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기쁨을 나누고 싶어 글을 올립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기쁨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 기쁨은 하나님이어야 하겠지요.
하나님이 가지신 영원한 생명을 기뻐하는 것
천지를 만드신 능력과 솜씨 그리고 부유하심을 기뻐하는 것,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을 기뻐하는 것,
무엇보다, 예수님과 같은 영광의 몸과 권세를 나를 위해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 ….
세상은 나를 알아 주지 않아도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그것을 보물처럼 여기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하나님을 자랑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최고의 능력이요 가장 값진 보물이겠지요.
나의 눈에야 나는 볼품이 없지만 하나님의 눈에 나는 최고의 보물이요 하나님의 꿈임을 아는 기쁨…. 이런 기쁨을 가지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를 알게 되겠지요..

저는 하나님이 가지신 능력이나 생명이나 사랑이나 영적인 계획등 인간에게 보여진 하나님의 모든 것을 한 단어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에겐 이 영광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자녀인 우리에게 이것을 주시지요.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행복하고 자유할수 있고 기쁨으로 살수 있음을 하나님이 아시기에 우리에게 이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되는 것도, 천지만물에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담아 두신 것도 결국은 자녀인 우리가 이 영광을 맛보며 기뻐하길 원하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수 없다면 우린 무엇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기쁨을 누릴수 있겠습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큰 아파트입니까, 착한 성품입니까, 나를 불사르는데 내어 줄수 있는 마음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앞에서 인간의 이러한 것은 가을바람앞에 낙옆이지요.

저는 진짜 사랑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내게 주시는 것이라 믿고 있는데 이것이 자녀인 우리가 매일 먹어야 하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이 세상을 승리하며 살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질문은 “이 양식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고 있는가이고 또 그것이 정말 내 손에 있는가”이겠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이 영광을 모르고 맛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거나 또 그런 것으로 사랑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런 것을 경계하기 위해 예수님은 세 번의 시험을 당하시고 많은 곳에 육체의 소욕을 피할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지요. 어찌되었건 중요한 것은 육체의 소욕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성령의 소욕)을 맛볼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스데반이 돌이 날아오는 중에도 용서를 말할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볼수 있었기 때문이지요(행7:55) 바울도 감옥에서 기뻐하라고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영광을 보고 또 자신이 이 영광안에 있었기에 그렇게 얘기할 수 있었지요.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가장 부자요 자유자요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던 바울…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용서와 사랑을 말할 수 있었던 스데반…
이들이 바로 예수님이 주신 영의 양식을 먹고 하나님의 영광이란 열매를 맺은 사람들이지요. 아담에게서 잃은 영광 즉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안에서 회복한 사람들이지요.
새로운 피조물이요 하늘의 시민권자들….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먹을수 있게 되면 이런 열매는 맺히겠지요.
우리가 십자가를 이해함도 또 주님이 자신의 살고 피를 먹으라는 것도 나아가 부활을 감격으로 받아 들일수 있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기 시작하면서 이겠지요. 요즘은 이 영광을 알고 맛보면서 하나님의 아들(딸)이란게 너무 대단하고 놀랍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정말 대통령이나 삼성의 이건희회장이 전혀 부럽지가 않습니다. 세상이 만들어 내는 어떤 기쁨도 하나님의 영광이 주는 신령한 기쁨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요. 바울이 모든 것으 배설물처럼 여기게 한 기쁨이 있다고 했는데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도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얘기하셨지요.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아들의 기쁨과 가치를 가지셨기에 천하만국으로 유혹하는 사단을 이기시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면 모든 것이 선물이요 반짝이는 보물이 되기에 진정한 섬김도 사랑도 가능한 것이겠지요. 궁극적으로 우린 이 영광으로 성경의 모든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게 할 수 있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런 성경의 모든 고백은 우리가 영광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고백되는 것이지요.  성경의 완성은 내가 성경의 모든 고백을 마음에서 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나의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무엇으로 가능한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름도 결국은 내가 예수님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인데 내가 이렇게 되려면 예수님이 가지셨던 같은 기쁨, 같은 믿음, 같은 가치관, 같은 아픔을 가질때 비로서 가능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겉만 닮아서는 불가능하고 예수님이 먹었던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영광을 가져야 이게 가능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럴때 성경은 친구처럼 다가오고, 찬양은 음이 아닌 가사를 음미하게 되고, 예배도 신령한 마음으로 드릴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신령한 변화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지요.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눈을 뜨기 시작함으로 시작되는 것이지요.  결국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광(사랑)을 볼수 있는가 이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에 집중하시고 하나에 모든 것을 투자하십니다.

바로 아버지의 영광(사랑)이지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마11:2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요15:9)
아버지의 사랑… 이것이 요15장의 핵심단어요 예수님께서 맺고자 했던 열매이지요.
이것은 눅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도 잘 그려지지요. 탕자의 아버지…
모든 이에게 아무것도 아닌 비참한 상태가 되었을때 탕자를 사랑한 아버지… 잔치를 벌이고 살찐 송아지를 잡고 새옷을 입히는 아버지… 그때 알았겠지요. 세상은 어떤 곳이고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은 그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그 부유하고 사랑이 많고 기다리시는 어버지가 우리의 하나님이라 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가 탕자처럼 이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때 우린 그분의 아들과 딸됨이 얼마나 놀랍고 특별한 것인가를 알게 되지요.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라고 자신을 고백할 수 있음도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지요.

이렇게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빌1:6)이 사랑이요 복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 그 안에 사는 것이 결국은 구원입니다.
이것을 초대교회성도들을 잘 알았기에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고 한 것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고백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안에 사는 것이 구원임을 알았던 사람들 그리고 그것이 사랑임을 경험하고 살았던 사람들……. 그들은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인 (행)복의 근원들이었지요.

우리도 그래야지요. 하나님의 아들들인 우리도 그래야지요.
똑같은 구원과 복음이 있는 우리도  그들과 같은 기쁨이 있어야지요.

우리에겐 정말 그런 하나님의 영광이란 (행)복이 있는가?
우리 손으로 그것을 만지며 기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린 진짜 사랑과 진짜 기쁨을 가진 존재요
내가 누구인가를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한
복의 근원들이겠지요…..