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이해
  
1.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관하여 상반된 주장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권적으로 통제하시며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자유로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것이지 그것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두 견해 모두 문제가 있다. 전자의 견해는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우리를 한낱 장기판의 말로 전략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결정론과 동의어가 되고 만다. 두번째 견해도 설득력이 약하다. 하나님이 약하고 무지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미래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되고 그분은 거의 무력해 보인다. 역사 속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힘이지만 역사를 지배하는 초월적 힘은 아니게 된다.

2. 이들 두 견해 모두 믿을 수는 없을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는 서로 상충되며 분명 모순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모순이 아니라 역설이다. 역설이란 두가지 말이 겉으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 보면 동시에 진실인 상태를 일컫는다. 이에 의하면 하나님의 주권도 인간의 자유와 상충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원이 그 안에 그려진 선분을 둘러싸는 것처럼 인간의 자유를 둘러싼다. 이는 또 한 소설가와 등장인물간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소설가는 소설의 시공의 차원 바깥에 존재한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줄거리를 모두 알고 있다. 작가로서 소설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반면 등장인물들은 소설의 시공의 차원을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이야기를 점차 전개되는 만큼 밖에 경험할 수 없다. 그들은 창작자가 아니라 창작물이다.

3. 이와 같은 예(역설)는 성경 도처에서 나타난다. 자신의 자유로 선택을 내리나 하나님께 종속되는 것을 본다. 그들은 자신의 눈앞의 경험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은 거의 못본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훨씬 큰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자신에게 영원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못본다. 그저 자신이 아는 하나님께 반응할 뿐이다. 그분은 그들에게 계획의 일부를 계시해 주시면서도 여전히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요셉의 기사가 좋은 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어긋나는 듯한 상황을 접하며 말할 수 없는 좌절과 혼란과 회의에 빠졌으며 자신의 사연이 어떻게 풀릴지 전혀 몰랐다. 그러나 그는 가장 어두운 시절에 조차도 끝까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임을 보이며 열심히 책임감 있게 일하고 순결함을 지켰다.

– 요셉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는가. 한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이야기 전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건들을 포함한다. 그분의 뜻은 요셉의 제한된 경험과 시각을 초월했다. 요셉의 선택이 아무리 실제요 자유로운 것이었다 해도 그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둘러싸여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적 목적을 이루신 것이다.

4. 요셉, 모세, 에스더, 룻, 바울, 베드로, 그밖의 수많은 성경 인물들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행하는 삶을 택했다. 그들은 종종 그럴만한 이유가 없어 보일 때에도 하나님을 믿었다. 그들은 긍휼을 베풀며 선하고 진실하게 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숨은 뜻을 모른다는 것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주권(숨은 뜻)과 계시(성경의 말씀과 인도)된 뜻 사이의 긴장은 그분의 구원의 뜻에서 궁극적 해결을 맞는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은 우리를 본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준다. 그분의 숨은 뜻은 만물의 전체 설계와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의 숨은 뜻은 이야기가 완성되는 날 승리와 축복을 약속한다.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지극히 용기있는 행위다. 인생이 아무리 비참하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이야기를 영광스럽게 끝내실 것이다. 그것을 믿는 것은 결단이 필요하며 그 결단이 곧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Ⅱ.  고난의 뜻과 믿음

1. 인간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연의 계획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용하신다. 고난은 종종 그분의 계시된 뜻과 상충되어 보이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그분의 숨은 뜻을 성취한다. 아무리 처참하고 부당한 고난일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여 당신의 구속의 뜻을 성취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사건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이루시는 더 커다란 계획에 소용된다.

2. 고난은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세계에 의도하신 것과 어긋나면서도 역사에 대한 그분의 섭리와 계획에 들어맞는다. 이 역설의 전형적 예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십자가는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면서 동시에 가장 위대한 순간이다. 하나님의 뜻(“살인하지 말지니라”)에 대한 무엄한 도전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다(행 4:23-31). 끔찍한 불의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와 자비의 궁극적 표현이다.

–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그분은 의와 선을 행하도록 우리를 부르시며, 악과 불의를 정죄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당신의 섭리를 좇아 역사 속에서 신비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가장 비열한 행동과 인간의 가장 처참한 고난도 결국 그 결말은 영광스럽게 하신다. 고난은 우리를 겸손케 하고, 소망을 품게하며, 순종을 가르치고, 훈련과 회개에 이르게 한다. 이렇듯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부합된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래서 지당한 일이다. 가난, 추방, 투옥, 비난, 질병, 친지의 죽음, 기타 유사한 재앙 등 어떤 고난을 당하든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아니고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그러나 고난의 유익이 비록 영광스러울지라도 아직은 미래다. 고난 중에 있을 때는 특히 그렇다. 고난은 앞뒤가 안 보이는 깊은 숲속과 같이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고난은 우리를 완전히 에워싸고 압도하여 그야말로 고난 그 자체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고난은 집요하고 무겁고 가차 없다. 그래서 고난을 부딪칠 때 계속 전진하려면 더욱 절실히 필요한 일이 있다. 두 가지 보조 기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 첫째, 지도를 보아야 한다. 지도는 노정의 방향을 잡고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지도를 봐야 자신이 출발한 곳과 도착할 곳을 알 수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지도다. 성경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일 때에도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의 체험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끝내 하나님의 신실함을 맛보았다. 성경을 읽음으로 우리는 고난이 선한 뜻에 소용될 수 있음을 배운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고난을 성경 인물들의 고난에 비추어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의 고난도 끝났기에 우리의 고난도 끝날 것이며, 그들의 고난도 구속을 이루었기에 우리의 고난도 그러하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다. 고난이 마지막 이야기가 아니라 머잖아 선하게 반전될 더 큰 이야기의 한 부분임을 깨닫는 것이다.

– 둘째, 길을 따라가야 한다. 바로 믿음의 길이다. 성경에 일관성 있게 흐르는 주제가 하나 있다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으로 살도록 부르신다는 것이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볼 수가 없는 것들의 증거”다. 믿음은 물리적으로 보이는 것이 없이도 영적 실체를 보게 해준다. 고난은 하나님에 대해 심각한 의문들을 야기하지만 믿음은 우리에게 견딜 힘을 준다. 믿음은 성경에서 배운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지식과 고난으로 덧칠해진 하나님에 대한 주관적 감정 사이의 간격을 메워준다.

4. 믿음이 핵심 요소인 까닭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명확성을 막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왜 당신을 아는 것을 이토록 어렵게 만들어 놓으셨을까? 만일 하나님이 정말로 명확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다. 하나님의 부인할 수 없는 임재는 믿음을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다. 불꽃 같이 환한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를 압도하고 말 것이다. 필설을 초월하는 그분의 영광에 죄 많은 우리 인간은 눈멀고 엎드려져, 없는 자처럼 될 것이다. 그거야말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마음에 두신 목표와는 거리가 먼 상태다.

5. 우리는 성경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창조하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억지로 그런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을 만큼 많이 알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선택해야 한다. 그 믿음은 지적 동의 이상의 것을 요한다. 능동적 신뢰를 요한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시고,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고, 우리를 당신과 화목케 하시며, 우리에게 바른 삶의 길을 보여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