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법정스님이 입적하셨다. 그분은 다른 종교를 인정하시고 특히 천주교인들과의 교류도 자주 하신 것 같다. 명동성당에 가서 설법도 하시고 길상사에 김수환 추기경을 모셔서 강론도 들으셨다. 이제 불교와 천주교 사이의 교류는 다반사인 것으로 듣고 있다. 기도, 수행 방법 있어서도 양측이 서로 상대방 방법을 많이 활용하는 것 같다. 양측의 교류가 활발한 근본적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이와 관련, 평소 신앙상의 의문사항이 있을 때마다 의논 드렸던 신부님께 10여년 전 불교의 “絶對無(Absolutes Nichts: 空)”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어떻게 다른지를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신부님께서는 양자가 동일한 것으로 본다고 말씀하셨다. 반신반의했으나 이후 그 말이 정말 맞는 얘기인가 하고 의구심은 계속 남았다.

2. 그러던 차 최근 우연한 기회에 접한 “般若心經 講義”(법륜스님, www.btn.co.kr)와 “金剛經 講義”(南懷瑾 著)에서 이들 경전의 핵심사항이 空 내지 實相般若에 있음을 이해하고 이들에 관한 설명이 의외로 하나님에 관한 묘사와 유사하다고 느껴졌다. 하나님은 영적 존재로 우리 오감으로는 감지할 수 없으며 어떤 형상으로도 나타낼 수 없고 자존성, 영원성, 불변성 등의 속성을 지니신 것으로 표현되는데 金剛經에서의 實相般若의 實相도, 般若心經에서의 空도 동일한 속성을 지닌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상기 “금강경 강의”의 저자는 空 내지 實相般若의 實相을 신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의 니시다 기따로, 니시다니 게이지 등 교또학파 및 Eckhart 등 기독교 신비주의자들도 양자를 동일시한다. 이들의 표현을  인용해 보자. “神性이란 신의 본질을 의미한다. 어떠한 존재방식(모습)도 없는 신의 본질은 絶對無로 표현될 수 밖에 없다.” “신은 충만된 존재이고 존재를 뛰어넘는 무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신은 이것이나 저것이 아니라 실체의 존재를 초월한 존재이다. 신은 相없는 존재이다.”(불교의 空과 하나님 p.161) “참된 신은 신이라는 보통의 이념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神性이다. 참된 신은 般若心經에서 말하는 空이다.”(上揭書 p.274)
* 불교의 空과 하나님, 한스 발덴펠스 著, 김승철 譯

3. 이들은 신과 신성을 동일시하고 이는 絶對無 즉 空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속성이 같다고 실체가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반론이 만만치 않다. “우리들은 신의 작용의 결과(속성의 나타남)를 인식한다. 그러나 신은 이러한 작용(결과)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신은 이 작용(결과)이라는 것을 자신 안에 포괄하는 초월자이다.”(상게서 pp.281~282)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재하시면서 초월하셔서 항상 우리와 대화하시고 우리의 매사를 주관하신다는 점에서 어떤 중립적인 성격의 絶對無 즉 空과는 다르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나 절대무의 속성을 말할 때 이는 이미 어떠한 본체를 전제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그 본체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또한 불교에서는 우리 心底에 있는 “순수의식 세계” 또는 “고요한 공간”은 인정하고 있는데 이는 Jung 심리학에서의 자기(Self)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재하시는 하나님”에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 점에서 불교의 절대무 즉 공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재하시는 하나님”은 같다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불교는 기본적으로 (초월)신을 부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불교가 구약에서 나타나셨던 “초월하신 하나님” 인식까지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4. 그와 같은 신의 실체에 관한 논쟁을 떠나서 속성 면에서는 동일한 점이 많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도 공 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공 사상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공이나 허무적인 무에 해당되는 무가 아니라 모든 것을 포괄하는 공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신의 공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사랑을 연상케 한다. 예수님은 공을 실천하여 절대자의 개념을 충만케 하고 실현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공을 실천하여 사랑을 베풀라고 요구하신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골3:9, 엡4:22).” “새로운 사람을 입으라(엡4:24).”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그리하여 진정한 크리스찬이 되려면 空 사상을 실천하는 자이기도 해야 할 것이다.

5. 물론 불교의 공 사상과 예수님의 자기비움(공)은 똑같지는 않다. 불교의 공은 일체가 공(五蘊皆空)임을 깨달으면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며 깨달은 자는 중생의 깨달음을 선도하여 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다(깨달음보다 더 큰 행복은 있을 수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공이 非我, 無我라는 성격을 지닌다는 의미에서 대자비와 동일하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직접적인 연계관계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기비움은 우리의 구원이라는 목적 하에서 이루어진, 우리에 대한 지극하신 사랑의 표현이므로 사회봉사 등 적극적인 구제의 의미도 동시에 지닌다.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자기를 비우고 이웃에 대해 사랑을 실천하도록 요구 받는다. 실제 불교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이나 불자들의 기부 내지 사회봉사 활동이 기독교(인)에 비해서 극히 미미하다는 점은 이와 같은 기본 교리의 차이에서 오는 것 아닌가 한다.

6. 불교에서는 인간 중심으로 인간 사이에 또는 인간과 사물․사건 사이에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하여 희노애락, 미움과 사랑, 증오 등 각종 감정은 우리의 마음 작용에 따라 분별심이 일어나 발생하며(一切唯心造) 空 사상에 따르면 인간 사이에 옳고 그름이 없고 다만 서로의 생각이 다를 뿐임을 이해, 체득하면 분별심이 해소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분별심이 우리의 주관적 마음의 작용에 따라 발생한다는 의미이나 만약 우리의 행동이나 말이 하나님 말씀인 성서에 기반을 둔다면 우리의 주관에 휘둘리지 않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신자에 있어 옳고 그름의 판단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와 같이 인간 사이에 서로 간의 분별심에 따른 옳고 그름은 없으나 그 판단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면 옳고 그름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불교의 공 사상과 기독교 교리는 충돌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7. 불교는 공 사상에 바탕을 두어 修行, 祈禱 방법을 발전시켜왔다. 참 기독교인은 자기를 비우는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불교의 수행, 기도 방법을 기독교인들이 매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어 성경에 “범사에 감사하라”고 되어 있으나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간구한다. 과연 해달라는 요구가 그렇게도 많은데 감사기도가 제대로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불교에서는 空 사상에 따라 우리의 분별심을 버리면 “간절히 기도하되 그 결과를 믿고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가르친다. 현실은 나의 業識에 따른 결과로 이해하고 매사를 긍정하고 감사하며 공덕을 쌓으면 이 업식에서 자유케 되고 願을 이루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있어야 진정한 감사기도가 나오는 게 아닌가 한다. 기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불교의 空 사상에 바탕을 두면 감사기도가 더 용이할 것으로 생각된다.

8. 다음 불교에 관한 두 가지 내용의 글을 면밀히 음미하여 우리 믿음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적극 활용하기를 기대한다.                

        I. 金剛經에서의 깨달음의 대상(神?)
                                             金剛經 講義(南懷瑾 著)에서
                           
1. 金剛經은 깨달음의 大智慧를 제시힌다고 해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일컫기도 한다. 般若는 곧 대지혜를 의미하며 이는 보통의 지혜가 아니라 道를 이해하고 깨닫고 닦아서 증험할 수 있으며 생사를 초월해 超凡入聖할 수 있는 지혜를 말한다. 이것은 통상의 지혜가 아니라 道體에 관한 근본적 지혜이며 근본적 지혜는 “形而上적인 생명의 본원이나 본성을 파악할 수 있는 지혜”를 의미한다. 반야라고 하는 지혜에는 다섯 종류의 각기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 이를 5 반야(實相般若, 境界般若, 文字般若, 方便般若, 眷屬般若)라 하며 이 다섯 종의 내포 개념이 바로 金剛般若이다(p.18). 이중 實相般若는 형이상적 道體로서 이는 우주 만유의 뿌리로서 明心見性하여 깨닫는 바로 그 도체이다. 이 도체는 보통의 지식이나 의식 및 생각으로써 토론하거나 연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불가사의한 것이다.(생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망상의 범위에 속함). 그러나 불가사의하다고 해서 생각과 논의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수행을 통해 증험되는 경계이지 사고로 도달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p.19).

2. 불교에서 말하는 悟道 즉 도를 깨닫는 것은 이 도체가 空이라는 것을 보아내는 것이다. 이는 “존재하는 곳도 존재하지 않는 곳도 없다”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華嚴經에서는 그것을 道라 해도 좋고 天地라 해도 좋으며 上帝든 神이든 主든 佛이든 眞如든 涅槃이든 뭐라 해도 좋다고 말한다(p.19). 이 모든 명칭은 실상반야를 가리키며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찾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 생명의 뿌리를 알게 된다. 涅槃은 원만하여 생겨나지도 죽지도 않으며 오지도 가지도 않으며 영원히 청정하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머무는 바가 없고 法相이 일어나지 않으며 如如不動하여 相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p.585). 머무름도 없고 상이 없으므로 空이다. 공이니 공이 아니니 하는 것도 도가 아니므로 금강경에서는 단지 머무름도 없고 상도 없다고 말한다. 空, 無住, 無相은 반야의 三法印이다(p.588).

3. 空이란 무엇인가? 世間 一體는 모두 변하며 無常하여 어떤 것에도 머물 수 없고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변하고 나면 아무 것도 붙들 수 없는데 붙들 수 없는 이 상황, 이 경계가 곧 空이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受子相에 이르고 修持하여 일체를 놓아버렸다면, 空조차도 철저히 空이 되어버렸다면 생명의 본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 생명의 본원은 영원히 불변한다(p.464). 이것이 진정한 나로서 불생불멸한다. 이 불생불멸의 나는 결코 우리가 생각하듯 我相을 가진 세속적 존재가 아니며 청결하다. 소위 말하는 淨土란 善도 惡도 없으며 고통도 즐거움도 없다. 이것이 진정한 樂으로서 바로 부처의 경계이다. 금강경에서 부처는 空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형체로서 나를 보려 하거나 소리로서 나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삿된 도를 행하는 자로서 如來를 볼 수 없다.” 부처는 결코 “어떤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어떤 것이 아니다”라고만 말했다. 般若心經에서도 단지 “五蘊이 모두 空”이라고만 말하고 최후에는 진실하며 허무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오온이 모두 공이라는 것이지 결코 반야바라밀다가 모두 공이라 말한 것이 아니다(p.497). 만약 空이 진정으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것은 空見이 아니라 斷滅見이다(p.498).
* 인용 페이지: 金剛經 講義 해당 페이지
        

         II. 修行과 祈禱의 기본자세
                                 법륜스님의 “般若心經 講義” 및 “卽問卽說”(www.btn.co.kr)에서

1. 修行의 자세

– 기도, 염불 수행 시 마음 속에 일어나는 번뇌, 망상은 문제 삼지 말고 다만 수행에 정진하라.
․ 기도, 염불 시 정신 집중해야지 하는 생각은 또 하나의 번뇌이지 기도, 염불이 아님
․ 번뇌는 저절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따라가지도 말고 저항하지도 말라. 그렇지 않으면 더 망상에 빠져 오히려 업식만 쌓   게 됨
․ 수행 중 소음이 들려오고 집안 생각 등 망념이 떠오르면 시비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시비하면 또 하나의 번뇌가 생기게 되고 소음, 망념이 더 커질 뿐임
․ 왜 정신 집중 안되나 등 일어나는 망상에 대해서도 시비하지 말고, 되고 안되고도 논하지 말라. 다만 주어진 과제(기도, 염불, 호흡, 명상)에만 집중하라. 안되면 다시 할 뿐임

– 기도, 염불 중 번뇌가 일어나면 “내가 산만하구나”로 인식하고 “그것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라고 구하지도 말고 단지 “내가 망념이 많구나”를 알아차리고 다시 수행할 뿐임
․ 번뇌는 오랜 습관으로 형성된 것으로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므로 알아차리고 “왜 번뇌가 많은가” 라든지 “없애버리겠다” 라고도 말 것이며 그냥 놓아버려라. 시간이 지나면 덤덤해진다

– 기도, 염불의 원칙을 정했으면 예외 없이 정한 시간에 그냥 해버려라.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멈칫하지 말라. 싫어도 그냥 하라. 꾸준히 정진하여 업식을 뛰어 넘어라

– 諸行無常, 五蘊皆空의 도리를 깨쳐 業識에서 벗어나라
․ 懺悔 祈禱, 觀法修行(찰나찰나 受를 관찰하여 碍를 끊음)을 활용하라
․ 업식에 매여 따라가지 말고 마음을 깨어 관찰하면서 정진해 나아가라

2. 祈禱의 자세

– 기도할 때 “괴롭습니다. 구제해 주세요”, “—을 해결해 주세요”라고 말 것이며 “감사합니다”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내라
․ 항상 자긍심과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라
․ 고난은 피할려고 말고 이를 삶의 소중한 부분으로 받아들여라

– 부딪치는 일, 因緣果報는 기꺼이 받아들여라
․ 과거 과보는 갚아야 하며 기도하는 데에도 재앙이 오면 이는 과보를 한꺼번에 갚는 것이라 생각하라
․ 긴 세월 業 지어 놓고 하루 ․아침에 벗어나려고 말라
․ 인연의 도리가 있기 때문에 정진한다고 곧 좋아지는 것은 아니며 꾸준히 정진하면 언젠가는 변하게 됨을 알라  

– 현재의 행복을 알아차리고 감사하라
․ 현재의 내 조건, 내 처지에 감사하고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내지 말라
․ 위로 받겠다는 생각은 내려놓고 내가 내 자신을 위로해 주어라

– 복을 받을려고 말고 복을 지어라
․ 복을 지으면 안 받을려고 해도 복이 온다
․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 없음을 알라

– 부지런히 기도하고 정진할 뿐,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
․ 이루어지면 이루어져서 좋고 안 이루어지면 그게 복이 된다고 생각하라
․ 간절히 기도하되 그 결과를 믿고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는 게 믿는 자의 자세임. 당장 결과가 좋더라도 나중에 나쁠 수 있으며 당장 나빠도 나중에 좋을 수 있음
․ “눈 밝은 이여, 저를 바른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할 뿐임

– 기도는 욕심을 내지 말고 간절함으로 하라. 여기서 간절함이란 욕심이 없으며 망상과 두려움과 의구심도 없어지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마음 상태임
․ 금식하고, 육식 피하고, 목욕 재계하고, 부부관계도 중단하며 심산유곡이나 기도원에서 기도할 만큼 간절하고 정성이 지극해야 함

– 각종 번뇌가 사라지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善 의지, 순수의식이 올라오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신의 소리, 신령님의 도우심, 하늘님의 계시로 보았음
․ 번뇌, 욕심, 불평불만이 사라져야 마음 깊은 곳에서 순수의식이 올라옴
․ 기적을 일으킬려면 깊은 믿음, 흔들리지 않고 반석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하고 마음이 간절하여 순수의식 세계에 들어가야 함 

– “내가 왜 잘못 됐나” 또는 “내 화내면 안 되는데” 하고 후회하는 것은 자기를 인정 않고 자신을 용서 못한다는 것이며 이는 자기 능력을 벗어나 노력 없이 결과를 바라는 욕심으로서 나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잘못 되거나 화가 나면 이를 즉시 알아차리고 자책하거나 후회하지 말고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도전하라  

– 부정적이고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면 내 마음에 그러한 감정이 있는 것이므로 내 운명이 긍정적이거나 좋아질 수 없다. 매사를 긍정적인 면을 보고 상대방의 좋은 면을 봄으로써 나 자신도 밝게 비추고 긍정으로 나아가도록 하라. 절대 부정의 맘을 갖지 말 것이며 잘 될 것이라는 긍정의 마음을 갖도록 하라. 단지 시간의 문제이고 잠시 괴롭더라도 미래에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정진하라

–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면 내가 괴롭고 미워하면 내가 불편하다. 좋게 생각하면 내 마음에 걸림이 없게 된다.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면 사는 게 좋아진다. “기쁘다 기쁘다” 하면 기쁜 일이 생기고 “괴롭다 괴롭다” 하면 괴로운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