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가 나무를 열심히 가꾸고 정성을 들이는 것은 열매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농부이시고 우린 나무입니다.

하나님은 나무인 우리에게서 열매를 원하시기에 정성을 다하시는 것입니다.

열매는 하나님의 꿈이요 사랑의 이유입니다.

열매는 또한 우리 영혼구원의 증거입니다.

구원은 나의 확신이 아닌 하나님의 평가로 결정되는데

하나님은 열매로 우릴 평가하십니다.

예수님도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열매입니다.

열매를 맺는 길은 한가지인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크게 다섯가지로 나눕니다.

첫째는 창조인데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많이 놓치는 사랑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는가로 나의 값은 이미 결정이 됩니다.

내가 십원짜리로 창조되었다면 나는 십원짜리요 내가 천하보다 귀하게 창조되었다면 또 그만큼의 값이 나가겠지요.

우린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에 동참하도록 계획된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해서 무엇을 채우고자 해서 우릴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과 기쁨을 나누길 원하셨고 그런 대상으로 우릴 창조하신 것입니다.

요즘 유럽등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존재의 근원”정도로 생각하는 분들이 늘어나는 듯 합니다.

창조주가 어떻게 인간처럼 사랑과 미움이 있고 기쁨과 슬픔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자신 스스로에겐 언제나 사랑이며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 인간이 그 사랑과 기쁨에 동참하지 못했을때 그 인간을 향한 안타까움을

미움과 슬픔이란 단어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요 기쁨이기에 사랑이 아닌 존재와 기쁨이 아닌 존재와는 영원히 함께 할 수 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사랑과 기쁨의 존재가 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사랑이시고 기쁨이십니다.

우리와는 상관없이 이미 그런 분이시기에 우린 그 분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며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 욕심에 끌려 이 바라봄과 누림의 특권을 잃어버린채 흙의 존재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린 이런 엄청난 창조의 목적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첫째는 창조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날 이렇게 특별하게 창조하셨음을 믿는다면

날 위해 천지만물을 만드셨다는 것도

날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도 너무 당연한 사실이 됩니다.

둘째는 구속입니다.

창조의 목적을 버린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수 없었음을 알게 될때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행하심이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될때

우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소망의 약속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핵심이며 완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리시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누리시는 새생명, 하늘잔치의 주인공, 하늘의 부유함(영광),

상속자의 자리를 우리에게 이미 주셨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엡3:6)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영원한 소유물이며

우리가 영원히 입고 살아야 할 옷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믿는다면

우릴 위해 죽으셨고 지금 우리의 생명이 되어 계신 예수님이

얼마나 좋고 또 좋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엄청난 축복을 받은 우리를 우리가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것은 너무 당연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의 약속을 통해 예수님과 하나되게 하고

우릴 최고의 자리에 가장 빛나고 높은 자리에 세우십니다.

이렇게 소망이 중요하기에 사도바울의 글도 온통 소망으로 가득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15:13)

그러므로 소망만이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게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감격하게 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에 마침표를 찍게 합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대접해 주심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와 구속과 소망주심에 근거해서 우릴 대접하십니다.

우리가 불쌍하고 안쓰러우니까 우릴 사랑하시기 보다는

정말로 우리가 값지기에 우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고의 보물이기에 상속자이기에

하나님은 우릴 극진히 대접하시고

목숨을 다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앞의 네 가지의 사랑을 알고 믿고 느끼게 해서

열매를 맺게 해 주심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의 사랑을 믿게 하여 열매맺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선물)입니다.

이렇게 다섯까지로 사랑을 말할수 있는데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간섭하심도

이 열매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알고 느끼면 반드시 열매가 맺습니다.

보통 저는 일곱까지로 나눕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나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보이는 것을 바르게 사용합니다.

죄를 알고 싸우게 됩니다.

영적분별력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이렇게 열매가 맺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맺은

열매이기에 세상은 알수 없는

영적이고 초월적이고 신령한 열매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이 열매를 얻기 위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열매가 맺는다면 사랑은 의미있는 것이지만

만약 열매가 없다면 농부의 수고는 모두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중에 장사비유가 많은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란 값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열매를 사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지금까지 영적열매는 어떻게 맺고 열매는 어떤 것이 있는지

간략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맺는 열매가 정말 구원의 증거가 될수 있는 열매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집을 짖지 않음이 아닌 모래위의 집을 짖는 것이 문제요

열매가 없는 것이 아닌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이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하면 나쁜 열매가 아닌 좋은 열매를 맺을것인가”입니다.

호산나넷에 가면  릭워렌목사님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책에 대해

존맥스웰목사님이 회개가 없고 죄의 지적도 없는 거짖복음이라고 비판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참 어렵습니다. 두 분다 미국에서 유명한 분들로 알고 있는데 과연 누가 맞는 것입니까?

초대교회때도 믿음의 진위여부로 말이 참 많았던것 같습니다.

다 믿는다고 하는 상황에서 누가 참믿음을 가졌는가를 아는것은 결국 열매(행함)뿐이었겠지요.

그 만큼 믿음의 문제는 만만한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조엘오스틴목사님이 맺고 있는 열매를 보고 우리가 맺는 열매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얘기해 보겠습니다.

조엘오스틴목사님은 “긍정의 힘” “잘 되는나” 란 책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목사님입니다.

요즘 설교제목도 “긍정적인 자기이미지의 중요성”이란 내용으로 설교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분이 주장하는 것은 “멋진 내가 되자”입니다.

멋진 내가 되는 것은 너무 좋습니다. 세상에도 인정받고 나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고

하나님도 원하신다니 이것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이 요구하는 열매일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멋진 나를 꿈꾸면 첫째 열매인 하나님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내가 아닌 “멋진 나”를 하나님이 바라보아야 하고

더 멋진 내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한 내가 될 것입니다.

또 둘째 열매인 나자신에 대해서도 성경은 영적인 자기존재감을 갖고

자기부인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과연 멋진 내가 되려는 사람이 이런 영적존재감과 자기부인의 길을 걸을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셋째 열매도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멋진 나처럼 되어야 하는데 이웃이 그러지 못하면 어떻게 대할까요?

결국 비교하고 비판하는 자리로 갈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죄에 대한 깨달음과 영적분별력을 기대하기도 힘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닮아감도 불가능할 겁니다.

예수님은 멋진 자신을 꿈꾼게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멋진 나를 꿈꾼다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매와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런 얘기에 환호할까요?

그것은 멋진 내가 되는 것이 사탕처럼 달콤하기 때문일것입니다.

멋진 나를 꿈꾸면 자기를 부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의 어두움도 보이지 않기에 세상과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

내가 멋있는(?)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멋진 나를 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보더라도 더 멋진 나를 위해 필요한 무엇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바라보겠지요.

결국 이사야가 29장에서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찾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이는 사람의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한탄했던 것처럼 “멋진 나를 가르치는 것”은

사람의 가르침일 수 있고 입으로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만들 뿐입니다.

결국 우리가 왜 “영적인 나”보단 “긍정적인 나”를 선택하게 되는 가는 분명합니다.

긍정적인 내가 휠씬 쉽고 매력적이고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면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영안이 열리면 우리의 진정한 값어치는

긍정적인 내가 아닌 영적인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고 긍정적인 나를 넘어 영적인 나를 선택할 때

우리는 잃어버린 나의 값어치를 찾는 것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생명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관점을 보십시요.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이 꽃하나만 못하다.

그런데 이 꽃보다 너희는 더 귀하지 아니하냐…

얼마나 엄청난 반전입니까?

우린 이미 놀라운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긍정적이미지로 우릴

유혹하는 것은 사탕처럼 달수는 있지만 나쁜 열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나쁜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긍정적인 나”를 만들고 파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나쁜것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왜 그것을 그토록 강하게 질타를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긍정적인 내가 영적인 나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나”에게 세상도 인정해 주고 내 욕심도 충족할 수 있는 너무나

마음에 쏙 드는 “긍적적인 나”를 팝니다.

예수님에겐 이것이 나쁜 열매였고 모래위의 집이었고

넓은 길을 걷는 것이었습니다.

우린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맺는 열매는 좋은 열매인가 나쁜 열매인가?

긍정적인 나, 멋진 나를 이길수 없다면 자기부인도 없고

좋은 열매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말씀들은 긍정적인 나를 이기기위한

방법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사람중에 긍정적인 나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세상속에서 영적인 나를 꿈꾸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긍정적인 너를 이기고(부인하고) 영적인 너가 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영적열매를 맺는 영적인 내가 되게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초대와 부르심의 자리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님도 잘 압니다.

이런 글을 쓰는 저도 가끔 영적인 내가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고

긍정적인 나로 살고 싶어 유혹에 넘어집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날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난 아무것도 아닙니다.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은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이 찬양의 가사처럼 영적열매라는 선한 것을

내 스스로는 결코 열매맺을 수 없음을 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도록 주님마음(사랑) 내게 주소서”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열매를 맺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꿈)이

내게 이루어 져야 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영적인 열매를 맺읍시다.

영적인 열매의 가격은 결코 값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땅의 보화와 하늘의 보화인 영적인 열매는 비교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거듭난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들입니다.

부디 우리 모두 영적열매를 맺음으로

예수님이 걸으셨던 아름다운 길을 걷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