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많은 기독교인들과 신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특히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holocaust)을 보고 신이 어디 있느냐고 부르짖었고 절망했다. 무신론이 더욱 확산되고 사람들은 신과 멀어졌다. 현대과학의 발달과 진화론의 확산은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럼에도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신을 믿고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 하에 통치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를 가나 거기 계시고(시139:1, 7-8, 11-12) 우리의 머리카락조차 세고 계시며(마10:30) 인간의 악행도 당신의 사역에 사용하시어 당신의 역사를 쓰고 계신다고 주장한다.
  
  2. 하나님은 우리를 계획하시고 매사에 관여하신다는 점에 관하여 피터 블룸필드는 그의 책 “하나님의 인도”에서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란 없으며 대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폭넓은 원칙들을 주시고 자유롭게 선택하기를 바라신다”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과 방침에 따라서 일어난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제럴드 싯처는 그의 책 “하나님의 뜻”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한다면 우리가 미래에 관해 어떤 선택을 내리든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길이다”라고 말한다. 폴 투르니에는 하나님의 계획에 관하여 그의 책 “인생의 계절들”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 삶은 각자의 성품에 따라 인생을 일정한 가치 기준과 목적의식이 뚜렷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며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를 하나님의 계획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상기 피터 블룸필드가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없다”고 한 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계획의 관점에서 주장한 것이나 제럴드 싯처나 폴 투르니에의 관점에서 보면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수용할 수도 있겠다. 폴 투르니에는 또 계속해서 말한다. “사람은 헤매듯 더듬더듬거리며 전진한다. 그 동안 희미한 빛과 어둠이 끊임없이 교차된다. 때로는 순종하면서 때로는 반항하면서 수많은 시행 착오를 거친 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았을 때 비로소 각자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이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은 인간을 부르고 무엇인가를 기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 이어서 말하기를 “인생이란 순간순간의 사건만으로는 하나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 다른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의미가 생겨나며 인간을 이 단계에서 저 단계로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며 완성된 인격체로 만들어간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은 인간에게 가장 큰 사건이자 인격적 사건이 된다. 성경은 여러 인생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성경에는 진정한 만남이 가져오는 결정적 순간과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는 순간들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그러한 끊임없는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3. 역시 같은 취지에서 제럴드 싯처는  “하나님의 뜻”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 하에 당신의 의도대로 역사를 이끌고 가신다. 한편으로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고 일상을 자유롭게 선택한다. 그러나 인간의 개별사건은 하나님 주권 하에 포괄되며 하나님의 크신 뜻(숨겨진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 둘 사이는 마치 원이 그 안에 그려진 선분을 둘러싸는 것처럼 서로 충돌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소설가와 그가 쓰는 소설의 등장인물 간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소설가는 소설의 시공의 차원 바깥에 존재하나 등장인물은 이를 벗어날 수 없다. 구체적으로 요셉의 삶을 보자. 그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는가. 한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이야기 전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건들을 포함한다. 그분의 뜻은 요셉의 제한된 경험과 시각을 초월했다. 요셉의 선택이 아무리 실제요 자유로운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둘러싸여 있다. 하나님 당신의 주권적 목적을 이루신 것이다.

  4. 인간의 악행도 하나님이 당신의 사역에 사용하신다고 하는데 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바벨론 포로사건에 관하여 바벨론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간주되고 있다(렘37:8, 43:10). 그렇다고 바벨론의 침탈행위 자체가 정당화된다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바벨론 침탈행위는 인간이 저지른 하나의 죄악된 행위일 뿐,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당신의 본연의 계획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행도 못쓰실 이유가 없으시다. 폴 투르니에는 “모험으로 사는 인생”에서 말한다: 성경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커다란 비밀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악을 지으신 분이 아니며 자신을 악에게 내어주지 않으면서 악 위에 왕 노릇하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의 순종 뿐만 아니라 불순종에 의해서도 성취된다.  

   – 히틀러의 holocaust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철저히 반하는 사건으로서 어디까지나 죄악된 인간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를 당신의 뜻에 맞게 못쓰실 이유 역시 없다고 본다(그렇다고 꼭 쓰실 이유도 없다).  이 경우 당신의 뜻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국가독재주의나 인종주의의 끔직한 폐해를 인류 역사에 대한 가르침 또는 경종으로 사용하시고 있는 측면도 있지 않나 생각된다. 어떤 신학자는 holocaust를 유태인이 예수님을 죽게 한 죄과라고(마27:25) 주장하기도 하나 인간의 사고 범위는 한정되어 있어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 인간의 행동이 하나님의 역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관하여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반대로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는 당신 의도대로 진행된다는 주장이 있는 것 같다. 전자의 견해는 역사가 인간과 하나님의 교호작용에 의해 발전된다고 보는 것인데 실제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 주도 하에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역사의 도구로 활용되었을 뿐이며 그들의 행동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바꾼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간청을 들어주시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경우에도 그 분의 뜻이 바뀐 것은 아님.) 후자의 견해도 그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하면 전자와 같은 견해로 볼 수 있겠다.

  5. 그렇다면 우리의 행동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주권 통치 하에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 역할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주권 행사에 그저 수동적으로 대처하면 족한 것인가.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스런 지혜에 따라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지배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결과에 대해서는 그 일이 일어난 후에야 우리가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동안에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성경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겉으로 드러내는 인도를 잘 듣고 오로지 그 빛에만 의지해서 가는 것이다.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는 하나님의 주권에 맡길 뿐이다. 오늘은 오늘이 주어진 대로 성경에 따라 하나님을 믿고 최선을 다하여 살아갈 뿐이다*. 그리하면 우리는 배후의 인도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로운 목적들이 성취되도록 일하고 계신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곧게 하심으로써 모든 궁극적인 害를 없애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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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어긋나는 듯한 상황을 접하며 말할 수 없는 좌절과 혼란과 회의에 빠졌으며 자신의 사연이    어떻게 풀릴지 전혀 몰랐다. 그러나 그는 가장 어두운 시절에 조차도 끝까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임을 보이며 열심히 책임감 있게 일하고 순결함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