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의 존재에 관하여 상반된 주장이 있다. 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쪽은 다음 논리에 따른다: “어떤 사상이든 그 배후를 계속 추적해 올라가면 결국에는 출발점에 도달할 수 있다. 무엇인가 스스로 존재하는 것, 곧 궁극적 실재요 다른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그 무엇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없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이 궁극적 원리가 신적 존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완전한 진리, Nancy Pearcey, p.84). “그저 존재할 뿐이다”에 비슷한 구절이 성경에도 들어 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애굽기 3:14).

Richard Dawkins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 이와같이 무한회귀와 그것을 종식시키기 위해 신을 불러내는 것은 헛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금을 원자 하나보다 더 적게 자른다면 그것은 이미 금이 아니다. 그 원자는 자연적인 종식자다(pp.124~125).“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신적 존재를 무한회귀식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여러분은 어느 쪽 주장에 동조하는가. 신적 존재를 논리상으로 따져들어 가면 불가지론, 회의론 아니 결국 무신론으로 빠지게 되는 것 같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신을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 경험으로는 교회 다니면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면 할수록 기독교는 더 가까워지고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 아닌가 한다. (강해)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성경이 더욱 이해가 가고 더 이상 신의 존재에 관하여 무슨 논리가 필요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신의 존재는 예수님의 현현(顯現)이라는 어떤 논리가 필요없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예수님의 강림, 사역 및 죽으심과 부활, 성령의 역사가 사실이고 신,구약이 이를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생생한 설명서로는 그리스도인,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pp.412~418, Charles Colson). 또한 찬송가를 부르며 흐르는 눈물을 그저 단순한 생화학적 승화작용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성경을 접하면 접할수록 믿어지고 멀리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것 같다. 내 경험에 의하면 그것도 성경의 심오한 말씀을 강해설교 등을 통하여 깊은 의미를 찾아야지 그저 단순한 이야기식으로 이해한다든지 문구 해석에만 의존하면 흥미를 잃기 십상이다. 대부분의 설교가 신도들이 궁금해 하는 사항에 대하여 즉답을 피하고 성경에 씌여 있다 하여 기정사실화함으로써 더욱 궁금케 하고 세상과 동떨어진 신화같은 내용이 주를 이루어 답답하기 그지없다.

3. 그러나 살아가면서 세상에 몰두하게 되면 여전히 기독교는 남의 얘기 같게만 들린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은 또 오늘의 반복이다. 여기에 무슨 하나님이 개입되는지 의문이 간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존재란 말인가? 최근 내가 접한 두가지 기사가 이 문제를 다시 음미하게 만든다.

첫번째는 얼마전 중앙일보(07.12.6 인물란)에 게재된 기 작고한 강원룡 목사님의 믿음에 관한 대담 내용이다. 그는 하나님에 관하여 “어떤 노인이 한 별에서 ‘이놈 저것하고 있구나’ ‘누구는 밥을 먹고 있구나‘ 하는 식으로 볼 수는 없다”고 했다. 하나님은 어떤 실체가 아니라 “탁자 위 꽃에서 느껴지는 어떤 에너지, 거기서 생명이 나오고 아름다움이 나오고 근원적인 사랑이 나오는 에너지”로 보고 있다. “그러한 하나의 근원적인 힘, 우주 전체가 거기서부터 탄생되어진 그 파워가, 그 에너지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고도 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의 안에 있는 것처럼 나도 너희 안에 있으니 너희도 내 안에 있느니라”(요17:21)에서와 같이 내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살고 계시다(갈2:20)는 뜻이라고 보고 있다. 정통신학과는 다른 신관이다. 성경에 하나님은 구약의 믿음의 선조들에게 나타난 것과 같이 실물로 보이지는 않지만 실체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심리학자 Carl Gustav Jung의 종교관이다(문화일보 08.1.14 종교란). 그는 종교를 자기(Self)실현의 수단으로 보고 자기실현은 자아(Ego)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들으며 그 지시를 받아나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는 부처와 예수의 삶을 개인의 인생 전체를 통해 스스로를 주장한 자기실현으로 이해한다. 다만 둘 다 자기실현으로 세상을 극복한 것은 같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서로 달라 부처는 이성적 통찰로써, 예수는 숙명적 희생으로써 자기실현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또한 인간으로서 닿으려 했던 궁극점 내지 최고의 의미는 도덕적 완성이나 자연과 인간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기보다는 오직 그것이 존재한다는 데 있으며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하였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해 철저히 참여하였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한다. 정통신학과는 분명 다른 신관이다.
4. 이들 3가지 신관(기독교 정통신학적 관점, 강원룡목사님의 관점, Jung의 관점)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존재 나아가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는 자기체험, 관조적 자세에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신을 경험하는 삶을 통하여 인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하나님 체험이란 어떤 면에서는 Jung의 관점을 취하면서 기본적으로는 성경적 정통의 관점을 유지하는 자세로 꾸준히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이리라. 살다보면 좌절하는 경우도 많고 건강으로 고통속에서도 살며 어떤 때는 무미건조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전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나날도 많으리라. 그와같이 목적없이 세상에 빠져 휘둘리면 그것은 無를 향해 가는 것일 것이다. 반면 매사에 삶의 의미를 찾으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찾는다면 그것이 바로 생명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일생이 구도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구도에도 여러 길이 있을 수 있다. 여러분의 판단과 선택에 달려 있다.

많은 사람들은 대형사고나 전쟁, 재해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하면서 단연코 신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신은 그와같은 세상문제 해결의 신은 아닌 것 같다. 고통받는 자에게 위로가 되고 사랑으로 감싸는, 우리 세상 논리와는 다른 차원의 신인 것같다. 믿음이란 찬송가 470장(내 평생에 가는 길)에서와 같이 네 딸을 바다에서 잃고 난 후 익사한 곳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감지하는 어떤 변호사의 믿음과 같은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