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밑에서 / 이상은

형님, 거리의 은행나무 밑에 서 있습니다.
하늘 저 편에서 가을 바람이 불어 옵니다.
은행나무 잎은 노오란 황금 색깔보다 더 화사하고
선명한 빛깔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합니다.

찌들고 때묻은 도심은 회색 빛으로 지전분해 보이기에
더 아름다워 보이는 자태로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습니다.
거리는 온갖 차량의 굉음이 요란 합니다.각종 새균과
공해가 뒤범벅이 되어 부패되어 가고 있습니다.
꽉 찬 매연처럼,사람들의 질시와 타락해 가는 영혼들로
숨이 막힙니다.

노오란 은행나무 잎이 이런 거리의 가로수 밑으로 무참히
떨어져 내리고 있습니다.
지나간 봄 날 새로운 탄생을 구가하며 우리에게 소망을 주던
은행나무 잎의 연두 빛 새싹의 희망은 이제 없습니다.
지겹도록 더웁던 한 여름,은행나무는 내내 우리에게 깊은
그늘을 선사 했습니다. 매미를 키워서 매미가 연주하는
경음악까지 들려주었습니다.

오는 이 가는 이의 더위를 씻겨 주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 여름이 가고 하늘 저 편에선 가을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실과 나무 마다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
아름다운 가을이 왔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웬지
기쁘지 않은가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린 것 같은 얼굴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여 분노로 일그러진 것 같은 얼굴입니다.
심한 갈증으로 목말라하는 것 같은 그런 얼굴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에 나와 어디론가 급히 다니다가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은행나무 잎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향마을 어귀에 서있던 황금빛 보다 더 아름다운 색깔로
물든 은행나무를 기억해 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설악산이나 금강산,한라산이나 지리산의 아름다운 가을을
연상해낸 것은 아닐까요? 형님,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환한 미소와 함께 맑은 샘물 같은 깨끗함이 사람들의 얼굴에 반짝입니다.
그런데 형님, 제 어깨를 스치고 나풀거리며 떨어진 은행잎들은 이제 제 신발
위에 수북히 쌓였습니다.
생각해보니 은행나무의 잎은 저보다 훨씬 슬기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은행나무의 잎은 어떻게 봄의 계절과 가을의 계절을 그렇게 정확하게 판별할
줄 아는 것일까요? 봄과 가을 의 기온이 똑 같은 데도 말입니다.
체감하는 온도가 같은데도 말입니다. 똑 같아도, 봄엔 싹을 틔울 줄 알았습니다.
이제부터 열리는 화려한 삶의 때가 온 것을 알았습니다.
꽃을 피워서 열매까지 맺을 계획에 가슴이 벅찼을 것입니다. 또 똑같은 기온임에도
불구하고 가을이 온 것을 용케 알아내었습니다.더 이상은 즐거운삶을 계속해선
안 되는 때가 왔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이제 더 살 수 없으며 하는 수 없이 자기 생애의 대단원의 막을 내려야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삶의 역활의 적절한 시기를 안배하는 그 지혜에 감탄 합니다.그리하여 이제는
어쩌는 수 없이 고운 자태를 땅에 떨어 뜨립니다. 무참히 딩굴며 밟히우고 버려져서
어디론가 쓸려갈 앞 날 이 있는 것을 압니다.
은행나무 잎은 이제 나무의 둥치에서 떨어져나가 더는 살지 못하는 아픔을 감수 합니다.

나풀거리며 나풀거리며 한 잎도 남기지 않고 다 떨어져 내리고 있습니다.삶에 대한
미련과욕망이 없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겨울의 모질고 혹독한 추위를 이겨 내야 하는 엄마 나무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희생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아서입니다. 은행나무 잎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때를 맞쳐 살다가 그 마지막 모습까지 아름다운 것이 저보다 훨씬 높은 차원이란 생각에
젖고 있습니다.

형님,하늘 저 편에서 실 바람이 불어 옵니다.은행나무 잎새가 장엄하게 떨어져 내립니다.
황금빛 보다 더 아름다운 빛깔의 감탄스런 고운 잎이 실 바람에 나부낍니다.
춤추는 노오란 나비인양 나풀거리며 떨어집니다. 끈이 떨어져서 기어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끈 떨어진 연이 되어서 조용히 이 땅위에 내려앉고 있습니다.

                                                                             1999.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