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렵지만 중요한 질문은 ”  나는 누구인가”일 것이다. 자아정체감….
나는 누구일까? 이 질문에 대한 많은 대답이 인간의 역사속에 있어 왔다.
그런데 이 질문의 대답은 보통 믿음으로 답할수 밖에 없다. 왜냐면 인간 누구나 믿음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우리중에 믿음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모든 인간은 믿음에 따라 산다.
그러므로  믿음을 이해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다.

먼저는 세상의 무엇이나 자신의 무엇으로 자아정체성을 찾는 사람들이다.
돈, 명예, 집, 젊음, 지식, 인간관계 등등… 이러한 것이 나는 누구인가를 얘기해 주고 나의 값어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이것이 그들의 믿음이다.

둘째로 불교적 믿음인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 나는 누구인가을  설명한다.
서산대사는 인생을 뜬 구름이라 했도 인간의 모든 계획과 생각이 불타는 화로위에 한 점 눈이라  했다. 불교적 시각을 잘 표현한 구절이다.
불교적 믿음에는 나는 없다. 단지 우주만물과 하나된 내가 있을 뿐이다. 마치 어머니처럼 …
그러니 꽃으로 피면 아름답게 향기내고 바다가 되면 바람불면 파도치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유와 해탈을 노래한다. 이것도 믿음이다. 인간의 모든  인위적인것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보면 그렇게 보인다. 공이니 무이니 하는 것은 이렇게 세상을 보기에 나온 말이다.

두가지의 믿음을 얘기했는데 나는 누구일까라는 것으로  대답해 보면  첫번째는 자아요 두번째는 무아이다. 스스로 자기를 만드는 사람이요, 자신은 오직 우주만물과 하나됨 그래서 끝도 없는 존재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둘다  육은 벗어나지 못한다. 첫째는 보이는 육을   추구하는 것이요  둘째는 보이지 않는  육을   추구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나는 누구인가”를 알 지혜는 없으며 “나의 값어치”를 발견할 능력도 없어 보인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못찾았고 지금도 철학자들이나 문학도들은 길도 없는 곳에서 헤멘다. 과학은 또 어떤가? 물론 과학이 많은 것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고 인간은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인류문명을 발전시키려고 지구의 나무가  삼분의 일이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구는 인간의 파괴에 몸살을 앓고 있다. 과학은 우리의 도구이지 목적일수 없으면 더 나아가 우리의 영혼의  문제는 어떤 답변도 할수 없다. 과학은 도구일뿐 신은 아니다. 과학이  “나는 누구일까”에 대한 답을 줄거라 안심하고 믿고  있다면 빨리 포기할수록 좋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그러면 나는 누구일까? 라는 질문의 답은 어디에서 찾을까?
당연히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찾는다.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나를 설명한다.
너는 하나님의 보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유물중에 최고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기전에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부유하심을 알아야 그것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의 값어치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모르면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기를 불러봐도 가슴은 차가울 뿐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말씀으로 가능하다.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주장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주장하신다.
그 주장안에 하나님의 아들(딸)인 내가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기를 주장하신다.
나는 너를 지었고 너를 살게 했고 너를 완성할 것이다.
나는 창조주요 창조를 완성할 것이다.
너의 영혼은 나의 이름을 담는 그릇이다.
너의 몸과 지구나  우주만물은 너의 영혼을  위한 옷이요 집이다.
너는 잠시잠깐 이 땅에 머무를 것이요 진정한 너의 집의  나의 이름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주장이  말씀이요 그런 말씀을 받아 들임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믿음  즉 하나님의 자기주장을 받아들임으로
우린 사랑이 되고 최고의 지혜자가 되고 (영적으로)부유한 자가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린 진짜 “나”를 만난다.
하나님의 자녀인 나, 하나님의 상속자인 나, 영원한 나, 하나님의 최고의 보물인 나,
존재의 최종목적인 나, 예수님과  똑같은 기쁨을 가진 나로 태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육이 아닌 영으로 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네게 이른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늘의 존재로 살리는 것은 영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아버지를 주장함으로 우릴 자신과하나되게 한다.
예수님은 아버지로 인해 우리가 자신의 친구요 같은 포도나무요 함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이름안에 사는 삶을 배우면 우린  예수님처럼 고백할수 있다.
예수님이 아버께도 가는 길인데 우리가 그 길을 걸으면 우리도 길이라   말할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아버지로인해 살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된다.
맏아들이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똑같은 고백을 할수 있게 된다.

작을지라도 이렇게 예수님처럼 고백할수 있게 되면 이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분명하게 답할수 있게 된다.

나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존재의 목적이요 하나님의 꿈이요 영원한 하나님의 부유함에 동참할 그런 존재다. 특별하고 신비하고 놀라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값어치만큼 나의 값어치가  높아진 것이다. 하나님의 부유하심을 가진 아들(딸)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도 아니요 무아도 아닌 신아 즉 믿음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이다.
이것이 우리의 진짜 모습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계획되고 완성될 우리의 이름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자체를 추구하지 않거나 세상을 탐내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존재하게 하면 “영적인 나”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선언적으로나 미래적(?)으로야 가능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라고 고백할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탄생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미 우린 특별한 존재인데 여전히 세상에서 나의 값어치를 찾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상속자의 정체감을 가질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린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진짜 나를 만나려면 예수님이란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진리는 한마디로 하면 “하나님은 부유하시다”이다. 이 부유하심이 육체의 도구가 아닌 영혼을 살리는 도구로 사용되게  될때 우린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존재인가을 알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부유하심으로 우리 영혼이 살아나면
우린
이미 부유하기에  세상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
이미 사랑을 알기에 사랑을 구걸하지 않게 되며
이미 지혜자이므로 지혜를 묻지 않으며
이미 생명이므로 죽음은 사라지며
이미 나는 누구인가를 알므로 나를 더 이상 찾지 않게 됩니다.

그러기에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내가 있고 모든 것을 완성하는 대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짐으로
“진짜 당신”
특별하고 특별한 당신을 만나십시요.

인생은 뜬 구름이 아니요 세상의 것에  나의 값어치를 찾는 시간도 아닙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이름안에 있는 특별한 당신을 만나기 위한 한번의 기회요
특별한 무대입니다.  그 무대위에 서십시요. 그리고 그 주인공이 되십시요.

그리고  그 무대위에서
특별하고 특별한,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것인 특별한 당신을 만나십시요.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