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내용은 독일 성 베네딕도 수도원장 안젤름 그륀 신부가 그의 책   “구원”(한충식 譯, 분도출판사 刊)에서 핵심 요지를 발췌, 정리한 것이다. 구원의 핵심은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인간으로서 우리와 똑같이 생활하시고 십자가에서까지 죽으신 것이다. 거기에 초점을 맞추면 다른 논쟁거리는 지엽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예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해 죽으러 오셨다”는 주장에 대해 이를 반박하고 있는데 음미해 보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일부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내용 중에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단지 내적 회개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라든가 이사야 53장 내용을 사랑에 관한 詩語로만 취급하는 것은 한쪽 측면만 본 게 아닌가 한다. 義化, 희생제물, 피로 깨끗이 씻김, 몸값에 관한 내용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너무 축소시켜 인간 내면의 영적 변화를 가져오는 상징 내지 표상으로 비하시켰다고 생각된다. 이하 한구절 한구절 면밀히 음미해가면서 읽어 주시기 부탁드린다.

1. 그리스도교의 중심 메시지

그리스도교의 중심 메시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이 말은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의 핵심이다. 신앙은 이를 이해해 보려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고 육신을 취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되심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떤 다른 것이 인간과 함께 있게 되었다. 이때 하나님은 단지 피안의 대상으로만 계시지 않고 역사 속에 들어오시어 사람의 몸으로 강생하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본성을 치유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람 되심으로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고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졌으며 거룩해졌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본성과 인간 역사에 신적 씨앗을 심으셨고 이 씨앗이 우리 안에서 싹트고 있다.  

성경은 구원의 비밀을 다양한 눈으로 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하나님의 강생을 통한 구원, 예수의 길, 가르침, 행위, 그리고 십자가 죽음 등을 통한 구원을  다른 각도에서 다루고 있다. 그중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원이 항상 논쟁의 중심을 이룬다.  
    
2.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원

“예수는 우리 죄 때문에 죽으러 오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말은 성경의 수많은 구원상과 맞지 않다. “하나님은 상처 입어 죽음에 넘겨진 인간 생명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사람 되심의 결과다. 하나님은 로마인들의 악의를 원하지 않으셨지만 그것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폭력과 피를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것에 부딪치셨고 폭력에 용서로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살해를 사주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유로운 은총 가운데 용서하신다.

십자가는 우리 구원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이어준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통해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한다는 모범을 보인 것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본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은 살인자도 용서하신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믿게 된다.

(1) 代贖
요한은 예수의 죽음을 대속의 희생 제물로 이해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려고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이 되시려는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취하셨다. 죽음까지 취하셨다. 예수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아버지에 대한 헌신으로 변화시킴으로써 폭력을 무력화시킨다. 사랑의 완성인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을 완전히 변화시킨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내적 회개의 상징이다. 우리는 죄에서 죽었다. 죄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그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롬6:7-8).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책을 짊어지셨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가 이미 죄에서 죽었으므로 죄는 더는 우리에게 권세를 부리지 못한다는 표징이다. 우리는 예수가 부활로 선사하신 새 생명을 믿어야 한다. 바울은 십자가를 보며 해방하고 격려하는 예수를 체험한다.

(2) 贖罪
예수는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 죄의 결과를 스스로 짊어지셨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속죄란 예수가 십자가에서 자기중심적 권력집단, 증오와 시기, 질투와 적대감의 결과를 몸소 겪었으며 저항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사랑하며 견뎌 내셨고 사랑으로 그 힘을 무력화하셨다. 예수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벌 받으시고 그럼으로써 죄 값을 다 치르셨다고 속죄를 그렇게 피상적이고 법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죄의 처벌을 법적으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죄를 지으면 스스로 벌 받는다. 죄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고 인간을 해치는 상황을 만든다. 이사야서 53장에서 말하는 바는 일종의 詩語로서 그것은 사랑으로 한 것이지 속죄 때문에 행한 것이 아니다.

(3)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심
바울에게 예수가 우리 때문에 죽었다는 것은 우선, 예수가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보여주셨다는 뜻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세상을 지배하는 죄를 드러내신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세상의 죄를 폭로하신다. 바울의 말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죄로 각인된 옛 삶을 지워버리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실현시킬 새로운 실존을 살라는 초대다. 예수의 죽음은 죄를 극복하고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예수가 나의 죄를 가져가셨으며 그것도 십자가에 지고 가셨다는 것은 중요한 상징이다. 이 상징은 체험을 표현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예수가 우리 죄를 의식적으로 떠맡아 등에 지고 십자가에 올라 거기서 폐기하셨다고 문자 그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이러한 상징을 통해 우리가 자책하지 말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우리는 죄에서 뿐 아니라 죄책감과 자기 정죄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4) 義化
십자가는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노력이 물거품 되었음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의롭게 되려는 경건한 자의 강박적 노력이 어리석은 것임을 보여주시고 새로운 길, 자유의 길, 양심의 길을 열어주셨다. 그리하여 우리가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하나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자신을 정당화해야 하는 법정, 자신을 무자비하게 단죄하는 초자아, 심판자 하나님은 물러났다. 그 대신 십자가에서 우리 죄인을 받아주시는 하나님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바울은 법전이라는 옛 방식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새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고 고백한다(롬7:6).

(5) 희생 제물
하나님이 자신의 진노를 가라앉히려고 아들을 희생했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성경에서 희생은 바침, 선물, 헌신을 뜻한다. 희생의 근본 목적은 내가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공경하기 위해 헌신하여 궁극적으로 나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희생 제물의 도살은 예수의 순종적 십자가 죽음에 대한 상징일 뿐이다. 희생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자기 의지나 소망을 떠나 나를 만드시고 이 세상에 보내신 분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의 희생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심으로써 이루어졌다. 하나님 뜻에 대한 순종은 그의 십자가 죽음에서만 실체화된다.

(6) 피로 깨끗이 씻김
예수의 죽음을 통해 양심이 깨끗해져 그대로의 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피 덕분에 하늘의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하늘의 성소는 히브리서가 바라보는 구원의 표상이다. 이는 결국 모든 사람 영혼 안에 있는 성소의 표상이다. 예수의 죽음으로 닫혀 있었던 성소가 열리고 우리는 날마다 살아계신 하나님 곁에, 하나님 안에 있게 되었다.

(7) 몸 값
디도서(2:14), 갈라디아서(3:13), 고린도전서(6:20) 등에서 바울은 예수가 우리를 사기 위해 비싼 값을 치렀다고 말한다. 이 같은 구매행위의 비유는 한편으로 우리가 가치 있고 존엄하다는 것을 상징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향한 예수의 관심을 상징한다. 베드로전서(1:18-19)에서 예수의 고귀한 피는 우리를 위해 내주신 사랑을 나타낸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 사랑이 우리를 채우고 무의미한 삶의 방식에서 해방시킨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