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엘비스의 인기가 치솟을수록  그의 여성편력과 폭식과 약물의 과다복용도 늘어났다. 42세의 주검에는 약물과 과체중의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고 한다. 얻은 만큼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보상심리때문이었을까? 잃기전에 누리자! 이런 거였나… 아니면 얻음이 아무것도 아님을 안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가 누렸던 인기는 그를 악몽속으로 몰고 갔고 결국 비극적 죽음을 맛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비워봄은 어떨까? 비우고 비우고 비우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비움으로 채워지기 위해 또 무엇을 채울까?
서산대사는 “여보게 친구”하는 시에서 “생은 한 점 뜬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점 뜬 구름이 사라짐이라.
구름이 실체가 없듯 인생도 그러하다. 수천가지의 계획과 수만가지의 생각이 불타는 화로위의 한 점 눈이로다”
라는 구절이 있다. 비움이 남긴 자취일것이다.

철학은 또 어떤가. 소크라테스는 지혜자를 찾았으나 결국 만난것은 ” 무지의  지” 즉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다면 자신은 무지함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 자신(의 무지함)을 알라고 한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지혜요  인간에게 주어진 지혜은 거의  무지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 이것이 소크라테스에겐 최고의 지혜였고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던 것이다.
철학의 역사는 단지 이것을 반복하는 역사이다. 아니 소크라테스를 죽였듯 무지의 지를 거부하고 끝임없이 지혜를 스스로 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소크라테스를 넘지는 못하는 것같다.

그러나 예수가 주신 새로운 지혜와 삶은 다르다.
비움과 채움을 완성하며 철학자들이 찾는 모든 질문에도 답을 하신다.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이름, 영광,거룩, 완전)으로 모든 것에 답하신다.
하나님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내가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안다.

예수는 우리에게 life의 삶(먹고 사는 삶)에서 zoe(하나님나라와 의)의 삶으로 초대하신다.
육에서 영으로…. 이것이 예수가 내게 준 삶이요 도전이다.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이란 말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나의 무한한 값어치가 있다. 부끄럽고 부끄러운 나의 인간적인 사랑이 있다.

예수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완성된 나를 향한 부르심이다.
그가 믿었던 믿음으로의 초대이다.

조에의 삶은 그것을 구성할수 있는 재료가 있어야 한다.
세상(자연계와 인간계)에 대한 새로운 언어, 시각, 해석, 가치등…
서산대사도  소크라테스도 결코 내게 줄수 없었던 답을 주신다.

예수는 가르쳐주신다. 세상은 하나님으로 이해되고 하나님은 세상으로 이해된다.
나는 존재자체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길이신 예수님을 따르면서 존재함이 곧 초월이요 신비임을 느낀다.
어떻게 시작할수 있는가? 끝은 있는가?
이미 초월이요 신비이다. 나는 이런 초월앞에 놀라고 놀란다.
존재자체가 하나님의 게시판이다.
존재자체가 완성을 향한 부르심이다.

이렇게 세상을 읽게 된 것은 예수님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많은 것 아니 모든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모든 것이 되도록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

모든 것이 되는 것은 예수님처럼
우리도 아버지이름이 거룩히 여길수 있으면 된다.

예수님은 우릴 자신처럼 만들기 위해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이름을 심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부유하심이기도 한데 크게 능력과 사랑으로 말할수 있다.
몰론 육이 아닌 영적인 능력과 사랑인데 그것을 우리가 가짐으로 우린 비로서 하나님의 상속자요
일만달란트의 값어치인 나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에게 영혼의 값어치는 하나님의  이름만큼이셨다.
우린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 보이는 하나님이다.
이 값어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맛본적이 있는가?
만약 우리가 이런 값어치를 만나면 우린 이런 자신으로 놀래고 감격하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면서 그런 자신에게 놀라지 않고  세상의 시시한것에 울고 웃는 인생이라면
우리가 정말 그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값어치를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이요 부유하심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재산목록일호도 이 이름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예수님이 무엇을 주고 싶어 하실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복음서의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 영혼에 담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 이름이 내 영혼에 담겨지는 과정…. 그렇게 나의 존재가 완성되는 과정이다.
그것은 육이 영이 되는 과정이다. (욱으로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그것은 겨자씨가 나무가 되는 과정이다.
그것은 백데나리온과 비교할수 없는 일만달란트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매일 먹어야 하는 일용할 양식이고 먹지 않으면 자랄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것은 산이 바다에 던지워지는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원래부터 너의 것이었던 것이다. 단지 너를 용서하는 길 뿐이다.

“그렇게 한즉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것이다”
그것은 너가 그렇게 할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너 자신만이 할수 있는 오직 너의 몫이다.
그것을 함으로 진정으로 너는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너에게 줌으로 너를 사랑하는 것이요
너와 하나되는 것이다.
그리고 너의 길이 아버지께로 가는 생명의 길이 되게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를 그 이름으로 완성해 나간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하늘을 주고 하늘의 존재로 만드신다.

존재의 초월과 신비의 하나님…..
예수에게 하늘은 그렇게 존재했다.
하늘에 계신 그리고 하늘로 존재하시는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가르친다.
예수는 그렇게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다.

그 가르침앞에 나는 문둥병자요 소경이요 귀신들린자가 된다.
나의 인간적인 사랑의 조건들이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나의 영혼의 목마름을 간구한다.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 아름답고 거룩한 이름을….

그렇게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막았던 나의 이름이란 문을 엽니다.
문을 열면 문은 그렇게 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