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TV에서 우주여행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우리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우주를 보고 새삼 놀랐습니다. 정말 우주는 얼마나 클까? 무한에 가까운 우주 안에 내가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언어를 만들어 수많은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의사소통 체계를 만드는 인간, 작은 도구를 만들던 원시시대부터 만들기의 달인이었던 인간, 지금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만들고 있는가!

무엇보다 어제 본 우주선은 앞으로 우주여행을 가능하게 한다고 하니 인간의 만들기 능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프로그램의 마지막에 우주탐험의 목적은 지적 생명체를 만나는 것이고 그러한 것을 통해 인간이 혼자가 아님을 비로소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끝을 맺었습니다. 우주를 탐험하는 노력을 하는 이들에게 또, 인간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려는 이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주일동안 여러 가지 생각들을 했는데 특히 좋은 것(마 7:11)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주실 “좋은 것”을 얻도록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완성시키는 것인데, 하나님 자녀로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좋은 것은 앞부분에 보면 하늘보화, 진주, 하나님 나라와 의 등으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인데 이 믿음이 생기는 만큼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사랑하는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지혜자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설계하고 창조하고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이고 왜 존재하고 있고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또, 왜 만물은 무의미한 것 같은 반복을 쉼없이 하며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가? 등에 대한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만드셨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길은 어떤 길인가? 까지도 분명하게 아시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는 곧 관심이라고도 합니다.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어가시기 위해 끝없이 관심을 두고 투자하시는 것이 사랑이겠지요.  

  물론 각자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내용과 색깔은 조금씩 다르다고 봅니다. 이번주에는 저에게 있는 좋지않은 감정 때문에 힘들었는데 그 감정과 싸우시는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개인적으로 느끼는 사랑인데 이렇듯 믿음은 가장 작은 부분에서부터 큰 것까지 다양하게 다가 올수 있다고 봅니다. 어찌되었건 이런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지혜와 생명에 대한 믿음이 성경에선 하나님의 영광(이름, 거룩, 완전)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다른 말로 새 옷, 일만 달란트, 혼인잔치라고 부릅니다.

결국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영광(이름)이란 새 옷을 입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라고 찬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곧 하나님 나라(자녀, 왕국, 다스림)요  ‘하나님의 의’ 곧, 사랑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새옷이 하나님나라 라면 이 새 옷을 입히고 싶어하는 마음이 사랑이겠지요. 예수님의 죽으심도 우리에게 새 옷을 입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초청장과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도 이 때문이겠지요.

  이런 새 옷을 입히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성경 전체 속에 나타납니다. 인간은 육으로만 살 수밖에 없는 존재처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육(떡)이 우리의 판단기준과 잣대가 됩니다. 외모나 돈의 유무, 성격, 국적 등등 물론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분명 필요한 것들입니다. 저도 돈이 좋고 우리나라가 축구에서 이기면 환호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즉, 새 옷을 입고 삽니다. 인간적인 면도 사랑하지만 더욱이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새 옷을 입혀 최고의 존재로 만들고자 하시는 완전한 꿈이 있기에 그들을 사랑합니다. 저는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꿈을 현실로 이루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꿈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하심을 통해 잘 나타납니다. 안전한 배에 있던 제자들에게 배는 풍랑이 이는 자신을 지켜주는 안전지대였습니다. 마치 우리의 떡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그들 앞에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오십니다. 물위를 걷는 예수님은 마치 새 옷을 입고 사는 예수님의 삶과 같습니다. 그것은 안전한 배위에서는 마치 유령과 같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베드로는 두려운 발걸음을 떼서 물위로 걸어갑니다. 그리고 물에 빠집니다. 그때 새 옷을 입으신 예수님의 손이 그를 붙잡습니다. 그리고 함께 배에 오릅니다.

만약 베드로가 안전한 배위에 있었다면 결코 물에 빠지는 일도 예수님의 손을 잡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떡으로만 사는 삶을 넘어 새 옷을 입고자 하는 소망을 가질 때 우린 하나님의 기준으로 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고 비로소 예수님의 구원의 손을 바라게 됩니다. 그때 그 손을 잡게 되고 우리는 구원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이 그림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하고 자라고 완성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베드로의 몸이 안전한 배와 물위와 물아래와 다시 예수님의 손을 잡고 물위를 걸어 끝내 배위에 오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자녀로서 완성되는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모든 것을 겪고 오른 배는 이제 구원의 노래를 부르는 배요 새 옷을 입은 배가 된 것입니다.

  새 옷을 입고자 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이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만약 안전한 배위에서 예수님만을 찬양하면서 더욱 안전한 배만을 꿈꾼다면 우린 이름뿐인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의 노래도 부르기 힘들고 또 믿음과 행함의 관계는 우리가 풀 수 없는 딜레마로 남을 것입니다.

‘깊은 강에서 주가 나를 일으키셨도다 구원의 노래 부르리’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시는 예복을 입고자 할 때 우린 우리가 얼마나 깊은 강에 빠져 있는가를 알게 되고 우리 손을 예수님의 말씀에 뻗게 됩니다. 그때 말씀은 우리의 구원의 노래가 됩니다.
‘구원의 노래 부르리’

무한한 시간과 공간과 역사가 우릴 향해 흐릅니다.
당신 안에 하나님의 꿈을 이룰 모든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꿈이며
당신은 구원의 노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