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자신의 충만한 삶 (영적인 삶, 신령한 삶, 하늘의 삶, 완전한 삶…)을 우리에게 주길 원하셨습니다. 이 삶만이 우릴 예수님처럼 존재 (영혼, 이름, 관계, 사랑, 기쁨, 지혜, 능력, 창조목적, 거룩, 완전…)의 완성을 이루게 됨을 아셨기에 우리에게 이 삶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충만한 삶을 영생이라고도 하는데 예수님은 이 삶을 여러가지 그림으로 또 가르침으로 보이십니다.
먹고 사는 것이 전부인 우리에게 깊은 곳으로 와서 그물(생각, 믿음..)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깊은 곳…. 이곳에서만 우린 예수님의 충만한 삶을 건져 올릴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와서 보라” “내게 와서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보여 줄게 있으니 와서 보라는 것이요 알려 주고 싶은게 있으니 와서 배우라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예수님의 충만한 삶입니다.

이런 것은 복음서의 모든 곳에 존재하고 복음서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반석위의 집, 열매가 풍성히 맺힌 나무….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누리셨던 충만하고 부유한 삶의 모습들입니다.

그리고 우릴 초대합니다. 너도 나처럼 이런 삶을 살수 있니…
저에겐 도전이요 충격입니다. 어떻게 내가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을 따라 갈수 있을까?
안전한 배에서 풍랑이 이는 바다로 발을 내디디듯 본토아비집을 떠나듯 그렇게 그 길은 나를 두렵게도 하고 외롭게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너가 아닌 나를 믿어라. 너는 모르지만 나는 알고 너는 못보지만 나는 본다. 그러니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
그렇게 예수님은 나의 첫 발걸음을 걷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그런 예수님을 조금은 따를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 걸음마이지만 그래도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의 정상에  선 사람들 (예를 들어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나 종교가인 부처나 서산대사나  세상의 왕이었던 엘비스….) 이 외치는 한 마디는 ” 이 산이 아닌가 봐” 입니다.  내가 평생 올라 와서 보니 이 산이 아니었나봐! 그러니 이 산을 올라 오지마. 너희는 이곳에 올라오지 말고 다른 산을 찾아 봐.
그러나 그들의 외침은 공허합니다. 사람들은 귀를 막고 자신이 직접 올라가야 직성이 풀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한번 뿐인 인생을 허비합니다.몰론 저에게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지요. 부처님이야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지만 저에겐 그렇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성경에서도 솔로몬이 모든 것을 가진 후에 했던 말이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였지요.
그래도 우린 솔로몬의 영광이 탐이 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산, 하나님의 산을 보이십니다.
이 산을 오르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국 하나님의 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의 운명이요
우리가 가질수 있고 누릴수 있는 최고의 양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얘기하고 싶은게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라는 말을 들을때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의 뜻을 따라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일이나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연상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의 행동은 어떤 것일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이 인기를 끌기도 했고 지금은 “긍정의 힘”이란 책이 인기를 끌고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생각보다는 많은 과정을 겪어야 이룰수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적인 부유하심을 내가 소유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먹고 마심의 삶을 넘어 예수님처럼 영적인 하나님으로 사는 것이지요. 이것이 거듭남이요 육이 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거듭남….
하나님으로 거듭난 사람은 작더라도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원합니다. 자신의 무엇때문이 아닌 하나님자체를 원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부유하심을 알아감으로  하나님의 상속자로 사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린하나님을 위해 살뿐 나를 위해 사시고 나를 위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려고 하지 않습니니다. 하나님의 수준으로 우릴 끌어 올리려는 하나님을 우린 버리고 끊임없이 우리 눈높이로 하나님을 끌어 내립니다. 그렇게 우릴 묶고 있는 밧줄을 더 굵고 강하게 만듭니다.
입만 열면 하나님을 얘기하고 입만 열면 사랑과 믿음을 얘기하지만 이미 그것이 하나님의 인정하심에서 빗나가 세상속에서 자신의 자신됨을 주장하는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자신의 직업이나 일이나 가정을 빛나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비록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라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이름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자체를 경험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임에 설레 본적이 언제 였는가?
우리가 천지만물을 만드신 능력에 흥분해 본적이 있는가?
하나님이 나를 예수님처럼 최고의 존재로 약속하셨고 원래 부터 너는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너는 영원히 만물을 누리며 다스릴것이라 하시는데 이런 하나님과 자신으로 인해 기뻐본적이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양식인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값어치인데…
세상속에 갇혀 세상만을 노래하고 세상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고….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이 주인이시지만 우리가 세상의 노예가 되면 이미 세상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우릴 죽이는 흉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린 세상에 의해 나의 값어치를 매기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오직 우리 영혼의 아버지인신 하나님께 우리의 값어치를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의 값이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이 너의 값어치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듯 너도 똑같은 값어치를 가졌다. 그 값어치를 만나라. 하나님의 이름만큼의 값어치인 너를 만나라….

이렇게 하나님의 뜻은 내 영혼의 가치를 하나님안에서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도 자연계도 모두 이것을 발견하도록 허락된 선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은 자신이란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지 더 깊은 감옥에 갇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해 조금더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만약 누군가 제게 예수님을 가장 잘 설명할수 있는 구절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저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라는 구절로 얘기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예수님되게 하셨던, 충만한 삶을 만든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아버지…..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답입니다.
잃은 양에서 양을 잃은 목자는 양을 찾아 헤멥니다.
그러나 또 하나 살펴 볼것이 양입니다.  목자를 잃은 양.
그 양은 이젠 죽음만이 남았습니다. 양이 경험해야 할 수 많은 감정들…
죽음, 외로움, 두려움, 배고픔……
양은 그렇게 목자를 잃음이 무엇인가를 경험합니다.

이것은 탕자도 동일합니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남으로 아버지를 잃음을 경험합니다.

잃음은 얻음을 가르칩니다.
죽음은 생명을 가르칩니다.
어둠은 빛을, 가난은 부유함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잃음으로 태어남은 하나님을 얻음이 무엇인가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다시 하나님으로 태어나야 하고 하나님으로 자라고 완성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우린 실재로 예수님처럼 하나님아버지와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은 선포나 전가의 문제를 넘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한다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짜장면을 먹어 보기 전에 결코 우린 그 맛을 모릅니다. 먹은 것으로 아무리 여긴다고 그 맛까지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억지요 허상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실재로 예수님처럼 아버지와 만나고 그 분의 거룩과 이름과 영광을 경험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함할때 이 경험이 예수님과 같은 영적인 경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무렇게나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사랑으로 경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경함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을 “주여 주여”한지 않고 자기가 부인되고 하나님이 사는 방향으로 이어질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경험이 예수님과 동일하게 이루어 질때 우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고
우린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때 우린 예수님이 누렸던 충만한 삶을 누리고 예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질때 우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우릴 의인 즉 하나님과 관계가 온전해 졌다고 하십니다.
정말 보기에 좋으니까 좋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의인이 되려면 진짜 믿음, 예수님이 가지셨던 믿음이 필요합니다.
진짜 믿음…. 이 믿음만이 충만한 삶이 실상이 되게 할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세상을 무엇을 빛내고 정당화하는 악세사리의  믿음이 아닌
하나님을 소유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가진 무엇도 함께 보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따름으로 우리안에 천국(하나님나라, 이름, 영광…)이 이루어 지고
최고의 작품으로 빚어져가고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릴 자신과 같은 국화빵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볼수 있는 우리들….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이것을 위해 모든 것이 우릴 위해 투자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마시는 한 모금의 공기값은 얼마일까?
우리가 세상에 사는 값은 얼마일까?

그러나 그 값이 무한대의 값일지라도 그것이
우릴 향하신 하나님의 꿈과 목적을 위해 투자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그렇게 특별하며 신비하며 놀랍습니다.
하나님을 담을수 있는 영혼이기에 최고의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질수록 우리의 모든 것은 일만달란트가 됩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이런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을 기다립니다.
죽음과 태어남의 수많은 반복으로 그 길을 준비하고 섬깁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의 놀라움…
모든 천지를 움직여서 하나님의 상속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열심….
그 열심을 예수님에게서 배우고 예수님에게서 봅니다.

한번의 인생…
당신은 무엇을 가지길 원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