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죽음을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너는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셨지요.  도대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란 어떤 것일까?

하나님의 일은 죽는 것이고 사람의 일은 사는 것인가?
내겐 그렇습니다.  내가 돈이나 명예나 성적인 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 길은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살기위해,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위해 죽는 것….
이것이 내겐 하나님의 일이요 사랑입니다.

죽으면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나는 당신의 노예가 아닙니다”
돈이여 명예여 성이여 나는 당신의 노예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다시 당신의 친구가 될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뿐이다.

예수님도 산상설교에서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아버지가 해를 선인과 악인에게 내리신것처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시리라”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아들들의 행함의 뿌리가 아버지여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만 나는 나의 거짖된 본능에서 벗어날수 있고 남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을수 있고 독립적이고 조화롭게 세상에 설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아니고도 그럴수 있다면 좋겠지만 제 경험이나 제 꼬라지로는 불가능합니다)

결국 모든 것의 노예가 아닌 참자유자로 서는 것 또 모든 것의 친구로 설수 있는 방법은 내겐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 제겐 이 방법뿐이고 이 방법밖에 모릅니다.

그러기에  부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랑이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땅인 나와는 비교할수 없는 하늘이신 아버지를 바라봅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만을 바라보며 그 이름을 사랑하고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
이것이 아들의 기쁨이요 의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의 모습이라 믿습니다.

이것은 환경을 넘고 내 자신을 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줄수 없고 내가 스스로 만들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자체로만 가능한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요 영적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존재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너무 추상적이고 현실적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처럼 사람의 일, 즉 육신의 일에 마음이 빼앗기면 그럴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라고  하셨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하셨지요.

그러므로 우린 영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육이 무엇인가를 압니다. 육에만 머물러 있으면 영(하나님은 영이시니)은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제가 말하는 영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것외엔 어떤 것도 영일수 없습니다. 물론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영이지만 그렇게 보일때 그것은 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영이다 육이다가 아닌 우리의 마음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경험하면 영이 되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육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꽃한송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름)을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예수님에게 모든 것은 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이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을 볼수 있는 것입니다. 환경을 넘어 이미 존재하는 모든  존재로 하나님의 이름을 경험하는 것이 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육신의 문제는 보통 환경의 문제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문제가 곧 육신의 문제입니다.
육신의 문제 또한 우리에겐 중요합니다. 우리 몸을 존재하게 하고 또 우리의 우리됨을 증거하는 것이 육신인데 어떻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도 이런 육신을 돌보고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우릴 영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육신의 문제는 하나님의 눈안에 있기는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가 해결해야 합니다. 가령 승진을 하고 싶다면 우리가 더 부지런하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자격도 안되는 나를 승진시켜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더 열심히 하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또 어떤 교인이 아파서 병원비가 부족하면 함께 힘을 모아 도와 주어야 합니다. 돈이 많아 펑펑쓰면서 그런 사람을 돕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만 하는 것을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환경을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강건해 져서 이기길 원하십니다. 병원균이 다가오면 이것 막아주세요 저거 해결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 병원균을 이길수 있는 존재가 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문제는 환경을 해결해 달라는 기도가 아닌 환경을 이길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 옳습니다.
이렇게 육식의 문제를 접근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하게 자유의지와 선택권을 주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엔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에 무슨 역할을 하시는가라고 물을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을 대답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부분을 맡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주십니다. 세상이 줄수 없고 스스로 만들수 없는 하나님자체를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것을 가짐으로 육신의 세상을 이길수 있습니다. 오른 뺨을 치면 왼뺨을 댈수 있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적인 부유함을 자녀들에게 주심으로 세상의 문제를 이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세상, 즉 육신의 삶을 사는 도구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역과 나의 영역은 독립되어 있으면서 공존하며 또한 협력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영이 세상을 사는 육에 간섭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실재로(?) 완전하게 간섭하고 섭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보존하시고 인간이 육신의 세계속에서도 완전하게 우리를 다스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요 통치입니다.
완전한 자유의지와 선택을 허락하시면서도 완전하게 통치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나라입니다.

이런 하나님나라의 삶을 예수님에게 배워가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속에서 하나님나라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의 행함이나 말에나 그 무엇에서건 하나님의 향기가 납니다. 그것이 어떨때는 부드러울수도 있고 또 어떨때는 거칠어 질수도 있겠지만 그것의 바탕색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매라고 믿습니다.
그러기에 열매는 뿌리가 있고 과정이 있어야 맺히는 것입니다.
열리기만 했다고 하나님의 열매가 아니고 하나님의 향기가 나고 하나님의 맛이 나야 그것이 하나님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도 열매를 맺었지만 그들의 열매에선 인간의 욕심의 냄세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럼 나의 열매는 어떨까? 어떤 향기와 맛이 날까?
더 두고 봐야지요.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뿌리가 되는 나무로 자라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좀 작아도 좀 늦어도 상관없이 그저 하나님의 나무로 자라서 하나님의 열매를 맺고 싶습니다.

이것이 제가 하루를 사는 이유요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반석위에 집을 짖는 지혜로운 사람이라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기도와 같습니다. 그 기도를 듣고 그 기도를 응답하고 이루는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예수님이 반석위에 집이 되길 위해 기도하셨는데
그 집을  완성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또한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가능한 것이니  
하나님만이 이루실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으셨던 반석위의 집을 짖는 것은 하나님과 나의 합작품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그것을 믿는 나의 믿음으로 그 집은 지어지고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심으로 나는 나의 일을 함으로 그 집은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나의 일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의 뿌리여야 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더 깊이 땅으로 뻗어 갈수 있도록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내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을 누림이요 자녀됨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가 송아지를 맛있게 먹고 손에 가락지를 끼고 새신을 신고 잔치에 참여하였던 것처럼
내가 하나님을 바라봄은 그런 누림자체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내겐 가장 기쁘고 가장 행복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