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에 직접 들어오셔서 공생애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여주셨고 우리 구원의 표상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부활하셨다. 승천 후 성령을 보내주시고 사도들과 신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셨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신의 존재에 관하여 신학자들은 다양한 근거를 제시하여 왔으나 현대 자연과학 특히 진화론, 분자생물학은 신을 부정하는 이유를 더 많이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와 같은 논쟁으로만 결론 낼 성질의 것은 아니고 심리학, 정신분석치료 결과, 영성체험 등을 동원한 보다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영적인 것을 이성에 의해서만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개월 전 다녀간 성 베네딕도 수도원장 안젤름 그륀 신부는 우리 무의식의 근저에 있는 ‘고요한 상태’를 우리의 근본인 靈으로 보고 하나님과 연결시킨다. 그는 Karl Rahner 신학체계와 C. G. Jung의 심리학에 바탕을 두고 오랫동안 수련해오는 과정에서 우리의 靈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것 같다. Jung은 일생동안 꿈의 해석과 심리치료, 분석 결과 우리 무의식의 심연에 하나님과 연계된 영적상태의 존재를 말한다. 불교 수도승들이 말하는 깨달음도 우리 마음의 근저에 내재하는 ‘고요한 상태’를 인지했다는 얘기 아닌가 한다. 가끔 교류하고 있는 어느 신부님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불교의 ‘절대적 無’를 동일한 것으로 본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다만 불교에서는 우리 각자의 마음의 심연에 있는 ‘고요한 상태’ 그 자체를 인식하는 데 그치나 기독교에서는 그 ‘고요한 상태’가 다시 초월하신 하나님과 연계되어 있다고 보는 것 아닌가 한다(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재하면서 초월하여 계신다). 얼마전 CBS TV에서 5회에 걸쳐 강의한 바 있는 김종성 목사(경주 길교회 담임목사, canmission 프로그램 운영)도 똑같이 우리 무의식의 근저에 있는 ‘고요한 상태’를 영적세계로 보고 심리치료, 영성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많은 성과를 보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기도와 명상 또는 영성훈련 프로그램을 통하여 breakout에 의한 초월경험을 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합일감을 느끼고 신비에 접촉하며 새로운 동기를 부여받고 시간이 정지하거나 느린 느낌을 받으며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고 한다. 기독교에서 성령체험을 할 때 일어나는 현상과 똑같다고 보고 있다.

2. 지난 연말 우연히 명동성당 서점에서 개신교 목사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한 어느 미국인 교수의 간증서 “영원토록 당신사랑 노래하리라”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루터의 개혁신학이 “오직 믿음으로(롬3:27-28)”와 “오직 성서만으로”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전자의 경우 약2:24(–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및 고전13:2(–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에 비추어보면 믿음과 동시에 행위도 뒤따라야 의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그는 후자에 관해서도 성서 어디에서도 하느님 말씀을 성서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있으며 성서는 하느님의 권위있는 말씀을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벧후1:20-21, 마18:17)에서는 물론 교회 전통(살후2:15, 3:6)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에 “오직 성서만으로”보다는 “오직 하느님 말씀만으로”가 맞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카톨릭 생활의 기반인 성체성사를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을 우리가 직접 체험하는 의식으로서 성서에 근거를 둔 것(요6:51-58 등)으로 매우 중시하고 있다. 성체성사를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당신을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적으로 온 몸과 영혼 속에 실제로 받아 모시는 과정이라고  보고 있다.

이들 사항에 관하여 그간 기독교에 관한 의문이 있으면 수시 상담해왔던 어느 교회 장로님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상담 결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 “오직 믿음으로(以信稱義)”의 문제에 관하여 약2:24나 고전13:2에서 말하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믿음을 전제로 한 것으로 믿음의 내용을 보충한 것 아닌가 한다. 약2:24도 2:21-26 전체 내용을 보면 이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믿는 자는 당연히 행위도 그에 부합하게 뒤따라야 할 것이며 믿는 자가 이해 못할 잘못을 저지르면 과연 믿는 자라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루터가 행위를 강조한 야고보서를 쓰레기라고 폄하한 주장은 지나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어느 교단에서 주장하듯이 어느 해 며칠 몇 시에 구원받았다든지 믿으면 구원받았으니 그 이후는 어떤 몹쓸 짓을 하라도 구원은 걱정 안해도 된다는 식의 주장은 문제가 있다. 믿는 자가 성경의 가르침에 반하는 행위를 하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를 저지른다는 성경 말씀도 있지 않은가.

다음 “오직 성서만으로”의 문제는 어떤가? 성경이 오늘날의 66권의 정경으로 확정된 것은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라고 하는데 이에 도달할 때까지 주후 30-397년의 세월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성서학자와 교계 지도자들의 수렴을 통하여 확정된 것이며 이단서와 정경을 구분하는 일관된 기준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완성된 성경의 바탕 위에서 기독교가 지난 2000년간 서구역사를 정신적으로 이끌어 왔으며 믿음의 역사를 전개해 왔다. 만약 “오직 성서만으로”를 “오직 하나님 말씀만으로”로 대체할 경우 어떤 문제가 생길 것인가? 성경에 다른 것을 추가할 경우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진위를 알 수 없어 지난 2000년간의 믿음의 역사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우리는 불확정성의 세계에 살 수 밖에 없다. 우리 믿음은 구심점을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실제 우리 주변에 수많은 이단이 발생하고 지금도 매년 수백 개의 교단이 새로 발생하고 또 사라지고 있는 것도 성경을 떠나있기 때문 아닌가 한다.

마지막으로 성체성사 또는 성찬식은 어떻게 볼 것인가? 카톨릭에서는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 되고 하나님 사랑이 예수의 몸과 피로 우리를 충만케 한다고 보고 있다. 요한복음의 많은 구절이 그렇기도 하지만 특히 성찬식 관련 구절은 신비적 요소가 물씬하다. 현대 자연과학에 물든 우리로서는 그저 신비적 현상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한편으로 고전11:23-29에서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시 우리와 약속하신 구원의 성찬의식을 기념하라고 되어 있다. 어떻든 이 의식이 매우 중요하고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카톨릭에서는 매주 미사 과정에서 성체성사를 하고 있고 일부 개신교회에서도 이를 강조하여 매주 또는 주요 절기마다 성찬식을 모든 교인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참고서적
(1) 안젤름 그륀: “인생을 이야기하다”, “구원”
(2) C. G. Jung의 자서전: 조성기 譯
(3) 김종성: “암~마음을 풀어야 낫지”, “의사 예수”
(4) Scott Hahn: “영원토록 당신사랑 노래하리라“
(5) 피터 블룸필드: “하나님의 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