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능하고 선한 하나님은 왜 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내버려둘가
– 우리는 죄 없는 사람들이 자주 고통 당한다는 사실을 만나면 하나님을 의심한다.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잔인하고 무자비한 존재로 표현하면 안된다. 하나님은 모든 표현을 초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통의 경험은 하나님을 찾는 우리에게 아픔이다. 고통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가.

– 많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세상의 고통에 대해서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시도하여 왔으나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해답이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신학자 칼 라너가 제시한 다음의 방향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을지 모른다.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음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음의 일부이다. 고통의 어두운 심연을 밝힐 복된 빛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찾는 길은 그를 이해할 수 없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2. 좌절 않고 고통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가.
– 우리는 왜 고통 당할가. 고통의 의미는 무엇일가. 우리는 고통 당하는 이유를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단지 고통을 인지할 뿐이다. 그러나 고통을 다각도로 이해 내지 해석할 수는 있다.
첫째로 사람들이 많이 선택하는 방법은 ‘벌’이다. 그러나 고통을 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고통을 잘 이겨낼 수 없다. 우리는 벌을 받는다고 느끼면 즉시 자신에게서 책임을 찾는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 좌절하게 되고 더 큰 고통에 시달린다. 이 방법은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다.
둘째로 우리는 고통을 ‘도전과 자극’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고통을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으며 우리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기 위하여 고통을 준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셋째로 고통을 ‘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영혼의 단계로 나아가는 길이다. 피상적인 삶을 멈추고 고통 당함으로써 우리를 떠받치는 참된 근본을 찾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통을 ‘종교적인 도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깨뜨리는 것이다. “우리가 좌절한 곳에서 우리의 영혼을 덮은 두루마리와 가면, 철갑이 깨어진다.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의 참된 자아를 위해서 깨어지고 또한 하나님을 위해서 깨어진다.”

–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원인을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와서 고통을 짊어졌다. 인간의 고통에 맞서고 많은 병자를 고치며 앉은뱅이를 일으켰다. 하지만 세상의 고통을 다 없애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도 끝내 고통을 경험했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 우리는 세상의 고통과 맞서서 싸워야 한다. 고통이 닥쳐도 좌절하면 안된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 삶의 기준을 점검하고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믿음을 버려야 한다. 우리의 자아상 뿐 아니라 고정된 하나님의 형상을 깨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아마 참된 본질을 위해서, 마음속 근본을 위해서 깨어질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고통에 좌절하지 않으면서 인내할 수 있다. 고통이 닥쳐도 우리를 붙잡고 떠받치는 하나님을 믿으며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리를 경험하면 고통은 우리 마음을 차지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고통에 무너지지 않는다.

3. 실패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가  
– 원래 실패 그 자체에는 의미가 없지만 우리는 실패에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다. 시험에서 떨어진 사람은 실패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실패를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 우리는 실패하면 우리 안에 있는 무엇, 즉 희망이 깨어진다. 이 경우 우리는 두 가지 방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실패를 통해서 우리와 우리 삶에 대한 상상을 깨뜨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패를 겪고서 좌절하는 것이다. 우리가 상상을 깨뜨리면 실패는 완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참자아와 하나님을 위해서 깨어질 수 있다. 하나님은 실패로 부서진 우리 삶의 조각을 새로 맞추어서 우리 참본성과 더 어울리는 형상을 만들 수 있다.

– 따라서 실패는 우리가 마음 속 하나님의 유일한 형상으로 자라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희망의 표시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실패는 없다는 희망의 표시이다. 새로운 가능성이 되지 않는 실패, 하나님의 넓음으로 부활하지 않는 실패는 없다는 희망의 표시이다.

– 의미는 항상 해석하기 나름이다. 만약 우리가 실패의 원인이고 우리가 모든 것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기운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가 실패를 겪어서 우리 안의 무엇이 깨어지고 우리의 원래 본성이 잘 나타났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존엄성을 잃지 않고 의기소침하지도 않을 것이다. 심지어 실패를 성숙하고 성장하며 하나님이 지은 우리 본래 모습이 되는 기회라고 생각할 수 있다.

4. 질병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가  
– 질병은 경우에 따라 절제하며 살라는 경고라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는 간혹 너무 많은 일을 지고 있으나 이를 깨닫지 못한다.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기지도 못하고 부탁을 거절하지도 못한다. 그러다 가끔 병이 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쉬면서 여유를 가지기도 한다. 또한 질병은 환자에게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기도 하며 육체적 질병에는 심리적, 정신적 부담을 덜어주는 측면도 있다.

– 그러나 병의 원인을 너무 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병에 걸렸을 때 자책할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몸이 아플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고 병은 더 악화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오히려 병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병은 무엇을 말하고 싶을가. 나에게 무엇을 알리고 싶을가. 내 생활은 어떻게 변해야 할가.”

– 하지만 무의미하게 보이는 질병도 있다. 살아날 희망이 없는 병, 심각한 암, 악성 뇌종양 등에서 우리는 아무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 이때 곧바로 의미를 묻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단지 우리는 의미 없는 현실을 견뎌야 한다. 칼 라너는 말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아들일 때만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성질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속성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렇다면 병에 걸리는 의미가 대체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단지 오래 살고 성공하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데 있지는 않다. 혹 불치병에 걸렸다면 삶의 다른 의미를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많은 불치병 환자들은 영혼의 근원적이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점점 투명하게 나타낸다. 얼마 오래 사느냐보다 하나님이 예비한 시간 동안 세상에 내 삶의 흔적을 얼마나 남기느냐가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