죠.
율법이 우리에게 율법 자체가 거룩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게게 정죄하는 것이 되고,
사망이 되는 이유는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는 탓입니다.
그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값을 치루고 우리를 보낸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우리를 다스리는 통치자로 우리안에 거하시기로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우리안에 거해봤자 이렇게 돌에 쓰놓은 법조문같이, 벽에 걸어논 액자같이
그 스스로는 어떤 영향도 어떤 힘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와 함께 옛사람을 십자가에 파묻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시켜
지금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율법과 예수그리스도를 대조하며 율법을 지키려고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하는 것을
확인시키는 사도 바울의 노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가시면 이렇게 처음에 시작했죠.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얘기를 해 나가던 요한복음 1장이 7절에 와서 뭐라 그러느냐하면,
예수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말합니다.
율법은 누가 줬다고요? 모세가 주었는데 모세는 율법을 건네준 사람이면서도 죽음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율법이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죠. 율법이 가치가 없는 것이아니라 우리를 돕는 일에 전혀 무력합니다.
예수는 이런 은혜와 진리를 베풀죠. 그건 은혜와 진리라는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우리의 주인이 되사,
은혜와 진리로 우리를 다스려 은혜와 진리가 우리의 실제적인 실제적인 혜택을 받는 선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갈라디아서 5장으로 돌아오시면,
이 모든일들은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의 차이를 대조하던 사도바울이 결코 궁극적인 차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셈이죠.
내가 할례를 받으면 무슨 소망이 있느냐. 다음에 할례가 너희를 사랑하게 하더냐. 이 두가지를 묻습니다.
그기에 소망이 있느냐 라고 묻는 것은 할례는 지금 율법을 대표하고 있는데 율법이란 어느때나 지금 지켰다 못지켰다만 있습니다.
한번 지키면 영원히 지켜질 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렇죠? 우리 뭐 세상 살면서 그런거 여러가지 보죠.
한 끼 식사를 잘 했다고해서 그 다음 식사를 걸러도 되지않는,
간혹 그런 경우가 있기는하지만 통상적으로는 다시 식사를 해야되는 것같이,
율법은 한번 지킨 것으로 영원히 그걸 지킨자로써 그 능력과 지위가 계속되지 않습니다.
그 소망이 없습니다. 그 얘기를 하는 것이죠. 영원히 기키게되서 매순간마다 늘 실패와 성공의 기로앞에 서 있어야 됩니다.
두려움속에 있어야지 장래를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리고 또하나 묻습니다. 그기 사랑이 있느냐 이거죠.
사랑이란 뭔데요. 내가 지키고 자랑하는데 있어서 사랑이 나가지 않습니다.
사랑과 자랑은 같이 공존하지 않습니다. 자랑은 언제나 남다름위에 서 있습니다.
사랑은 받은자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이 말같이 이제 갈라디아스가 할례받은 문제를 다루면서,
그렇게 끈질기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과 율법의 차이를 구별하고 대조하고 뿌리깊이 그 차이를  설명한 후에
결국 어디로 우리를 끌고 가느냐하며는 사랑으로 끌고 갑니다.
이제 나중에 우리가  5장 후반부부터 찾아보겠습니다만
성령의 열매로부터 시작해서 사랑에 관한 일을 결국 예수그리스도안에서만 가능한 신앙의 행위인 것이 드러납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독교신앙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 사실 현실적인 신자들의 신앙실천속에서도 이 문제는 늘 우리에게 걸리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열심있는 신앙생활을 해야된다,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한다, 더깊은 사랑을 가져야한다, 하는것들은
우리들의 실천을 위하여서 얼마든지 이런식으로 표현될 수 있지만 얼마든지 율법적으로 쓰입니다.

율법적으로 쓰이면 희얀하게 그기엔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은 우리 나중에 다 더깊이 생각해 보겠지만 사랑은 이렇게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것 아닙니다.
무슨 뭐 희열과 감격에 차있는 감정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사랑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심이 환각상태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상상이 아니고
현실이었던 것처럼 사랑은 현실적인 아주 냉정하고 실제적인 분별과 실천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참는 것이고 무례히 행치않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만 우리 교회엔 사랑이 없어 그럴때는 사랑이 뭐 이렇게 쳐다보면,
뭐 이렇게 서로 마주보는 눈이 어떻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런것들 아닙니다.
매우 노력하고 자신의 본성을 절제해야되고 말씀에 자기를 순종시켜야되는
이러한 노력과 극기와 희생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런일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본성적으로 갖고 있었던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 되고 자랑하고 싶은 자리로부터,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통치의 나라속에서 시민이 됐다는 것을 확인하는 질서인 것입니다.

여러분 선진국에 가시면 그 다른 것 볼 것 없죠. 공공질서를 지키죠.
우리나라가 얼마만큼 선진국이냐? 교통질서 지키는 것보면 알죠. 교통질서…보통 우리 다 뭐 그렇게 철처하게 지키지않는데,  
선진국에서 손님이 왔을 때, 이렇게 차에 모시고 가다가 (선진국사람 있으면 우리도 조금 신경쓰거든요)
누군가가 빨간불인데 넘어가면 챙피합니다. 신자의 신앙생활은 챙피한 문제로써 하자는 것이 아니라,
고급한 나라에 속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쁨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통치와 자비와 긍휼과 영광된
통치하래 있다는 것으로 확인해야지, 다른 방법으로 확인 할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여기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
여러분 기억하셔서 여러분들의 신앙의 현실이 왜 기쁨이 없을까, 나는 믿는 확인 뭘까?  
예수를 믿어서 갖게된 특권이 뭘까? 바로 이걸 생각하십시요.
여러분은 인간의 본성을 이기고 자기 자랑을 이기고 하나님 통치의 그 사랑을 받는 자요,
그 질서로 세움을 받은자로서의 존재인 것입니다.
이 기쁨으로 여러분들의 신앙을 확인할 수없다면 기독교 복음이 여러분들에게 할 수있는 것은 없어집니다.
자기의 자랑과 자기의 확인에 경쟁과 희생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 유혹과 시험에 지지않고 참다운 신앙을 지켜내시는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백성으로 살고 거룩함으로 부름을 입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인생이 된 것을 확인하고 감사드립니다.
이 백성으로 사는 일의 귀중함 그 자랑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그 사실일 것입니다.
그 자녀된 신자의 특권들과 이 귀한 거룩한 영광들을 누리며 사는 신자의 생애되게 하시고,
그 순종과 그 충성이 우리 모든 인간들이 본성속에서 메여있고 손해보고 스스로를 방탕에 방임하는 더러운 것과 헛된 것에서 벗어난 자유인 것을 깨닫게 하사, 우리로 우리신앙 지켜 우리 삶속에서 참다운 구원의 기쁨을 마끽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세상에 빛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