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목사님 그간 몸 건강하셨습니까? 무더운 여름 노고가 많으십니다. 저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서울강남노회 소속 노량진에 있는 열방교회를 담임하는 배장섭 목사입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저는 목사님의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하면서 제게 한 가지 심각한 고민이 생겨서 이렇게 자문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저는 목회하면서 언제나 원문 중심으로 말씀을 연구하여 한 구절도 빠짐없이 강해설교를 준비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현재 강해설교를 하고 있는 누가복음의 일부와 마가복음 외에 전 신약성경을 한절도 빠짐없이 원문 중심으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신학적인 문제로 인한 많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수백년 동안 내려 왔던 개혁주의 구원론 이신칭의가 지극히 비 성경적인 구원론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수없이 고민하며 성경을 연구한 결과 이제 한 권의 책을 쓰게 되었고, 출판을 앞두고 먼저 고명하신 여러 큰 교단 신학교에 재직 중인 신구약 신학자와 총신대 같은 경우에는 조직신학자들에게까지 아래에서 제시하게 될 이신칭의의 잘못된 점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자문을 구했습니다. 물론 총신대 신약신학자이시며 현재 대구 동신교회에서 사역하시는 권성수 목사께도 자문을 구했지만 총신대 유상섭 교수 외에 그 누구도 제대로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유상섭 교수(총신대 신약신학 교수)께는 제가 추가적인 자료를 드렸더니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여 책을 출판하기 전에 특히 목사님은 이신칭의 구원론에 일가견이 있으신 것 같아서 이렇게 먼저 고명하신 목사님께 아래 문제를 놓고 자문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의견이라도 좋으니 도움의 말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이신칭의 구원론이 잘못된 구원론이라고 생각하게 된 까닭은 첫째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된 목적을 두고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그 동안 율법을 좇아 살려고 노력했던 유대교의 구원론은 “율법을 좇아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는 잘못된 유대 율법주의 구원론”이기 때문에 반기를 들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법정적인 칭의 구원론을 깨닫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런 잘못된 유대 율법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볼 때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된 목적은 잘못된 유대 율법주의 구원론 때문에 거기에 대항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고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초대 교회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예루살렘 초대교회 안에 존재했던 바울이 주장하는 구원론과 다른 구원론을 주장한 소위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는 예수를 믿어도 구원 받기 위해서는 모세가 명하는 할례와 율법의 요구조건을 좇아 살아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잘못된 구원론에 대항하기 위하여 기록하였다고 봅니다. 따라서 개혁주의는 바울이 누구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지 그 대상을 잘못 짚은 것입니다.

둘째, 루터는 로마서 1:17 말씀에서 이신칭의 구원론을 주장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로마서 1:17 말씀은 이신칭의 구원론을 말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박국 2:4 말씀에 근거하여 간단하게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한 말씀일 따름입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서 1:17의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바로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바울이 인용한 하박국 2:4 말씀을 먼저 바로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박국 2:4 말씀은 결코 믿음을 칭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믿음이란 당시 불법이 횡행하는 암울한 시대에 신앙적 도전을 받았던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 때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첫째 하나님은 그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불의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응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박국 2:4 말씀은 두 번째 응답으로서 히브리 원문에 보면 종국에 구원의 영광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비록 불법이 횡행하므로 신앙을 지키는 것이 지극히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결코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해석의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문법적인 설명은 지면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셋째, 개혁주의는 로마서 1:17 말씀이 바울이 말한 구원론의 대원칙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바울의 진짜 구원론은 로마서 10:9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로마서 10:9에 보면 분명히 바울을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구원에 대한 대 원칙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며 더 중요한 사실은 로마서 10:9의 말씀은 새 시대, 새 언약에 대한 중요한 예언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요엘 2:23-32 말씀에 근거하여 새 시대 구원론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0:9-13 말씀은 요엘 2:28-32의 말씀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10:13에 보면 요엘 2:32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중요한 사실은 사도행전 2:16-21에도 보면 성령 강림의 역사가 일어난 후 당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하여 모였던 수많은 인파들이 성령 역사를 목격하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했을 때 베드로 사도가 일어나 설교한 말씀 중에 보면 베드로 사도도 바울처럼 분명히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해서 선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역사는 바로 그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에서 약속하셨던 약속대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놓고 볼 때 비록 예수를 메시아가 아니라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메시아가 틀림없지 않느냐고 외친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볼 때 루터나 개혁주의는 바울이 말하고자 한 진짜 구원의 대원칙을 놓쳐 버리고 엉뚱한 것을 구원론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넷째, 바울의 율법 부정에 대한 문제인데,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이 율법의 행위를 부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신칭의 구원론은 구약의 연속선상에서 구약의 구원론(소위 유대 율법주의)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를 부정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느냐 하면 바울은 어떤 곳에서는 율법을 부정한 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율법을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더욱이 중요한 사실은 과거 바울처럼 율법에 흠이 없을 정도로 철저히 지키라고 강조했던 모세나 여호수아나 사무엘과 심지어 메시아가 오시는 축복을 누렸던 다윗과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여담이지만 이 문제를 놓고 이한수 교수께서는 구약 시대 백성들은 한 사람도 구원 받지 못했다고 대답하셨고 김세윤 교수께서는 구약 시대에도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한 사람도 구원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틀린 이유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장이 나오는데 거기 보면 분명히 수많은 구약 믿음의 위인들의 모습을 들어 참된 믿음의 바람직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또한 김세윤 교수의 대답에 대해서 만약에 구약 시대에도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다면 굳이 바울이 할례와 율법을 부정할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결국 이신칭의 구원론은 이와 같이 구약 시대의 구원론에 대하여 명쾌한 해명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이신칭의 구원론은 바울이 유대 율법주의(?)의 연속선상에서 과거 구원론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를 부정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교 연속선상에서 유대교 구원론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셨던 새 시대 새 언약에 대한 예언의 말씀에 근거하여 새 시대는 구약과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언약을 좇아서 새로운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옛 언약적 조건인 할례와 율법을 부정했던 것이지 결코 옛 언약조건 하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구원론인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으로 할례를 행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은 마땅히 약속했던 것처럼 율법을 좇아 살아야 한다는 옛 언약적 구원론 자체를 부정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분명히 바울은 갈라디아서 5:2에 보면 “보라 나 바울이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인 할례를 부정했으며 또한 갈라디아서 4:10에 보면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날은 안식일을 가리키는 것이고 달은 월삯, 절기는 중요한 유대 3대 절기인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을 가리키는 것이며, 해는 안식년 희년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런 절기와 안식일을 지키면 “수고한 것이 헛되다”는 말은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인데, 분명히 바울은 할례와 율법 전체를 부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혁주의는

다섯째, 개혁주의 이신칭의 구원론은 로마서 10:4 말씀인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는 말씀에서 “율법의 마침”을 “율법의 완성”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그 이유는 새 시대를 옛 언약 시대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다 보니 이신칭의 구원론이 옳다면 당연히 그 전 바울이 살았던 유대교의 구원론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원문에 보면 “마침”이라는 단어는 “텔로스”라는 단어로서 원래 “마침, 끝, 마지막”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물론 마지막이기 때문에 또한 “완성”이라는 의미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에 바울이 “완성”이라는 의미로 쓰려고 했다면 로마서 13:10에 보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는 말씀에 보면 “완성”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완성, 성취”라는 의미의 “플레로마”라는 단어를 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분명히 “플레로마”라는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마침, 끝, 마지막”이라는 의미가 강한 “텔로스”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옛 언약 시대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옛 언약 시대가 끝났기 때문에 바로 그 다음 로마서 10:9에서 새 시대에 맞는 새 언약적 조건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구원의 대 원칙을 천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외에서 바울은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옛 언약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논증하고 있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여섯째, 개혁주의는 이신칭의 개념으로 모든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다 보니 언약적 개념을 간과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은 반드시 언약적 조건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먼저 짐승을 잡아 번제를 드린 연후에 그 짐승을 잡을 때 받은 피의 반을 먼저 제단에 뿌린 연후에 언약서를 낭독하고 그것을 들은 백성들이 “그렇게 하겠다”는 동의를 받은 연후에 나머지 피의 반을 백성들에게 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로서 언약 쌍방간의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먼저 피의 반을 제단에 뿌린 것은 하나님이 동의하신 것이요. 나머지 반을 백성들에게 뿌린 것은 백성들의 동의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언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것은 바로 언약 체결시 낭독했던 언약서입니다. 마태복음 26:28에 보면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찬을 들어 사례하시고 하시는 말씀이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셨지만 또한 출애굽기 24장에서 언약 체결시 행했던 피의 맹약과 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5에 보면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둡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물은 세례로서 죄 사함의 조건을 주는 것으로 받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자에게 그 증거와 보증으로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회개가 선행한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보증을 받아야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구원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된 회개란 과거 자신의 가치관과 인간적인 욕심을 좇아 살았던 모든 삶을 청산하고 앞으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명령을 좇아 살겠다는 자세를 말하는 것으로 바울은 이를 두고 로마서 10:9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말은 “호몰로게오”라는 말로서 “동의하다, 계약하다, 약속하다, 인정하다, 찬성하다”는 말로서 언약적인 용어로서 합의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믿는다”는 것은 그런 고백이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란 주인으로서 나는 예수님의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종은 주인의 말씀에 절대 복종하고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신칭의는 구약 언약적 조건인 율법을 좇아 순종하는 것은 율법주의라고 부정하므로 새 시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후에 종으로서 주인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 복종해야 하는 것조차도 부정해 버리고 오직 믿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중요한 사실은 요한복음 13:34에 보면 예수께서 분명히 새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새 계명이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3:8에 보면 분명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빚”이란 “옵페일로”라는 말로서 “의무, 빚”을 의미하는 언약적 용어입니다. 따라서 새 시대에는 오직 유일한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만 지키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비록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단 하나의 계명이지만 마태복음 22:34-40 말씀에 따르면 구약 율법과 선지자 전체의 정신을 한 마디로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좇아 지키게 되면 구약 율법과 모든 선지자의 정신을 그대로 지키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로마서 13:8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말라”고 말씀하신 연후에 그 다음 말씀에 보면 그 이유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새 시대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 예수께서 명하신 유일한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좇아 순종하는 삶이 반드시 뒤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신칭의는 그것을 간과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일곱째, 이신칭의 구원론은 로마서 4:3에 보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으니라”고 하신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을 아브라함의 이신칭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로마서 4:17-22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신 까닭이 나오는데, 17절에 보면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하신 말씀은 창세기 17:4-5에서 약속하신 말씀으로서 창세기 17장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고, 반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중요한 언약을 체결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언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언약적 조건으로 할례를 요구하시고 만약에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게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언약을 체결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언약적 조건으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아브라함으로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약속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었느냐 하면 첫째,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이라고 말씀하신 다음 “죽은 자를 살리시며”(롬 4:17)라고 하신 말씀처럼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으로 믿었으며 둘째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이시니라”고(롬 4:17) 하신 말씀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믿었으며 또한 셋째,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고(롬 4:18) 하신 말씀처럼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었으며,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고(롬 4:18) 하신 말씀처럼 그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넷째, “그가 백 세가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람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롬 4:19) 말씀하신 것처럼 도저히 불가능한 가운데서도 결코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그 약속하신 바를 붙잡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상의 사건에 대해서 창세기에 보면 바울이 진술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비록 로마서 4:22에서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고 창세기 15:6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창세기 15:5에서 창세기 21장 사라가 이삭을 출생할 때까지의 기간을 근거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아브라함이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은 것은 창세기 15:6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창세기 17장 언약에서 인정받은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단지 약속하신 바를 인정하고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약속하신 바를 믿고 인정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도저히 그 약속 성취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의심치 않고 그 약속의 말씀을 이루실 것을 믿고 그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삶을 두고 한 믿음이라고 말했을까요?
더욱이 중요한 사실은 창세기 15:6에 보면 개혁성경에서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매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번역하고 있지만 히브리 원문에 보면 믿음을 사역 동사를 썼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도록 하매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에 대한 주해는 많이 복잡하기 때문에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가 쓴 책을 통하여 말씀드리기로 하고 다만 중요한 사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좇아 신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의란 약속을 좇아 신실하게 살아가는 그 믿음의 모습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인정 받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덟째, 이신칭의 구원론은 구약 유대교 구원론이 율법을 좇아 순종함으로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고 잘못된 구원론이라고 바울이 거절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증언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비록 나름대로 율법을 좇아 열심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벨론 포로 이후 장로들이 율법을 해석하여 집대성한 율법 종합해석서라고 할 수 있는 탈무드가 율법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율법에 없는 조항을 임의로 첨가하고 있는 것을 빼 버리고 심지어 잘못된 해석으로 말미암아 율법 본래의 의미와 정신을 잃어버리고 왜곡된 율법의 정신을 좇아 가르치고 순종하다 보니 비록 나름대로 열심히 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잘못된 율법의 정신과 의미를 좇아 순종했기 때문에 외식적인 종교로 전락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순종을 해도 그것은 결국 진정한 의미의 순종이 아니라 불순종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버림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신칭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율법을 좇아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거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께서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고 변개함이 없이 하나님은 그 약속하신 바를 다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100%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인간인지라 100% 철저히 순종할 수 없기 때문에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회개의 삶은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아홉 번째 이신칭의 구원론에 따르면 유대교의 유대 율법주의가 잘못된 구원론이기 때문에 바울이 거절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철저히 순종할 것을 권고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의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좇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불순종하므로 결국 북조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하고, 남조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당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말씀에 순종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신칭의 주장이 옳다면 구약 성경 전체가 율법을 좇아 순종해야 된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칭의를 강조해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사울왕은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와 영광을 입어 초대 왕으로 택함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아 순종하여 전쟁에 나가 아말렉을 맞아 목숨걸고 싸웠을 뿐만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며 진멸하기까지 했지만 다만 한 가지 그 중에서 아각 왕과 그의 소유 중에서 극히 좋은 것, 그것도 하나님께 감사의 번제로 드리기 위해서 남겨 두었던 것 때문에 버림 받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사울 왕이 한 것은 지극히 적은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그마한 불순종 때문에 버림받게 되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신칭의 구원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율법을 좇아 의롭게 되려고 순종하는 것은 스스로 의를 이루려는 것이라서 버림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순종해도 100%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까? 따라서 단지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이신칭의는 잘못된 구원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열 번째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조상들은 구약 시대 백성들을 위하여 제시한 것이 아니라 새 시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들에게 참된 믿음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그들의 삶의 모습을 통하여 보고 배우라고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을 놓고 연구해 보면 그들은 하나같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극한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좇아 신실하게 살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바울이 율법을 좇아 순종하려는 삶이 스스로 의롭게 하려는 잘못된 구원론이라는 이신칭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는 단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열한 번째, 로마서 4:11에 보면 바울은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받게 되었다는 것이며 또한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5:2에서 거절한 그 할례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던 것을 인친 것이었습니다. ‘인쳤다’는 말은 “스프라기스”라는 말로서 한 마디로 그것을 보증한다는 의미로 ‘도장을 찍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것에 대하여 그 보증으로 도장 찍었던 바로 그 할례를 바울은 부정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새 시대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했지만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징표였음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부정했다는 것은 똑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왜 할례를 부정했을까요? 이신칭의 개념하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하게 된 새 시대는 구약 시대와 연속선상이 아니라 새로운 언약적 조건을 좇아 시작되었기 때문에 할례란 옛 언약적 조건을 요구하셨던 것이기 때문에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시대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 조건은 할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롬 10:9) 의미에서 지난날의 삶을 청산하고 회개하고 그 증거로 물과 성령으로 세례(요 3:5)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신 언약적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이 요구하신 언약적 조건을 좇아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할 말이 많지만 지면 관계상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간략하게 정리해 봤습니다. 이상 제시한 것들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맞다면 이신칭의는 잘못된 구원론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상 제시한 것은 이신칭의 구원론에 근거하여 반론을 제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느 하나만 맞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전부 다 맞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책을 쓰면서 제가 알게 된 사실이 틀리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제가 맞다면 지금까지 근 4-5백년 동안 철웅성처럼 모든 개혁주의 성도들이 믿어 왔던 구원론이 무너지게 될 뿐만 아니라 더욱이 중요한 것은 그렇게 믿었던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래도 구원 받을 수 있을까요? 만약에 그래도 구원 받을 수 있다면 바울이 초대교회 당시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어도 구원 받기 위해서 모세가 명한 할례와 율법의 요구조건을 좇아 순종해야 한다(행 15)고 주장했던 그들을 가리켜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고 무서운 저주와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비록 좀 다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믿어도 바른 진리를 좇아 신앙생활해야만 한다는 단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신칭의 구원론이 잘못 되었다면 그것을 옳다고 믿고 그렇게 신앙생활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저는 이 문제를 놓고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 하면 정말로 하나님이 계시는가?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래서 저는 기독교가 진짜 참된 종교인지, 하나님은 진짜 살아계시고, 또한 예수께서 진짜 메시아인지에 대한 문제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하며 성경적인 증거를 찾으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 때문에 마태복음 이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또한 성경은 진실이며 아울러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이 틀림없다는 수많은 객관적인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지금 이 문제는 제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쓰게 되었던 것이고, 아울러 혹시 만에 하나라도 제가 모르는 어떤 사실이 있다면, 또한 잘못 알고 있다면 책을 출판하기 전에 미리 고치고 시정하기 위해서 이렇게 먼저 저명한 바울 신학자들과 신약 신학자들과 구약 신학자들, 즉 성경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조언을 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이제 목사님께도 이와 같이 조언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렇지 않아도 요사이 기독교가 많은 도전을 받고 있는데, 만에 하나라도 제가 잘못되었다면 잘못된 신학 때문에 믿는 성도들에게 더 큰 부담을 안겨 주지 않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여 부디 부족한 종의 번민을 무시하지 마시고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바쁘신 줄 알면서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언제나 몸 건강히 하나님의 귀한 사역자가 되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