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잠깐 내가 가지고 있는 육신…. 이것을 어디에 사용할까?

히틀러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많은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했고 끝내 자신도 자살을 했지요. 슈바이처는 환자들을 위해, 부처님은 고통이 없는 해탈의 세계를 찾는데 자신의 육신을 사용했지요.
저도 육신을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 살아갑니다. 두아이의 아빠이기에 돈도 벌어야 하고 남편으로 자식으로 또 사회인으로 성실하게 살아가야 하겠지요. 나름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겐 그 이상의 꿈이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로 나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하나의 창이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전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만남의 장소로서 나의 몸을 사용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적인 제약이 없는 영이시기에 모든 것을 창조하실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영이시기에 육신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데는 어느정도의 한계는 있겠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눈높이로 자신을 소개하시니 그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기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천지만물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으셨고 우리가 보는 것은 존재하는 것의 모든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창조계의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으시기에 하나님은 지혜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창조계속에서 완전한 생명과 능력과 지혜가 되십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하나님의 최종적인 관심은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반응할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
인간만이 하나님께 반응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될수도 있고 흙으로 끝날수도 있겠지요.
자유의지란 하나님께 독립하고자 하는 의지 일수도 있고 하나님을 얻음으로 그 안에서 자유하고자 하는 의지일수도 있지요.
탕자의 비유처럼 탕자가 변한 것은 오직 하나 그의 의지였습니다.
독립해서 살고자 하는 의지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고자 하는 의지로 바뀐것뿐입니다.
탕자는 그런 경험을 통해 독립과 믿음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저도 과거에는 독립국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독립국이 주는 달콤함에 빠져 나름대로 잘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겐 모래위의 집이었습니다. 누군가는 너는 능력이 없어서 그런거야 너가 나약해서 그런거야라고 말할수 있지요. 저의 대답은 “옳습니다”입니다. 저는 능력이 없고 나약합니다.
그래서 저는 독립국의 꿈을 접었습니다.
이젠 또 다른 자유의지를 꿈꿉니다.  그것은 나와는 비교도 할수 없는 하나님… 그분안에서 삶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과 하나님이 있는 세상의 그림은 완전하게 다릅니다.
하나님이 있는 세상의 그림속에서는 나는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을 이룬자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흙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시는 태초의 꿈을 실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창조의 이유요 목적이니 이것을 하시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하나님은 자신이 가지신 하늘의 자원을 우리에게 부으셔서 우릴 하늘의 존재로 만드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늘의 존재를 성경에선 많은 이름(20가지 이상으로 보임)이 붙여져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은 우릴 이런 존재로 만드시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모든 것을 시작하게 했고 모든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만나며 나의 독립국의 꿈은 처음부터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몰론 독립을 알아야 믿음을 알기에 독립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독립은 믿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독립자체가 우리의 목적이 될수는 없습니다.

잠시 잠간 주어진 나의 육신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하나님을 기뻐하는데 사용하고 싶습니다. 일만달란트요 혼인잔치요 하늘보화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예수님께서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데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겐 한때 참 어려웠던 말씀이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어느정도 그 말씀을 이해할것 같습니다.
그 전 절(마7:11)에 악한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알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성령)을 저는 원합니다. “좋은 것”은 지금까지 자주 얘기했던 하나님의 영광(이름, 거룩, 완전)입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너무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아주 큰 것부터 공기한모금을 하나님의 선물로 볼수 있는 믿음도 하나님의 영광을 믿는 것중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으로 가서 우리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하나님을 대접해야 합니다. 가인처럼 하나님을 대접하면 가인과 같은 삶을 만들어 냅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이 원하는 삶이 아닌 스스로 자신이 그런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누구도 우리 삶을 대신 선택할수도 살아 줄수도 없습니다. 오직 자신만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공의롭습니다. 해를 선인과 악인(인간의 기준으로)에게 두루 비추십니다. 그 하나님을 어떻게 대접하는가로 그의 삶은 결정됩니다. 이미 그것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셨습니다. 태초부터 이 영적인 법칙은 변하지 않고 적용됩니다. 비록 인간의 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지금은 예수님으로 인해 완전히 우리에게 그 길이 보여진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대접함으로 모든 것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것이 이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을 하찮고 시시하게 여기는 것이 나에게 하나님에게 짖는 가장 큰 죄입니다.  만약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되었다면 저도 이 땅이 끝이요 무덤인것 처럼 살겠지만 하나님을 믿기에 결코 그렇게 살수가 없습니다.

우린 하나님에게 최고의 보물이며 상속자들입니다.
이렇게 우릴 대접하시는 하나님앞에서 우리도 우릴 이렇게 대접하고 이런 우리 자신과 하나님을 배워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과정이 부족하기에 우린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라는 말씀처럼 여전히 땅의 사랑에만 메이게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땅의 사랑만을 추구하면 언제 하늘의 사랑을 배워 원수까지 사랑하는 우리가 될수 있을까요.
떡으로 하는 사랑, 육신만으로 하는 사랑,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하는 사랑으론 하나님의 사랑에 이를수 없습니다.
사랑의 내용물과 이유가 바뀌지 않는한 사랑의 대상도 범위도 깊이도 바뀔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의 사랑에 메여있고
세상의 출세가 나의 인생의 성공과 축복의 전부 인것처럼 생각하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물론 우린 어느 정도 나의 사랑에 메일수 밖에 없고 세상에서도 잘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유하심은 내가 이룬 무엇과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유하심은 그 자체로 존재합니다. 그 부유하심이 사랑이요 그 부유하심으로 우릴 채우시고자 하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부유하심(영광)으로 충만해서 샬롬을 이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이 보고 싶어하시고 만나고 싶어 하시고 함께 살고 싶어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존재를 창조하기 위해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가진 존재가 될수 있음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최고의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의 선물은 우리가 부자이든 가난하든 건강하든 병들었건 우리 모두의 환경을 넘어 우리에게 주어진 완전한 선물입니다.  
이것을 가질때 우린 환경보다 큰 존재가 되고 환경을 이길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닌 고기잡는 법을 가르쳐 주듯 문제와 환경보다 큰 존재로 우릴 만드셔서 그것을 이기고 끝내 그 문제와 환경까지 선하게 바꾸게 하십니다.

애굽의 노예로 아무리 성공의 노래를 불러도 (그가 비록 하나님의 자녀의 이름표를 붙였다 할지라도) 가나안까지는 들리지 않습니다.
젖과 꿀이라는 하나님의 영광(부유하심)을 가질때만이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귀한 도구가 됩니다.

나를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
나의 육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나의 육신은 하나님의 부유하심을  볼수 있는
유일한 창입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눅18: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