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간음한 여인사건’을 묵상하다가…바리새인들의 행동이 이상하게 여겨졌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회개하는 경우가 드뭅니다.그들은 이미 예수님과 안식일 지키는
문제로 대립하던 자들이었습니다.그래서 이들의 반응은 지혜로운 말씀때문만이 아니라…예수님의 태도때문
이었을 것 같았습니다. 생각할 여백을 주시는 듯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드러내고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영혼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호통치며 회개와 심판만을 외치신 것이 아니라… 표적을 보여주시고, 가르치시고,섬기시고, 호통도
치시고,여백도 주시며…어떻게해서든 백성들이 회개하며 믿음의 관문을 통과하길 바라셨습니다.

그 무렵 저는 어느 신부님의 이런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정의’는 ‘뉘우침’이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섣불리 행동해서 죄인에게서 뉘우침을 빼앗지 말라하셨습니다.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지만…왜 굳이 ‘정의’란
단어까지 사용할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큐티해설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하박국처럼 “어느 때까지리이까?”라고 외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가라지를 뽑아내고 싶어했던 종들처럼 당장 정의를 완성하고픈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

이 말씀들은 저에게 하시는 말씀같았습니다.
그 무렵..돈과 관련한 어떤 문제를 덮어주는 중에 마음이 영 불편했었습니다. 맘만 먹으면 알아낼 수 있었지만
그 일을 함께 겪으신 집사님은…하나님께 맡기자고 하셨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앞,뒤 정황으로 볼 때 보통 간이 부은 일이 아니었고 … 습관이 될 수도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항상 용서하되 모든 문제를 항상 덮어야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이 생각엔 조금도 틀린 점이 없어 보였습니다..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번 경우에는 맡기고 덮어야한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지나친 대가를 치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질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주일설교 중에는…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한 달란트 가진 자가 정말로 주인의 뜻을 몰랐겠냐는 것입니다.그들는 알았지만 논리적으로 변명하며 스스로
속인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성경과 양심 >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도 변명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변호하고 정당화시킨다고해서..그것이 ‘정의’겠냐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같이 말씀과 양심에 ‘정직’하게 반응해야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두려워
하는 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심판때에는 누가 참 신자이고 거짓 신자인지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주일학교에서…’정직’에 대하여 행24:16말씀을 암송했었던 것이 기억나며…이것이 우연일까 싶었습니다.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부장집사님은..<양심>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인데…양심에 속임이 없어야 한다며 하나님은 다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해주라하시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회개해야할 자의 양심을 계속 두들기십니다.
사랑하는 자일수록 계속 채근하시고… 결국 두 손들고 진정한 뉘우침 가운데 돌이키게 하십니다. 여기까지가
하나님의 정의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예배를 드리며…비로소 마음이 탁 내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이든….양 쪽 모두를 다루시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